성곽을 찾아서

임진강변 백제,신라,고구려가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접전한 곳, 파주 칠중성(坡州 七重城)('17.06.18토)

필그림2 2017. 6. 18. 19:18

임진강변 백제,신라,고구려가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접전한 곳, 파주 칠중성(坡州 七重城)

- 군사요충지로서의 중요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산새소리 만이 적막을 깨는 찾지않는 역사의 현장 -




칠중성(七重城)은 파주 적성면 구읍리의 적성면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중성산(해발 149m) 정상을 에워싼 테뫼식 산성으로 길이 600m 정도이다. 백제가 이 지역을 지배했을 당시에는 이곳을 난은별(難隱別)이라 했으며, 475년(장수왕 63) 남진 정책의 성공으로 고구려가 한강 유역 일대의 지배권을 확립한 때에는 낭비성(娘臂城)이라 하였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정복한 이래 산성을 쌓고 이곳을 치소성(治所城)으로 삼았다.

칠중성에서는 임진강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임진강 도하를 저지할 수 있었으며, 북방 세력의 남하를 방지하는 길목 역할을 하였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정복한 이래 산성을 쌓고 이곳을 치소성으로 삼아 칠중성이라 하였다. 638년(선덕여왕 7) 고구려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으며, 660년에는 고구려와 말갈의 공격으로 함락되기도 하였다. 경덕왕 대에 중성(重城)이라 고쳐 내소군(來蘇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양주와 황해도 내륙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로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고려 초에는 적성현으로 바뀌었으며, 1018년(현종 9)에는 장단현(長湍縣)의 속현, 1062년(문종 16)에는 내속(來屬)하였고 1106년(예종 원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려사(高麗史)』[권56, 지10 지리 왕경개성부 적성현]에 따르면, “적성현(積城縣)은 원래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인데 신라 경덕왕은 중성현(重城)으로 고치고 내소군(來蘇郡)의 관할하에 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초에 다시 지금 명칭으로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장단현의 소속현으로 되었다가 문종 16년(1062)에 본부[왕경 개성부]에 소속시켰으며 예종 원년(1106)에 감무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지3곳, 건물터5곳, 우물터 등이 남아있다고 했지만 군사시설과 우거진 수풀로 제대로 확인 할 수가 없었다. 북쪽 성벽일부가 확인되었는데 축성의 특징이 양주 대모산성과 수법이 거의 일치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1951년 4월 칠중성은 캐슬고지라는 이름으로 한국 전쟁사에 다시 기록되어 진다. 칠중성에 영국군 29여단 휘하 글로스터 대대가 주둔하였는데 1276년 당나라 유인궤 부대가 그랬듯, 중공군 3개사단이 서울행 직행로인 이곳 칠중성(캐슬고지)으 ㄹ공격하였다. 고지는 6시간만에 함락되고 후퇴한 영국군은 7km 남쪽 감악산 설마리 계곡에 재정비하여 4월22일에서 25일 3일간 밤낮없는 격전 끝에 59명이 전사하고 530명 부상 또는 포로가 되고 겨우 69명이 생환되어 많은 희생을 치른 전투였지만 이 설마리 전투는 중공군의 침공을 저지한 성공적인 방어전투로 평가 받고 있다. 



<참고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경향신문 연제기사 -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8) 파주 적성 칠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