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7세기 중엽 신라의 백제 정벌 전초기지 상주(尙州) 금돌성(今突城)('17.09.16토)

필그림2 2017. 9. 17. 22:00

7세기 중엽 신라의 백제 정벌 전초기지이자 고려말 몽고 침입시 승전한 역사의 현장, 상주(尙州) 금돌성(今突城)

-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기록된 금돌성 또는 상주산성은 백화산 정상 한성봉(포성봉) 일대에 위치한 금돌성(백화산성)으로 추정된다 -



금돌성(今突城)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백화산 정상 한성봉(포성봉,933m)을 포함한 동쪽 주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은 산성이다.

삼국시대에는 "今突城", 고려시대에는 "尙州山城", 조선시대에는 "白華山城","石城","古城","白華山古城","白華古城","普文成","金成"등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워졌다. 『동사강목』에서는 금돌성의 위치를 상주 백화산으로 비정하였다. 1969년 단국대학교에서 백화산성에 대해 학술조사를 실시하여 금돌성으로 추정하였으며, 이후 2000년부터 2001년까지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

산성은 백화산맥에서 동쪽으로 뻗은 3개 능선 중에 남쪽과 그 중간에 뻗어 내린 능선을 이용하여 내성과 외성, 차단성을 갖춘 포곡식 석성으로 되어있다. 규모는 외성 둘레가 1,953m, 내성 둘레는 4,230m로서 전체 둘레는 6,183m에 이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7년조에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과 흠춘(춘을 혹은 순이라고도 한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병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응원하도록 하고, 임금은 금돌성에 가서 머물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백제 정벌시 전진기지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몽고란 때 민관합동에 의해 이룩한 전승지와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의병활동지등 역사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북쪽 내성 중 해발 800m 지점에 있는 북문지 부근 성벽은 1978년 국방유적 보수사업계획의 일환으로 길이 약 80m, 폭 4m로 복원되었다. 

금돌성 안에는 5개의 샘과 1개의 계곡 및 내.외 수문지, 4곳의 문지와 암문 2곳을 비롯해 용문사지, 보문암사지 등 2곳의 절터와 대궐터라 불리는 유지를 포함하여 건물지 6개소 등이 남아 있다. 보문곡에서 시작되는 내성은 좁은 계곡을 출입문처럼 중앙에 두고 양쪽 비탈에 쌓았으며 산 정상에서 외성과 합류하게 되어 있다.

금돌성이 주변에 위치한 영동과 상주일대 추풍령은 상주-추풍령(화령)-보은-청산이나 보은-문의(일문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이는 공주-대전-옥천으로 통하는 대백제 교통로와 연결되어 나제교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이는 상주 금돌성-석문재-굴산성-삼년산성-일모성으로 연결되는 통로와 상주 노고산성-삼년산성-일모성으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반까지 신라는 대백제와의 전투에 집중한 시기이다. 이때 추풍령로는 신라의 백제공격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군사작전로였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특히 660년 대백제전쟁에도 중요하게 사용된 것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며, 당시의 산성중 금돌성은 추풍령 방향의 교통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7세기 중반 태종무열왕이 금돌성에 행차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를 전후하여 대백제와의 군사적, 교통로상의 주요한 거점지에 설치된 전초기지였던 것으로 보아 역사·지리적으로 고구려·백제·신라의 세력이 서로 맞부딪친 곳에 있으며, 삼국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성이라 할 수 있다.

고려사 고종 41년조(1254년)의 기록에 따르면 몽고의 제5차 침입시 몽고 장수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에 실패하자 남하하여 상주산성(백화산성으로 추정)을 공격하였다. 몽고군의 공격에 상주의 민관이 합심하여 황령사의 승 홍지(洪之)의 용맹으로 관인을 비롯한 수많은 적병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하였다.


백화산은 동쪽으로 모동면, 서쪽으로는 모서면, 남쪽으로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이 위치한 도 및 면의 경계지점에 있다. 성곽이 위치한 백화산 정상 한성봉(포성봉)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 백화산 서쪽 능선으로 오르기 위해 반야교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약 2시간만에 주행봉(874m) 정상에 올랐다. 주행봉 정상에 오르기 전 능선으로 서쪽과 남쪽의 영동 황간일대를 관측할 수 있는 망루 역할을 한 것 같은 유구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능선은 자연 성벽을 이루고 부분적으로 거칠게 가공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행봉 정상은 제법 넓은 평지로 민묘 1기가 있으며, 동쪽의 금돌성으로 신호를 보낸 봉수대 흔적으로 추정해본다. 금돌성에서 부들재라는 안부까지 경사가 급한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금돌성이 위치한 한성봉이 훤히 보인다. 상주 모서면과 모동면을 잇는 부들재에서 다시 1시간 정도 정상을 따라 오르면 금돌성 외성 서쪽 망루에 해당되는 한성봉(포성봉) 정상에 다다른다. "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향토사 단체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백화산의 기와 산성을 사로잡는다" 라는 의미에서 한성봉(漢城峰)을 포성봉(捕城峰)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가 국권이 상실되고 강제병합의 암울한 시기는 맞지만 한성봉에서 포성봉으로의 개명에 대한 의견은 좀 과장이 아닌가 싶다. 한성봉 정상에서 봉화대와 반야교 주차장을 안내하는 이정표 부근에 금돌성의 서쪽 성벽이 희미하게 남아있는데 "산성을 포함하고 있는 봉우리"라는 의미에서 포성봉이라는 명칭이 생겨났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 황령사

상주시 은척면 칠봉산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신라시대인 638년(선덕왕 7) 의상이 창건했고, 889년(진성왕 3)에 대구화상이 중창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시대인 1254년(고종 41) 몽고의 장군 차라대(車羅大)가 상주성(백화산성)을 침공하자 황령사의 승려 홍지(洪之)가 관민병을 거느리고 나가서 적의 넷째 장수를 쏘아 죽였고, 적병의 사상자가 반수 이상이나 되자 적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 절이 고려 이전부터 존재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문화재 안내문>

삼국시대에 축성한 포곡식 산성이다. 성 안쪽으로는 군사들의 활동을 위해 돌로 회곽도를 만들고, 회곽도에서 약 1.5m 높이로 성벽을 쌓았다. 성은 보문곡을 가운데로 하여 산 정상인 한성봉을 한 변으로 하는 내성을, 그 동쪽으로 외성을 쌓았는데 총 길이는 7km 가량 된다. 보문곡으로 들어서기 전 계곡의 폭이 가장 졸은 곳에 차단성을 쌓았는데 길이가 약 600m가 확인된다. 이 성에는 660년 7월 김유신이 이끄는 백제 정벌군을 떠나보낸 신라의 무열왕(김춘추)이 총지휘소로 사용하면서 백제가 항복한 소식을 듣고 소부리성을 떠날 때까지 머물렀던 대궐 터가 있다. 또 1254년 10월 자랄타이가 이끄는 몽고 침략군을 맞은 상주의 백성들이 황령사 승려 홍지의 지휘로 한 달 여의 싸움 끝에 물리친 유서 깊은 성이다.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산98번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1호(1985년 8월 5일 지정)


 

단국대박물관 상주지구고적조사보고서 1969년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상주 금돌성 지표조사보고서 2001년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상주 백화산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 1998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백화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금돌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