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조선 삼도수군의 본영,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성(統營 三道水軍統制營城)('17.06.03 토)

필그림2 2017. 6. 11. 21:47

조선 삼도수군의 본영,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성(統營 三道水軍統制營城)



통제영은 1593(선조 16)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직제를 새로 만들어 전라좌수사에게 이를 겸임하게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삼도수군통제영’으로 통칭되며, 약칭은 ‘통영’이다. 임진왜란 당시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전라좌수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의 수군을 이끌고 경상남도 해안에서 일본수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여러 번 승리를 거두었다. 1593년 7월 23일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수군을 총괄하는 삼도 수군통제사를 겸직함으로써 그가 있던 여수의 전라좌수영이 1601년(선조 34)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으로 기능했다. 통영 한산도가 최초의 통제영이라는 견해도 있다. -필자 주-)


정유재란으로 한산 진영이 폐허가 되자, 통제영은 전세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고, 전란이 끝난 뒤에도 거제도 오아포(烏兒浦), 고성현 춘원포(春元浦) 등지로 옮겨 다니며 제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1603(선조 36) 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통제영을 두룡포(頭龍浦: 현 통영시 문화동)로 정한 이후, 이곳에다 터를 닦고 건물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605(선조 38) 음력 7 14일에는 여황산 남쪽 기슭에 객사인 세병관(洗兵館), 백화당, 정해정 등을 세웠다.


이후 1678(숙종 4) 57대 통제사 윤천뢰(尹天賚)가 영문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높이 1장 반( 4.6m), 둘레 1 1730( 3.6), 성가퀴 707개 규모의 평산성(平山城)을 쌓았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의 통영성에는 4대문(大門) 2암문(暗門) 그리고 3포루(鋪樓)가 있었고, 세병관을 위시하여 100여 개의 관아가 있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강점된 뒤 세병관을 제외한 대·소 관아 100여 동의 건물들이 모두 헐렸고, 그 자리에 학교, 법원, 검찰, 세무서 등이 들어섰다.

1975년 이후에 세병관 및 주변 지역을 정비하고, 1996년 지표 조사를 실시하여 유구를 확인하였다. 통제영 건물 중 현존하는 것은 국보 제305호(2002년 10월 14일 보물 제293호에서 승격) 세병관(洗兵館) 뿐이며, 1987년에 복원된 수항루(受降樓) 1동이 있다. 수항루를 지나 우측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2호인 두룡포 기사비(頭龍浦 記事碑)와 비각 건물이, 좌측에는 매표소 및 관리사 건물이 있다.


통제사 내아인 운주당(運籌堂), 경무당 지역에는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 건물이, 통제사 집무실이었던 백화당과 관아에서 사용하던 각종 물품을 납품한 공고(12공방, 선자방) 지역에는 통영초등학교가, 통제사 참모장의 군영인 중영 및 중영내아 등 지역에는 통영세무서가 있다.

그 밖에 파취헌, 분뇨정 등 지역에는 충렬여자중학교와 충렬여자상업고등학교가 각각 위치하고 있는 등 대부분의 지역에 공공건물이 들어섰고, 주변 일대는 일반 주택지가 되었다.


망궐례와 객사로 사용하던 세병관은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두릉포에서 통제영을 이 곳으로 옮긴 이듬해인 1604년(선조 37년) 완공한 조선 삼도수군 통제영 본영(三道水軍 統制營 本營)의 중심 건물이다. 이 건물은 창건 후 약 290년 동안 3도(慶想, 全羅, 忠淸) 수군을 총 지휘했던 곳으로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아직도 멀리 남해를 바라보며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7세기초에 건립된 목조단층 건물로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다.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조선 수군 본영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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