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삼국시대 대중국 교역항이자 남양만 방어의 요충지, 화성 화량진성(2011.6.12)

필그림2 2011. 6. 13. 13:33

삼국시대 대중국 교역항이자 서해 남양만 방어의 요충지, 화성 화량진성(花梁鎭城)(2011.6.12)

 

 

서해안과 접해있는 경기도 화성시에는 대략 20여개의 성곽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삼국시대 대당 교역의 중심지인 남양만일대의 삼국시대 성곽에서부터 조선 정조13년(1789년) 사도세자의 무덤이 화산으로 옮겨지고 화성이 축성되기 전까지 고려시대부터 수원부 치소가 있던 수원 고읍성(古邑城)등 여러시대에 걸쳐 축성한 성곽들이 남아있다.

남양만의 당항성(당성)과 함께 북쪽 3km 지점에서 마주하는 이곳 화량진(화량포)을 통하여 삼국시대 대당 교역과 사신왕래, 유학(學)등이 이루어졌다.

대중국 교역항이자 군사요충지로 당성(당항성)을 제일로 꼽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곳 화량진성도 상당한 임무와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포시 대야미를 지나는 47번 국도를 타고 안산부근 교차로에서 39번 국도로 갈아타 비봉에서 빠져 나와 비봉면소재지를 지나 313번 국도를 이용하여 마도면 소재지에서 다시 322번 국도를 타고 송산면 소재지를 지났다. 비교적 도로사정이 좋아 송산면 소재지까지 50분 정도 소요됐다.

송산면은 경기도의 대표적인 포도 생산지이다. 올해는 겨울 냉해로 포도나무가 얼어죽어 싹을 안틔우는 나무들이 많다고 하는데 다행히 이곳 송산면의 포도농장에는 큰 피해가 없었던지 짙푸른 포도송이를 주렁주렁 메달고 있었다.

마산포로 가기전 지화리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마을길을 따라 지화2리 경로당까지 들어갔다. 길을 해메다가 주민들에게 물어 화량진성이 위치한 부근까지 올 수 있었다. 지화리에서 탄도항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비포장 길이다. 와룡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야산까지 가서 멀리 탄도항이 보이는 포도농장 앞에 차를 세웠다. 미리 조사한 바로는 화량진성의 성곽을 찾기위해서는 외진 농장을 지나 약간 으시시하지만 길없는 산을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길도 없는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산 정상으로 무작정 올랐다. 고라니, 멧돼지나 다닐 법한 수풀 우거진 산길이었다. 겨우 숲을 헤치고 10여분 오르니 남북으로 평평한 정상에 도달했다. 축성흔적이 보였다. 화량진성의 서쪽 성벽이었다. 서쪽 성벽은 비교적 축성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구간도 있었으나 관리되지 않은 탓에 나무뿌리들이 이리저리 성벽을 파고들기도 하고 성벽을 가로막기도 하여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조금전 만난 주민의 말에 따르면 옛날 마을 사람들이 성벽을 뜯어 구들장과 담장으로 사용하기도 했었단다.

북쪽성벽으로는 잡목이 우거져 성곽 흔적조차 보기도 힘들어서 성곽을 종주한다는 것은 사실상 힘들어보여 남서쪽으로 뻗은 성벽을 따라 갔다. 이 길도 쉽지않은 곳이지만 겨우겨우 잡목을 헤집고 성곽의 윤곽을 관찰하고 사진을 남겼다.

 

 

 송산면(松山面) 지화2리(芝花2里) 와룡산((臥龍山) 정상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에 만들어진 야산에 위치한 화량진성(花梁鎭城)은 화량성,남경성,남경두토성,와룡산성,지화리산성등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이 지역의 역사적, 지리적 연관성에 기인한다. 화성관광안내도에는 남경성이라고 작게 기록하고 있다.

야산의 7~8부 능선을 따라 남쪽 평지를 사이로 동서 계곡부를 둘러 쌓은 석축, 토석혼축의 성곽이다.

지금은 야산과 평야로 변한 주변 풍광들이 예전에는 굽이굽이 반도(半島)와 만(灣) 또는 섬(島)이였으며 화량진성의 서쪽 앞바다는 고대로부터 이용된 마산수로가 형성되어 진영성(鎭營城)이 입지하기에 최적의 자연환경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이 성은 삼국시대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고 군진을 두어 토성인 남경성(남경두토성)을 처음 쌓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고려시대에 화량진을 설치하고 태종 13년(1413)에 남양도호부가 설치된 후 좌도수군첨절재사영(左道水軍僉節制使營)을 두어 그 아래 영종포,초지량,제물량 등 인근 서해북부를 관할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좌도수군첨절재사영(左道水軍僉節制使營)은 함선 26척, 수군 1,666명을 보유한 전체 경기도 수군 중에서 함선과 병력이 가장 큰 부대였었다. 이후 성종16년(1485)에는 수군첨절제사영이 수군만호(水軍萬戶)로 격하되었다가 선조8년(1575)에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으로 다시 격상되었다. 인조7년(1629)에는 청의 침략을 대비해 수군절도사영을 강화도 교동으로 옮긴 후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결국 폐성에 이르렀다.

화량진성 앞바다는 제부도,선유도,영흥도 등 크고 작은 섬이 일렬로 늘어서 있어 해앙방어선 구축과 섬과 섬사이를 통과한 수로가 좁아 적을 막기도 유리하고 왜구를 탐지하기도 용이하였다.

1942년 일제에 의하여 간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송산면 화량동 면사무소에서 남으로 약 1리 해안에 돌출하는 산맥에는 중형의 석루(石壘) 화량진성이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화량진성은 기록이 분명하고 오랜세월 서해안을 방어한 관방유적이지만 건너편 당성(사적217호)에 비해 푸대접을 받고 있다.

성곽이 위치한 지역이 대부분 사유지라서 발굴 및 지표조사가 어렵다고 한다. 화량진성은 역사적 가치가 크다. 일부 옛 성벽이 남아있는 구간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문화재청과 경기도 그리고 화성시 차원에서 문화재로 지정하거나 사유지 매입등 보존 대책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