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백제 부흥운동의 최후 거점 대흥 임존성(2011.5.27)

필그림2 2011. 5. 31. 01:45

 

백제 부흥운동의 최후 거점 대흥 임존성(2011.5.27)

(백제 부활을 꿈꾼 비운의 백제장수 흑치상지, 그는 조국의 배신자인가 위민주의자인가.)

 

 

임존성(任存城,사적제90호)이 있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大面) 작은 농촌 마을이지만 예사로운 동네가 아니다.

일제시대인 1929년에 착공하여 1964년 12월에 준공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예당저수지(禮唐貯水池)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한적한 소읍이지만 고려 명종 2년 감무(고려시대 중앙정부가 속군현(屬郡縣)에 파견한 지방관)를 두고 고려 후기에는 현재의 대흥,광시,신양,응봉 지역을 관할하는 대흥현이 되고 조선 초기 홍주목 소속에서 태종13년 다시 대흥현으로 변경되고 숙종때에는 대흥군으로 승격된 역사 깊은 고장이다.

이처럼 지리, 행정적으로 중요시 되었던 대흥면 주변에는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흔적들을 쉽게 찾을 수 있어 더욱 더 옛스럽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예산에서 대흥면 소재지로 들어오는 도로변에서 부터 이 마을을 오래전부터 수호해 온 석장승 할아버지가 따뜻하게 맞아주고 대흥향교와 예산지역 현존 유일의 관아 건물인 대흥동헌(정면6칸,측면 2칸)과 임성아문이 남아있고 대흥 중고등학교 정문앞에는 이 지역에 드나들던 관리들의 불망비등 대흥현과 관련된 여러 유적들이 있다.

고려시대 사람으로 효심과 우애가 아주 깊었다는 이성만(李成萬), 이순(李順) 형제의 실존 배경지이기도 하다. 대흥동헌 임성아문 앞에 이 형제를 기념해서 조선 연산군 3년(1497)에 세운 비석(禮山李成萬兄弟孝悌碑)이 세워져 있고 2002년에는 이 형제의 모습을 형상화한 "의좋은 형제"상을 건너편에 만들었다.

이 밖에도 마을 이곳저곳마다 눈에 띄는 고목들은 가히 이 지역의 역사성을 대변해주며 봉수산에서 바라다 보이는 예당저수지의 풍경은 가슴을 확트이게 하며 눈을 맑게 해준다.

 

임존성은 대흥면 소재지 서쪽에 위치한 봉수산(鳳首山,·484m) 정상 주변에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서기 600년 백제 멸망 직후 의자왕의 조카 복신(福信,또는 의자왕의 사촌 동생,?~663)과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630~689)와 3만여명의 백제군이 입성 항거하며 승려 도침(道琛,?~661)이 웅거한 주류성(周留城)과 함께 백제 부흥 운동을 전개한 곳으로 알려져있다. 초기에는 신라에 대항하여 200여 개성을 회복하는등 기세가 등등했지만 복신,도침 왕자풍 등이 부흥군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켜 나당연합군이 총공격해오자, 흑치상지는 당나라 고종(高宗)이 보낸 사신의 초유(招諭)로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하고 임존성을 공격하고 부여풍이 지키고 있는 성을 빼앗아 결국 백제 부흥운동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흑치상지는 백제유민을 데리고 당나라에 들어가 좌령군원외장군 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徉州刺史)를 지냈으며, 뒤이어 연연도대총관(燕然道大摠管)이 되어 이다조(李多祚) 등과 함께 돌궐(突厥)을 격파하는 등 여러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그러나 주흥(周興) 등에 의해 응양장군(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과 함께 반란을 꾀한다는 무고를 당하여 689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아들 유격장군(游擊將軍) 행난주광무진장(行蘭州廣武鎭將) 상주국(上柱國) 준(俊)의 노력으로 억울하게 뒤집어 쓴 누명이 풀렸고 당나라 황실의 도움으로 낙양의 북망산으로 이장되었고 그 뒤 7년뒤인 706년 흑치상지의 아들 준도 죽어 아버지와 같은 낙양 북망산에서 묻히게 되었다.

흑치상지묘지(黑齒常之墓誌)는 1929년 10월에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망산(邙山)에서 그의 아들 흑치준묘지와 함께 발견되어 현재 남경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흑치상지묘지의 발견으로 흑치상지의 일대기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그의 행적에 대하여 엇갈린 반응과 평가을 보이고 있다.

조국을 배반하고 적국에서 벼슬을하면서 위세를 떨친 배신자인가, 그렇지 않으면 망해가는 백제의 재기불능을 판단하고 투항하여 남은 유민들만이라도 지켜내고자했던 진정한 애민주의자 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풍전등화의 조국을 버리고 고뇌에 찬 결정을 한 비운의 장수라고 말하고 싶다.

이렇듯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자 흑치상지의 고뇌가 서린 임존성 답사길이 더욱 숙연해진다다.

 

임존성을 답사하기 위해 먼저 광시면 동산리 산11번지 임존성 아래에 있는 대련사(大蓮寺)에 도착했다.

백제 의자왕 16년(656년) 나·당연합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병들을 기리기 위해 의각,도참선사가 창건했다는 대련사는 비록 작은 절이지만 오랜 역사만큼이나 고풍적이고 수려하다. 수령 700년이 넘는다는 느티나무 세그루가 절을 둘러싸고 맞배 지붕형식의 극락전(殿)은 그 단순함에서 절정의 엄숙미를 보여준다. 이와 같이 맞배지붕 형식의 본전은 이웃의 덕산면 수덕사(修德寺), 서산의 문수사(文殊寺) 등 옛 백제 땅인 충남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대련사 옆 계곡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20여분 산을 오르면 임존성 남문으로 추정되는 문지가 나타나고 문지를 지나 왼쪽으로 허물어진 성벽을 따라 가다보면 수목사이로 봉수산 정상으로 기오올라가는 듯한 긴 성벽을 만난다.

임존성은 백제 사비 천도 후 수도 경비의 외곽기지 역할을 한 성으로 둘레가 2,426m의 북고남저의 테뫼식 산성으로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것으로 추측한다. 임존성은 대흥산성, 봉수산성으로도 불리운다.

구당서 동이백제조(舊唐書 東夷百濟條)에 660년 8월 任存(임존성)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부흥군은 군사도 많았고 大柵과 小柵을 만들어 나당군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임존산(任存山,봉수산)에 城이 축조되기 이전에 柵이 있었다고 여겨지며 백제부흥군은 660년 8월의 전투 이후에 비로소 任存山에 柵을 기반으로 石城을 쌓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2000년 충남발전연구원의 정밀지표조사때 수습된 유물 중에서 삼국시대로 소급될 만한 유물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통일신라 이후의 유물들만 나왔다고 하여 정확한 축성연대는 향후 정확한 발굴 조사를 통하여 알 수 있을 것 같다.

성벽의 높이는 북동쪽이 4.2m, 서쪽 성벽 높이는 2.6m이며, 석루(石壘)의 상부너비는 1.6m 정도이다.

서남쪽 500m의 성벽은 복원되어 수구문과 우물터 등이 정비 되었고 부분적으로 옛 성벽을 남겨두어 연구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산의 지형을 따라 축성하여 굴곡이 자연스럽다. 임존성 문화재 안내문이 설치된 우측에 '백제임존성청수(百濟任存城淸水)'라 새겨진 표지석과 옆에 우물이 있지만 현재 폐쇄되어 있다.

복원된 성벽을 따라 서쪽 성벽으로 오른다. 남서쪽에서 서쪽으로 회절하는 부분은 장대지로 추정되고 서쪽의 홍성방향과 남쪽의 청양이 훤히보인다. 서쪽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지만 다행히 부분적으로 축성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아직 5월 말이지만 갑작스런 더위로 녹음이 짙어져 성벽을 찾기가 힘들었다. 오후 5시 조금 늦은 시간에 산성으로 올랐기에 꼼꼼히 산성을 한바퀴 돌아보기에는 무리였다.

비록 완전한 성곽답사는 아니였지만 임존성과 관련된 백제부흥운동을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임존성 복원정비 계획도, 충남역사문화연구원 2005>

 

1500여년 전 쓰러져가는 조국을 구하고자 했던 백제 부흥군과 유민들의 물러설 수 없는 처절한 혈전의 장소이자 신라에 있어서는 통일전쟁을 위한 힘겨운 싸음터였던 임존성은 그 때의 슬픔을 아는지 애처로운 산새소리만 적막을 깨운채 예당저수지를 내려다보며 무겁게 돌아서는 나그네를 배웅한다.

서남쪽 복원구간으로 돌아와 남문지를 통하여 대련사로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