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한성백제의 왕성을 찾아서1...풍납토성(風納土城)(2011.6.20)

필그림2 2011. 6. 21. 22:49

한성백제의 왕성을 찾아서1...풍납토성(風納土城)(2011.6.20)

 

 

장마가 시작하려고 하는지 무척 습하고 더운 날씨가 며칠동안 계속 되고 있다.

오늘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풍납토성(風納土城) 발굴조사 일환으로 진행중인 풍납동 197번지 일대 (구)미래마을 부지 발굴조사 학술자문회의와 현장공개회가 있는 날이기도 하여 풍납토성 답사 겸 공개된 현장을 직접 보기위하여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풍납토성으로 갔다.

풍납토성이 위치하는 송파구 풍납동은 최근까지도 불리고 있다는 "바람드리"란 명칭이 한자로 표기된 것에서 유래하고 일제시대때부터 중요유적으로 분류되었다가 광복 후 1962년 성내부를 제외한 성벽 전체가 사적 11호로 지정되었다. 정식명칭은 일제시대때 부터 사용되어 온 <광주풍납리토성>인데 이곳 풍납동이 1963년 서울시 성동구(현재 송파구)로 편입되기전까지 광주군 구천면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은 한성백제시대(BC18~AD475)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즉 초기백제 도성의 왕성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이밖에도 풍납토성과 이웃해 있는 몽촌토성(夢村土城), 광주 춘궁동 고골과 이성산성(二聖山城) 일대, 천안 사산성(蛇山城)이 위치한 직산면, 북면 위례산성 일대가 초기 백제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곳인데 결정적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이나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써는 발굴성과가 가장 많은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으로써 가장 근접하다고 할 수 있겠다.

 

풍납토성은 일제시대인 1925년 7월 대홍수로 서벽이 유실되면서 성 내부에서 초두(鐎斗,청동제 자루가 있는 솥) 2기, 과대금구(銙帶金具) 등이 출토되면서 일본 학자들의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1934년 일본 학자 아유카 이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잡지 조선(朝鮮)에 <백재고도 안내기>라는 글을 기고 했는데 이 글에서 풍납토성을 백제 위례성(慰禮城)으로 보았다. 이후 1939년 진단학회(震檀學會) 이사장이던 이병도(李丙燾)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責稽王) 원년에 나오는 기사 중 아차산성(阿且山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했다는 내용에 근거하여 이 풍납토성을 백제 사성으로 비정하는 글을 진단학보 10호에 발표하여 앞서 아유카 이후사노신의 발표를 반박했다. 광복 이후 1964년 김원룡 교수가 이끌던 서울대 고고학과의 발굴실습과정으로 8개의 발굴 피트를 파고 조사한 결과 2개층의 백제문화층과 다수의 무문토기편등을 발굴하여 개로왕 21년(475년)에 고구려군이 남하하여 7일 동안 공격한 북성(北城)으로 보고하였다. 이후 이렇다할 조사나 발굴이 없다가 성내부는 주택가의 팽창으로 유적이 급속도로 파괴되었으며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경기장 건설에 따른 주변지역 조사의 일환으로 서울대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된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이란 설이 학계의 주류로 이어져왔다.

 

 

 

 

이후 1997년 선문대 이형구 교수팀이 풍납토성 성벽 실측 조사 중 성내부 현대리버빌아파트 재건축 공사현장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류가 포함된 유물층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신고함으로써 최초로 풍납토성 내부 발굴조사가 정식으로 이루어져 초기 백제 6각형집터 3기를 포함한 수혈유구,토기가마 1기,3중 환호 등을 발굴했다. 한편 위 발굴조사 구역 남쪽 다른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도 집터8기,수혈유구,3중의 환호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와 깊숙히 관련있는 유적임을 보여주었다. 1999년 동성벽 발굴조사에서 성벽이 폭 최소 43m,높이 최소 11m 달할 것으로 추정되어 강력한 절대권력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해주었다.

2002년 보고서에서 풍납토성은 기원후 2세기 초반에서 3세기 초반에 한차례 증개축이 있은 후 성벽이 완성되었다고 했다.

1999년에서 2000년에는 한신대박물관에 의해 경당연립건축예정부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대형건물터,전돌,와당,초대형 옹기,말뼈 추정 9마리 분량의 하악골,중국제도자기,오수전,중국 고위직 관료의 명칭인 (大夫)명 목짧은 항아리등 500상자 분량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예상외의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나와 추가발굴에 따른 비용 문제가 발생하자 재건축사업을 담당한 연립주택조합원들이 포크레인을 이용한 유구 파괴사건이 발생하여 경당연립부지 조사가 중단되었다가 2008년 2월 발굴이 재기되어 돌오 쌓은 기단 주변에 말머리뼈,전문도기,자기,기와 등이 출토되어 제사유적으로 추정했다.

2002년에서 2003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한 서성벽 추정 해자터 발굴에서 해자와 관련된 시설로 보이는 자갈층에서 백제 토기편과 조선시대 백자편이 수습되어 해자가 장기간에 걸쳐 존속했던 것으로 판단한 반면 일부 학자들은 자연제방이나 자연도랑의 흔적이라는 견해가 재기되기도 하였다.

2004년 동성벽 외곽 풍납동 410번지 일대 아파트 재건축 부지에서 한변 1.2m, 잔존높이 2.5m에 이르는 목재 짜맞춤(結構)식 "井"자형 백제 우물이 발견되어 성 외부에도 사람이 상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편 2003년 풍납동 197번지 구 미래마을부지 시굴조사에서도 말뼈 추정 하악골과 다량의 기와가 발견되었다. 그후 구 미래마을부지는 2004년부터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기와와 건물초석,토관,전돌 등이 발굴되기 시작하여 2006년에는 집터,수혈유구와 함께 남북과 동서가 교차하는 도로유적이 확인되기도 했다. 구 미래마을부지는 2만955㎡(6,350평)의 넓은 부지라서 순차적인 발굴이 필요했다. 2007년 "나"지구 상층에서 대형 수형주거지 등 69기의 유구와 2008년에는 "나'지구 하층과 "다"지구에서 육각형주거지 등 139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2009년 6차발굴에서 "라-3호" 주거지에서는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라-8호" 주거지에서는 20여점의 토제 기둥 장식품,전문(錢文)수막새,수막새 등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라-2호" 주거지는 방형(方形)주거지로써 장란형토기(長卵形土器)등 음식을 삶고 끓일 때 사용하는 자비용기(煮沸用器)가 사용되기 전인 硬質無文土器(풍납동식 무문토기)가 사용된 2세기 중.후반의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다-6호" 주거지에서는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와 낙랑계토기가 출토되었다. 그외 3~4세기 유물로 추정하는 중국제 청자조각이 출토되어 백제 초기 상당한 기간동안 활발한 대외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했다.

2010년 "라"지구 동편과 '마"지구 발굴조사에서 건물지 등 103기 유구를 확인하는 것으로 구 미래마을부지 발굴조사는 마우리 될 예정이었으나 "마"지구 추가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조사에서 "마-2호" 건물지는 적심시설의  "呂"또는"凸"자형으로 동서 단축 14.4m, 남북 장축 18m,출입구를 포함한 남북길이가 25m에 달하는 대형 주거지로 밝혀졌다. 한성백제 후기 양식의 주거지 1기에서는 심발형토기편,장란형토기편,와당편 등이 출토되었으며 그외 연화문수막새,수면문(동물얼굴모양)수막새,완형의 전문(錢文)수막새 등이 출토되어 풍납토성이 한성백제 왕성 터임을 더욱 뒷받침해 주었다.

풍납토성 성내 발굴은 이번 풍납동 197번지 구 미래마을부지 조사를 끝으로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들고 또 다른 발굴조사 구역인 남쪽 성벽과 인접한 동쪽 성벽부근을 절개하여 올 연말까지 자연제방이나 자연도랑의 흔적이라는 이견이 있는 해자(垓子)시설의 존재여부에 주력하고 있다. 

이제까지 풍납토성 조사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내년 2012년 올림픽공원 내에 개관될 한성백제박물관에 대부분 전시된다고 한다. 다시말하자면 내년에 완공되어 개관될 예정인 한성백제박물관은 풍납토성 발굴유물 전시를 위하여 건립된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풍납동 197번지 구 미래마을부지 "마"지구 추가발굴조사 출토 유물,2011.6>

 

<풍납동 197번지 구 미래마을부지,2011>

 <풍납동 197번지 구 미래마을부지 "라'지구 추가발굴 현장설명회,2011.6>

 

1997년 정식발굴 조사 이후 풍납토성이 사유재산보호와 개발,보존의 시비에 휘말리게 되어 정부와 주민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으며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형구(현 동양고고연구소 소장)의 노력으로 풍납토성과 석촌동 백재고분군 등 다수의 백제 유적이 현재 상태로나마 보존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오랜 기간동안 발굴에 참여한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신대박물관 조사단의 노고는 풍납토성의 역사적 중요성을 밝혀 주었다. 무엇보다도 한평생 또는 오랜세월 풍납토성내에 자리 잡았다는 이유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는 위로와 제대로 된 대책이 절실하다.

다시말해 성내에서 오랜세월 동안 거주히면서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주민들의 사유재산 보호와 권리를 정부는 최대한 존중하여 개발과 유적보호에 있어서 좋은 결실을 맺었으면 좋겠다.

 

 

<풍납토성은 광범위하게 장기간 동안 정밀학술조사가 진행된 곳이라 답사 및 유적 개관 정리가 매우 힘들었다.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 및 참고자료를 찾고 정리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어 전문가가 아닌 이상 부실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내가 처음 구상한 답사보고서 만큼 잘 쓸 수가 없었다. 천천히 더욱 내공을 키워 정리하고 수정해나가야겠다. 2011. 7.17일 정리 완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