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분산성, 옛 가락국의 흥망과 김해의 역사를 함께하다.(2011. 02. 20)

필그림2 2011. 2. 24. 19:16

 

분산성, 옛 가락국의 흥망과 김해의 역사를 함께하다.(2011. 02. 20)

 

 

김해시 중심부에 위치한 분성산(盆城山, 326.9m)은 김해 사람들이 사랑해 온 김해의 진산이다.

가락국의 옛 수도이자 우리나라 최대 성씨인 김해김씨(김해허씨 등)의 본관으로 낙동강 하류에 발달된 농업도시이자 공업도시인 김해는 부산의 배후 도시라는 기생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인구 50만을 넘어선 자족도시로서의 발전을 이어나가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을 배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삼국시대 고구려,신라,백제의 역사에 가려 그 실체를 밝히는데 소홀했던 가야연맹의 초기 맹주였던 금관가야(가락국)의 역사가 아직 곳곳에 남아있는 고대 유적 도시로써 구지봉, 김수로왕릉, 허황후릉, 대성동고분군, 구산동고분군, 봉황대유적 등 도심의 금관가야 관련 유적이 잘 보존되고 있다. 또한 분성산 정상에는 가야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도와 주변 지역을 관방하던 분산성이 잘 복원되어 있고 현재 동문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김해의 대표적인 산성이자 낙동강 하류와 김해지역을 관망할 수 있는 분산성을 찾았다.

 

김해 북쪽에서 뻗어내린 분성산은 낙동강하류와 남해가 만나는 충적평야까지 뻗어내린다. 분성산 동쪽으로는 가야 불교 설화가 깃들어 있고 기암절벽의 풍경이 뛰어난 신어산(神漁山, 634m)이 위치하고 서쪽으로는 김해시내를 관통하는 해반천(海畔川)과 분산성과 연관있을 여러 성곽유적이 있는 경운산(慶雲山,379m), 신어산과 더불어 가야 불교 설화가 전하는 불모산(佛母山, 801.7m)이 위치하고 있다. 김해는 이 세 산의 선상지와 남쪽의 낙동강 충적지대에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 분산성에 올라보면 위치적으로 그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분산성은 김해사람들에게 만장대(萬丈臺)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있다고 한다.

분산성 아래에는 금관가야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가야역사테마파크" 조성사업이 한창이고 한 부분에는 최근 드라마 사극 열풍에 가야사를 재조명하고자 기획하여 작년 방송한 역사드라마 "김수로" 세트장도 볼 수 있었다.

 

 

 

 

분산성은 행정구역상으로 김해시 어방동 산 9번지 분성산 남쪽 정상부에 위치하는 테뫼식 석축산성이고 남북으로 긴 타원형의 성곽으로 높이 약 2~10m, 폭 최대 8m, 길이 929m로 초축시기가 금관가야시대로 추측되어지고 조선후기까지 사용된 성곽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성내 충의각 비문(박공위축성사적비,흥선대원군만세불장비,부사통정대부 정현석영세불망비)에 따르면 고려 우왕 3년(1377년)에 김해부사 박위가 왜구를 막기 위해 축성한 뒤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던 것을 고종 8년(1871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김해부사 정현석이 개축하였다고 한다.

분산성은 동문,북문,서암문,남암문이 있으며 1998년 동아대박물관의 지표조사 이후 몇차례의 지표조사와 시굴 및 발굴조사에 의해 2000년 부터 서쪽 체성부와 서암문 주변, 동쪽 체성부 주변을 복원하였으며, 작년 12월부터 동문지 발굴조사를 통하여 동문지주변 복원 기초자료를 확보하였다.

동문지 추정부지에서 통일신라시대 체성외벽부, 고려후기 문지,  조선후기 문지가 확인되었으며 동문의 초축단계의 체성은 ‘바른층쌓기’와 석재간 빈틈을 잡석으로 채우는 등 삼국시대 산성축조수법을 잘 보여주고잇으며 이후 총 2차례 걸쳐서 수․개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여말선초의 문지는 암문(暗門)형식과 옹성(甕城)형식이 결합된 구조이며 이후 붕괴면을 정지하여 조선 후기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문지는 여말선초의 문지를 활용하여 내부로 이어지는 확석, 성문 측벽, 계단시설 등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체성의 축조양상과 출토유물로 보아 삼국통일기에 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참고자료:김해 분산성 동문지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자료/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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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까지 분상성 복원을 마무리한다는 것이 김해시의 계획이다.

그렇지만 복원 사업이 정확한 고증없이 이루어져 원래부터 체성이 없던 암벽구간에 성을 복원하였거나 규모면에서 원형을 잃어버린 구간도 있고, 옛 성돌을 활용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성돌을 이용한 점 등에서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봉수대도 원래의 자리에서 옮겨져 완전히 엉뚱한 현재의 위치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다행히 서암문 복원구간을 지나 비교적 옛 흔적이 잘 남아있는 서북쪽 체성구간은 복원하지 않고 남겨두었다. 동쪽 체성 복원구간 일부에서도 옛 성돌을 그대로 사용한 흔적을 볼 수 있었다. 현재 복원 예정인 동문지와 북문지, 남암문 주변 만큼은 좀 더 신중하게 고증하여 복원하거나 원형을 잘 활용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결코 복원만이 최고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최근 각 지자체들이 지역 관광상품화의 일원으로 성곽 복원사업을 경쟁하듯이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잘못된 복원은 역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안하느니 못하는 예산 낭비에 불과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성내에는 산성 축조에 공이 있는 인물들의 행적이 담겨있는 4개의 비석이 충의각이라는 비각 안에 있으며 가야건국(서기42년, 삼국유사 가락국기) 6년 후 인도 아유타국에서 허황옥과 오빠 장유화상(허보옥)이 돌배에 불경과 파사석탑을 싣고 바다를 건너 가야국에 도착하여 긴 항해기간 동안 풍랑과 역경을 막아 준 바다 용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지었다는 해은사(海恩寺), 1999년 이전 복원한 봉화대, 흥선대원군의 "萬丈臺" 친필 각자 등이 있다.

특히 불교의 한반도 전래에 있어서 정설로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중국 진나라 순도와 아도가 전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앞의 해은사 역사를 볼 때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과 장유화상이 불경과 파사석탑을 금관가야에 전래된 해가 48년이라하여 정설보다 324년 앞서 불교가 인도에서 직접 전래되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이런 설화와 주장은 완전히 허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더 발굴될 자료와 연구를 통하여 규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

 

 

 

 

비록 상당부분 옛 모습을 잃고 복원된 성벽이지만 건축학적으로 완벽하고, 웅장하고, 장쾌한 성곽을 한바퀴 돌아보고 성벽의 한 귀퉁이에 서서 멀리 구 김해만과 김해시내를 바라보며 가락국 건국이래 조선후기까지 활용되어온 분산성의 오랜 역사성과 남해안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이곳에서 그 역할을 담당했던 장수들과 이름모를 병사와 민중들의 땀과 애환을 생각하니 저절로 가슴속이 숙연해진다.

 

 

- 김해에는 내 큰누님이 살고 계신다. 이번에 누나 셋째딸(조카) 결혼식에 내려가 시간을 활용해 김해의 몇몇 유적지와 봉하마을을 답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