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영남 제1의 전략적 성곽 칠곡 가산산성(2011.01.23)-진남루~가산바위 구간

필그림2 2011. 1. 25. 18:50

 

영남 제1의 전략적 성곽 칠곡 가산산성(2011.01.23)

-진남루~가산바위 3.5km 구간-

 

 

날씨가 몹시 춥다.

가산산성을 한번 답사하고 싶었지만 계획적으로 답사하기가 여간 쉬운 곳이 아니다. 경북 칠곡군 왜관을 지나 가산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동명면과 가산면으로 가는 길이 쉽지 않고 성곽의 규모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한번에 답사하기란 정말로 쉽지가 않았다.

다행히 대구 친구들과 모임을 하기로 하였기에 산행으로 가산산성을 함께 오를 수 있었다.

팔공산도립공원 북쪽에 위치한 가산산성은  치키봉(756.8m),가산(901.6m),가산바위(855m) 등 험하고 높은 산과 바위를 연결하여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약 80년에 걸쳐 내성,중성,외성의 3중 성곽으로 축성한 경북 제일의 성곽이다. 또한 인근의 유학산(839m),다부동 등과 함께 6.25 때 낙동강 전선의 치열한 격전지였었다.

 

조선 인조17년(1639년) 경상도 관찰사(경상감사)로 임명받은 이명웅(李命雄,1590~1642)이 도임하기 전 왕에게 부임인사(사조,辭朝)를 올릴 때 경상도 내 60주 고을의 산성 중에 믿을 만한 곳은 진주,금오,천생의 3개 성밖에 없으므로 금년에 풍년이 들면 적당한 곳에 축성할 것을 상주(上奏) 한 바 왕으로 부터 축성에 적당한 곳을 잘 살펴서 보고하라는 하명을 받고 경상감영으로 도임하였다. 그리하여 인조17년(1639년) 4월에 경상감사로 도임한 이명웅은  팔거현 가산의 지리가 편리함을 조정에 알리고 그 해 9월부터 인근 고을의 10만여명의 남정을 징발하여 성을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 4월 내성을 준공하여 산성 내에 칠곡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막대한 인력의 징발과 자금 소요, 험하고 어려운 공사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는 등 민심이 동요되어 더 이상의 공사가 진행되지 못하고  이명웅이 탄핵까지  논의 되기도 하다가 인조18년(1640년) 7월 타직으로 전출되었다.

 그후 새로 부임한 경상감사 임담(林墰,1596~1652)이 가산산성을 둘러보고 전임 이명웅 감사의 방략이 매우 훌륭하였음을 장계로 올리고 성을 쌓은 여러 장사들에게 모두 벼슬과 상을 추증할 것을 청하였다. 인조26년(1741년) 경상감사 이만(李曼,1605~1652)과 칠곡도호부사 이지형(李枝馨,1608~?)에 의해 내성이 중수되었다.

내성은 성벽둘레 4,710보로 여장 1,887첩, 동,서,북 3개문, 암문 3개소, 저수지 9개소, 우물 2개소, 포루 4개소, 보루 5개소, 창고 7개소, 빙고 1개소, 군기고 1개소, 사찰 4개소, 장대인 진남대(鎭南臺), 무은당(霧隱堂) 등을 설치하였다.

 

외성은 숙종26년(1700년) 관찰사 이세재(李世載,1648~1706)의 장문에 의하여 축성되었다. 이세재는 숙종24년(1698년) 11월에 경상감사로 도임하여 왜관수리(倭館修理) 및 전정(田政)에 관한 사무 그리고 가산산성 증축과 같은 임무 때문에 임기가 만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숙종27년(1701년) 2월까지 연임하였다.

외성의 둘레는 3,754보로 여장 1,890첩, 문루 1개소, 북,동,남 암문 3개소, 군기고 2개소, 창고 1개소, 장적고 등을 설치하였다.

 

중성은 영조17년(1714년) 관찰사 정익하(鄭益河)의 장문(狀聞)에 의하여 축성하였다.

중성의 길이는 602보, 여장 402첩, 문루 1개소, 별장이 기거하는 위려각(衛藜閣)과 객사인 인화관(人和館)을 설치하였다.

 

가산산성이 위치한 이 지역은 동래-밀양-대구-상주-충주-한양을 잇는 요충지로서 임진왜란때 명군 5천여명이 진주하였으며 선조26년(1593년)에 경상감영을 설치하여 선조29년 달성(대구)으로 감영을 옮기기 전까지 도정을 관장하였다. 그 후 인조18년(1640년) 가산산성(내성)을 축조하고 그해 5월 경산부(星州)에 속했던 팔거현이 칠곡도호부로 승격되면서 가산산성 내에 치소를 두고 군위,의흥,신녕,하양의 4현을 관장하고 이후 180년간  행정과 군사적 업무를 담당하였다.

순조12년(1812년)에는 가산산성 내에 지방의 관방시설을 관장하는  별장(종9품)을 두고 가산진을 설치하였다.

칠곡도호부는 관아가 험준한 산정에 위치하여 부민들이 불편함을 호소하자 순조19년(1819년) 왕명에 의하여 평지인 팔구지(현 칠곡초등학교)로 치소를 옮기고  가산산성의 수비는 오직 가산진 별장만이 담당하게 되었다.

 

1954년 7월26일(음 6월27일)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잔남루 성벽과 수구가 붕괴되어 주변 마을이 매몰되어 많은 사망자와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3년에 걸쳐 진남문 주변의 문루와 성벽,수구,여장 185m, 중문 등을 복원 및 중수 하였으며 1992년 중문을 다시 보수하고 1999년 진남문 여장, 동문 해체보수, 동문 성곽 99.5m를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최근(2011. 3) "가산산성에 대한 성곽 실측조사 및 종합정비계획 수립 용역"을 발주하여 가산산성 정비의 객관성 및 실효성을 확보하고 사적의 체계적 보수 및 정비 그리고 역사문화공간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