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남한강 상류의 성곽 3 - 영월 대야리산성(2011.9.1)

필그림2 2011. 9. 2. 16:56

남한강 상류의 성곽 3 - 영월 대야리산성(大野里山城)(2011.9.1)

- 남한강,옥동천 합수에서 영월,단양(영춘),봉화(춘양) 방향을 관방하다 -

 

 

 <대야리산성 북쪽 성벽 내측>

 

오늘 영월지역 기온은 34도를 예보했다.

오전 8시경 대야리산성을 찾았다.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본격적으로 대기가 데워지기 시작했다.

영월읍에서 88번 국도로 타고 앞서 찾아갔던 정양산성을 지나 태화산성이 있는 영월읍 팔괴리도 지나고 영월 남부지역인 김삿갓면(옛 하동면) 대야리를 찾았다. 미리 조사해간 대야리산성 자료에는 고씨동굴을 지나 단양과 봉화로 갈라지는 지점인 대야리(가재골) 남한강변 바위산 위에 위치해있다.

88번 국도변 대략적인 위치에서 매점 주인께 대야리산성의 위치를 물어보니 산성이 있는지 모른다고 하셨다.

(산성에 올라 확인해보니 매점 뒤 옥동천 바위산 정상부가 산성이 있는 곳이었다)

매점 옆으로 남한강의 강을 가로지르는 (수위가 높아질 땐 잠길 것 같은) 낮은 다리를 지나 절벽아래로 아슬아슬하게 연결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협곡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협곡을 한참 들어 가니 몇채의 민가들이 낮아진 계곡 옆으로 두어채 보였고 조금 더 올라가니 꽤 넓은 마당을 하고있는 민박과 식당을 겸한 민가에 다다랐다. 거친 시멘트 포장길은 여기에서도 끝나지 않고 굽은 계곡을 따라 계속 나있었다.

"구구새 민박 식당"  이름이 참 예쁘다. "구구새"가 무얼까 생각했다. 아마도 비둘기나 산비둘기를 말하지 않을까 싶다. 심심산골의 느낌을 더 해준다.

민박집에 인기척이 있어 산성의 위치를 물으니 마음씨 좋아보이는 주인 할머니께서 안내를 잘 해주셨다.

생각보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힘들지 않았다. 오솔길도 잡초가 잘 제거 되어있었다. 오솔길을 지나 제법 거친 바위길을 따라 산정상으로 계속 올랐다.

거의 정상부에 희미하게 얇은 판석을 쌓은 성벽의 흔적이 보였다.

건물지인지 성벽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지만 전체적인 성곽의 윤곽을 봤을 땐 바위가 많은 지형위에 쌓은 남쪽 성벽의 일부로 판단되었다.

아직 비지정 문화재이지만 산 정상부와 잔존 성곽 주변으로 간벌을 하여 성곽보호와 등산객들의 주변 조망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남쪽 잔존 성벽>

 

대야리산성은 테뫼식 산성으로 남북이 긴 타원형이고 북쪽 성벽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며, 장대지로 추정되는 북쪽 성벽 위 건물지에서 옥동천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주변 조망이 대야리산성의 군사적 중요성을 말해준다. 북쪽 정면으로 태화산이 마주하고 정양산성에서 내려오는 남한강 물줄기와 좌측으로 단양 영춘으로 연결된 길, 우측으로 옥동천과 봉화 춘양으로 가는 길이 잘 조망되어 현재의 국도가 삼국시대에 이미 만들어진 길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남한강을 따라 대야리산성 북쪽으로는 태화산성과 정양산성이, 남쪽으로는 온달산성이 위치해 있다.

단양 영춘면의 온달산성은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1년(590년) 고구려 장수 온달이 신라에 빼았긴 한강(한수) 이북 계립현과 죽령 서쪽 땅을 회복하고자 출정하였다가 전사했다는 아단성(阿旦城)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그 아단성의 위치에 있어서 오늘날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阿且山城)인가, 단양의 온달산성인가는 아직도 학계에서 해결되지 않고 있지만 단양 영춘면 곳곳에 얽힌 온달관련 전설과 삼국시대 유적을 보면 단양 온달산성이 아단성에더 가깝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대야리 산성 동쪽 대야리 평야와 봉화가는 길>

 

이곳 가재골(可在谷)의 지명은 조선 후기 사회가 혼란해지자 정감록에 심취한 박씨(朴氏)성을 가진 평안도 사람들이 십승지(十勝地)를 찾다가 이곳에 이주하여 터를 잡고 살면서 풍수적으로 "가히 살아 남을 만한 곳이다" 라는 의미에서 가재골(可在谷) 또는 가재동(可在洞) 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대야리산성 동쪽 옥동천을 따라  "큰 들녁이 형성되어 있다"하여 대야리(大野里)라는 마을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대야리의 넓은 들녘>

 

대야리산성의 둘레는 약 400 m 정도이며 서쪽,남쪽,북쪽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있으며 북동쪽 성벽 약 30m 정도가 잘 남아있고 경사가 급한 부분이라 내외협축과 계단식 축성법을 사용하였다. 높이는 3.5m정도 이다. 나머지 잔존 성벽은 내탁을 하였으며, 서쪽 잔존 성벽은 높이 5m로 높고 견고하게 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건물지로는 서쪽 잔존 성벽 위 고묘(古墓)가 있는 평탄지와 정상부 기단 흔적이 있는 3개소, 북쪽 성벽의 장대지로 추정되는 석축기단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지형이 가장 낮은 동쪽은 숲이 우거져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려웠지만 거의 축성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주요 출입구로는 산성으로 들어오는 남쪽과 대야리 본동에서 올라오는 동쪽, 북쪽에서 서쪽으로 회절하는 부분 등 3곳으로 추정된다.

성내 7~8m 너비의 내환도가 있다고 했는데 확인할 수가 없었다. 성내에서 회백색의 연질 기와편과 적갈색 연질 토기편과 회청색 경질 토기편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성내 곳곳에 투석전 용으로 사용되었을 주먹만한 강돌에서부터 사람 머리보다 큰 강돌이 흩어져있다.

산성의 지리적 위치와 축성 형태로 봐서 정양산성과 온달산성 등 주변의 삼국시대 산성과 같은 시기의 산성이라고 볼 수 있다.

 

<내외협축의 북동쪽 성벽>

 

주변의 대표적인 산성인 온달산성은 사적 제264호로 지정되어 특히 복원이 잘 된 성곽문화재의 예를 보여주고 있고, 정양산성도 사적 제446호로 지정되고 현재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중에 있다. 현재 비지정 문화재인 대야리산성도 머지않아 주변의 산성들 처럼 훌륭한 명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잘 관리하여 엣 모습을 잘 간직한 아름다운 성곽으로 보존되길 바란다. 복원을 하더라도 제대로 복원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복원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남한강과 손에 잡힐 듯 한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 쉽게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몇시간째 아무도 없는(어쩌면 오늘은 내가 처음이자 이 산성의 마지막 방문객일 수도 있다) 적요한 고성(古成)에서 나름의 행복과 여유를 즐긴다.

풀벌레 소리와 땀을 식혀주는 바람이 유일한 길동무이다. 내려가는 길이 못내 아쉽다.

누구에게나 쉽게 말하고 싶지 않은 풍경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싶다.

구구새민박집으로 내려와 친절하게 길안내를 해주신 주인 할머니께 인사라도 드릴까하니 안보이신다.

민박집 옆 계곡에서 세수 한번하고 조용히 가재골을 나왔다.

 

<단양 영춘 방면>

 

<서쪽 잔존 성벽>

 

<제일 높은 서쪽 잔존 성벽>

<북서쪽 잔존 성벽>

<북쪽 잔존 성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