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안산읍성 옛터에서(2011.8.24)

필그림2 2011. 8. 27. 23:41

안산읍성 옛터에서 오는 가을을 느끼다(2011.8.24)

 

 

 

 

많은 비가 내리던 8월 오랜만에 날씨가 좋아 수리산(修理山) 산행을 했다.

가을이 급하게 찾아 온 것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청명해서 요 며칠 날씨와 큰 차이를 보여줬다.

내가 사는 군포시 산본동에서 관모봉(冠帽峰,426.2m),태을봉(太乙峰,489m),슬기봉(슬기봉,451.5m),수암봉(秀岩峰,395m) 등 수리산의 대표적인 봉우리를 지나 안산시의 옛 읍치였던 수암동으로 내려와 안산읍성과 그 객사 및 관아터에서 휴식을 취하고 주변을 구경하고 버스를 타고 전철4호선 중앙역에서 산본역으로 돌아왔다. 8km의 산행이었다.

수리산 관모봉에서는 남쪽으로 군포시 전경과 수원과 화성, 멀리 독산성도 가물거리고 동쪽으로는 서울외곽순환도로를 사이로 안양시,의왕시가 보이고 모락산성과 더 멀리 용인의 석성산성의 위치도 짐작되어진다.

북쪽으로 안양 구도심과 관악산이, 더 멀리 서울 구로구와 금천구,광명시,KTX광명역사 등이 잘 조망된다. 수암봉 서쪽으로 시흥의 넓은 들녘과 금빛 낙조의 서해와 연관으로 더 아련한 인천 송도신도시의 높은 빌딩들사이로 문학산성도 어렵풋이 보일 것 같기도 한다.

수암봉 아래에는 아늑하고 유서깊은 안산의 옛 읍치(관아)가 있었던 수암동이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다.

 

 

<황화코스모스 만발한 안산읍성에서 바라 본 수리산 수암봉>

 

조선시대 안산 관아는 처음에 목내동 성내마을 일대에 있다가 조선 세종23(1441현재 관아지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 약 50m 지점의 읍성 내로 옮겼다가 조선 현종10(1669)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으로 안산군이 시흥군에 흡수,통합되면서 1922년경 건물을 신축하여 1965년까지 수암면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그후 건물이 거의 붕괴되자 1972 10월경 헐렸는데 목재의 일부는 안산초등학교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복원된 객사 건물과 옛 건물지 흔적>

 

읍성의 길이는 동벽 180.6m, 서벽 174.7m, 남벽 197.5m, 북벽 219.4m 로 전체 772.2m 이다.

성 내부의 면적은 대략 36,000m²(12,000) 정도이고 산성과 평지성의 절충형식인 평산성이다.

주요 방어 지역으로 여겨지는 서쪽과 북쪽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바깥쪽이 매우 가파르며, 몇 개의 높은 단을 이루고 있다. 성벽은 자연 능선에 덧붙여 쌓았으며, 평지인 남쪽은 돌을 쌓기도 하였다.

현재 문지(門址)로 추정되는 곳은 북문지·동문지·남문지 등 3곳이 있으며, 그 중 남문은 이 읍성의 주된 통로로 추측되는데 주택지가 형성되어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동문지는 사실상 좀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현재 객사로 통하는 지점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 가장 잘 남아 있는 것이 북문지이다. 북문지는 성 안쪽에서 소금절이골로 넘어가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곳은 성벽이 절단되어 단면이 노출되어 있으며 약 40도 정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V자형으로 된 문지의 상부 간격은 9m 정도이며, 가장 낮은 곳에서 윗부분까지의 높이는 3m 정도이다북문지의 평면 형태는 토성에서 많이 보이는 개방형식이고 성문에는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관아의 정문인 평근루(平近樓)와 객사,동헌 등의 행정시설, 그리고 옥사(獄舍)와 창고가 있었다고 하지만 건물초석들과 수암동사무소로 쓰였을 당시의 옛 돌 부재를 이용한 콘크리트 묻은 축대 흔적 그리고 수백년은 됨직한 은행나무 3그루가 성,내외에 남아 안산읍성의 영화를 이야기 해 줄뿐이다.

  

<복원 후 주민들의 휴식처가 된 안산객사>

 

<안산객사 정면>

 

1990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를 통해 채집된 유물 중에서도 고려 시대 후기의 기와편들이 상당량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문헌자료와 유물을 통해서 볼 때 이 성은 최소한 조선 초기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1999년 수원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해 관아지의 창건 당시 규모를 추정하고 읍성의 추정 남벽기저부를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2007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이 전면재토(땅을 완전히 파내는 방법)를 통하여 읍성 남벽이라고 알려진 곳이 성벽으로써 너무 조잡하고 허술하며 기존 북벽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으며, 수암면사무소 자리도 기존 조선시대 관아터에 1922년도에 증축했다는 사실과 다르게 재토한 터에서 박석시설이 발견돼 이곳이 관아터라는 기존 추정사실이 타당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도 했었다.

그러나 안산시는 2010년 안산객사(客舍)를 우선적으로 복원하여 이곳이 안산읍성과 관아지라는 것을 확정지은 듯 하다.

 

 

<안산읍성 남문지 앞 풍경>

 

정조의 화성 능행길에 이곳 안산객사(안산행궁)에서 하루를 묵었다는 기록이 정조실록에 남아있다.

정조는 재위 24년 동안 모두 66번의 능행차를 했는데 재위 13년(1789년)에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 영우원(永祐園)에서 화성 현륭원(顯隆園)으로 이장을 하였다. 그 이후 재위 24년까지 모두 13회에 걸쳐 현륭원(융릉,隆陵) 원행을 정기적으로 거행하였다.

정조실록에는 안산을 찾았던 1797년의 원행의 어가가 그동안 왕래하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여 이동하였는데 "동대문을 나와서 관왕묘에 잠시 참례하고배다리(舟橋)로 한강을 건너 양천(陽川)을 거쳐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능인 장릉(章陵)을 봉심(奉審)하고 부평행궁(富平行宮)에서 잠시 쉰 후, 안산행궁(安山行宮)에 이르니 때는 이미 밤이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임금이 행궁에 행차하면 과거 별시가 치루어졌는데 이곳에서도 인근의 남양부를 포함하여 과천,시흥 등 인근 10여개 고을에서  모인 선비들이 정조가 친히 내린 시(),(),()의 세 부문으로 나누어진 별시를 시행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