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6세기 남한강으로 진출한 신라의 전초기지, 단양 적성(赤城)(2011.4.10)

필그림2 2011. 4. 22. 23:22

사적 265호로 지정된 적성((赤城)은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의 중앙고속도로 상행선(춘천방향) 단양휴게소 바로 뒤 성재산(324m) 또는 성산의 정상부에 위치한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단양휴게소가 생기기 전에는 단양향교와 수몰기념관에서 30여분 걸어 올라온 인적이 드문 한가한 유적지로 기억되지만 중앙고속도로 단양휴게소가 생긴 후 휴게소를 들리는 고속도로 통행자들이 즐겨 찾는 유적지가 되었다.

신라 아달라왕(158년)이 죽령길을 개통한 후 진흥왕(재위540년~576년) 때에 원래 고구려 땅이였던 이곳 적성현을 빼앗아 성을 개축하였다.

적성은 북쪽으로는 남한강,서쪽으로는 단양천,동쪽으로는 죽령천이 흐르고 있으며 남한강의 상류 영춘,영월 방면으로 통하는 길과 동남쪽 및 서남쪽의 벌령(伐嶺) 방면의 길이 한눈에 들어오는 사통팔달의 위치에 있어 남한강 유역을 차지하려던 삼국의 각충장이자 신라가 장악한 진흥왕시기(545~551년) 최전방 전략적 요새이다.

체성 북벽은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전체적인 성곽의 지형은 북쪽과 서쪽이 높고 남쪽과 동쪽이 낮으며 동,서가 긴 타원형이다. 축성형태는 북동쪽은 내외협축이고 나머지부분은 내탁을 하였다. 북쪽에서 서쪽이 지리적으로 가파르고 높은 곳에 위치하여 축성은 비교적 1~2m의 낮은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서쪽 정상부에는 삼년산성에서 보이는 옹성형태의 치성 흔적이 보인다. 인근의 영춘 온달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축성된 성곽으로 추정한다.

성내에서는 백제와 신라 계통의 토기편, 고려조의 청자편과 와편이 발견되어 삼국시대 초축되어 삼국이 각각 활용하다가 마지막으로 신라가 차지하여 고려시대까지 이용되었음을 집작할 수 있다.

 

 

적성비는 1978년 단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온달과 관련된 유적지를 찾는 도중 단양군 하방리 성재산 정상부근인 적성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 비가 위치한 단양지방은 남한강 상류, 죽령 이북에 위치하여 삼국간에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서 주목되었던 곳으로 진흥왕때에는 이미 신라의 영역에 속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진흥왕이 이사부, 무력등 고구려로 부터 10군을 탈취하는데, 활약한 10명의 고관에게 명하여 적성사람인 야이차의 공로를 포상하고 앞으로도 야이차와 같이 신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포상을 내리도록 하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