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봉화 청량산12봉이 품고있는 청량산성(淸凉山城) (2010.12.03)

필그림2 2010. 12. 7. 19:20

경북 내륙 봉화 청량산 12봉의 장쾌한 풍광과 함께한 청량산성(淸凉山城)(2010.12.03)

- 1367년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했던 산성 -

 

 

새벽에 황사를 동반한 비가 지나가서인지 쾌청한 하늘이지만 매마른 바람이 부는 몹시 추운 날씨였다.

처가에 내려간 김에 오늘 혼자 경북 봉화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청량산의 청량산성을 답사하고자 오전 9시 조금 넘어 집을 나섰다.

청송군 진보면 월전리 월전삼거리에서 영양읍내를 통과해 태백 방면으로 가다가 다시 봉화 방향으로 향했다.

 

처가인 진보면을 잠깐 소개해본다.

청송군 진보면은 영덕,영양,안동으로 통하는 이 지역 교통의 요지이다. 삼국시대 이래 경주의 선진문화가 동해안을 따라 영덕을 지나 이 길을 통해 경북북부 지역으로 전파된 한 루트라고 추측할 수 있다. 진보면의 시량리,신촌리에 걸쳐 수십기의 통일신라 전후기 고분들이 남아있는 것으로 볼 때  고고학적으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고분 주변에서 발견되는 토기편들을 인근의 안동,예천,상주,문경 지역에서 출토되는 것들과 비교해 볼 때 그 문화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진보면은 지리적 장점으로 영덕,울진 등지의 풍부한 해산물과 안동과 영양,영덕 등 인근 지역 농산물들이 집결하는 진보장이 서는 곳으로 김주영의 자전적 소설 "객주"의 무대이기도 하다. 또한 진보면 월전리는 작가 김주영의 고향이기도 하고, 신촌리 옛 신촌초등학교에는 옛 교정을 리모델링해서 청송 출신의 원로 한국화가 야송 이원좌 화백의 작품을 기증받아 설립한 군립야송미술관이 운영되고 있다. 현재에도 진보면은 청송군의 행정적 중심지인 청송읍보다 사실상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이자 지역간 교역의 중심지이다.

 

<청송군 진보면 신촌리 풍경>

 

영양읍을 지나 일월면에 들어서면 조지훈 시인의 고향인 아늑한 주실마을과 경북 북부의 대표적 명산인 일월산이 조망된다. 영양군 일월면은 봉화군 재산면과 연결되는데 군경계 도로 갈림길에서 재산면 방향을 버리고 청량산도립공원과 안동 도산 방향 길을 택했다. 인근의 안동에서 구재역이 발생하여 가는 길목마다 방역이 한창이였다.

처음오는 길이라 청량산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청량산도립공원행 길이 공사로 인해 통재되고 있었다. 다시 재산면 방향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안동 도산 방향으로 전진했다. 구불거리고 한적한 국도 주변의 시골풍경들이 정겨워 보였지만 서둘러 청량산을 찾아 가는 나에게 이번 만큼은 그 풍광들이 가슴깊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안동댐이 낙동강의 물길을 넓혀놓아 길이 끊어지는 곳도 있어 청량산으로 가는 길은 많이 우회할 수 밖에 없었다. 안동 도산면에서 잘못 들어간 길을 따라 몇채의 특징적인 고택들도 구경할 수 있었지만 안동호로 끊어진 도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청량산으로 가야할 길은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최근 구제역 발생지인 와룡면에서는 방역이 한창이였고, 안동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역에서 옮겨온 고택들을 이주시켜 복원한(한번쯤 와보고 싶은) 오천 군자마을을 지나 도산서원도 지나고 농암종택을 지나니 청량산을 알리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청송 진보에서 출발하여 거의 3시간을 둘러온 길인지라 청량산 입구를 보니 반갑기도 하지만 온몸의 힘이 풀려 버린다.

 

<경북 북부지역의 명산 일월산 전경>

 

청량산(870m) 입구에서 부터 기암절벽의 협곡을 따라 산성을 찾으러 들어간다.

칼바람이 이 협곡을 통하면서 더욱 세차게 몰아쳐 온몸이 얼얼했지만 상쾌함 만큼은 최고라 할 수 있었다.

군데군데 설치된 등산안내도를 참고해서 포장도로가 끊나는 지점이 산성주차장이고 이곳의 이정표를 따라 오후 12시30분경 산행을 시작했다. 청량산의 암봉과 청량사가 마주보이는 방향이었다. 스산한 겨울 날씨이지만 호젓한 오솔길이었다. 10여분간 오솔길을 따라 오르니 좁은 협곡의 지형이 나오는데 이곳이 청량산성의 동문터이다. 산길을 따라 약 30여m 정도 내성의 흔적을 복원해 놓았고, 외성은 이 동문지에서 산능선을 따라 밀성대와 축융봉을 지나 다시 계곡 능선을 따라 오마도봉(853m)을 연결한

 6km가 넘는 포곡식산성으로 석축, 자연암벽, 토석혼축, 토축 등 지형에 따라 다양한 축성방법을 이용한 산성이다.

고려 공민왕이 1367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몽진 온 후 "공민왕산성(恭愍王山城)"이라 하기도 한다. 성내에는 이곳 마을주민들이 공민왕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겨 사당을 건립하여 2006년 복원된 "공민왕당"이라는 사당이 있다.

 

2003년 동문지에서 밀성대까지 330m가 시굴조사 후 복원이 되었고, 2006년 밀성대에서 축융봉까지 시굴조사 후 1.7km가 복원되었다. 산이 높고 험하여 암벽과 봉우리등 자연지형을 이용한 구간도 있고 높이 2m 내외 협축식 석성 구간도 잘 정비 되어 있었다.

동문지에서 축융봉까지 대부분의 성은 복원되었으며 석재는 청량산 주변에서 주로 보이는 응회암(콘크리트에 잔돌을 섞어 굳힌 듯한 돌)종류이다. 돌의 상태를 봐서는 청량산성 복원에도 옛 성돌을 활용한 부분은 거의 없어 보인다. 밀성대에서 바라보이는 청량산 암봉들과 그 아래 명호면과 재산면을 연결하는 협곡의 좁은길이 시원스럽게 전망된다. 밀성대 주변에서는 옹성의 특징도 보이고 성곽의 굽은 곡선미가 햇살에 더 아름답다. 밀성대에서 더 두텁게 쌓아 올린 성벽은 서서히 가팔라지면서 축융봉으로 향한다. 산성의 북쪽인 이곳에서 청량산의 여러 봉우리와 함께 기암절벽 아래 좁은 평지에 조성한 청량사가 한눈에 펼쳐보인다. 청량산의 기암들과 웅장한 전경을 조망할 수 있었다. 성곽 복원구간이 끊기는 지점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고 서쪽으로 축융봉이 바라다 보인다. 이곳에서 조금 올라가면 축융봉 아래 북문지까지 토축으로 축성된 구간이다. 한적한 오솔길을 연상시키는 약 200m의 토성 성벽 위를 걸으며 북쪽에서 불어치는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다.

축융봉 정상 바로 아래 북문지에서는 사방에서 이는 바람이 합쳐져서 마른 겨울나무들을 더욱 요란하고 세차게 흔들어댄다.

축융봉에 올라서면 청량산은 물론이고 사방에 태백산맥의 첩첩 능선들과 남서쪽으로 구비구비 낙동강의 물길이 태양에 반사되어 은빛으로  일렁인다.  그 구비 어디엔가 도산서원도 있을 것이고 퇴계 이황을 흠모한 이현보 선생이 지은 농암종택도 있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낙동강변을 따라 청량산을 자주 찾았다는 이황 선생의 이야기가 구구절절 전해오는 아름다운 길이다. 축융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광에 취해 잠시 넋을 잃어버렸다.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몸을 날려버릴것 같은 세찬 바람과 추위도 잠시 잊어버렸다.

2008년에 자란봉(806m)과 선학봉(802m) 사이를 연결한 "하늘다리"의 아슬아슬한 풍경도 아련하게 보인다. 축융봉에서 내려와 진행방향으로 성벽을 더 찾아 보았다. 암벽과 암벽사이로  가까스로 기저부만 낙엽더미에 겨우 숨겨놓고 허물어져 내린 옛 성벽이 조금씩 남아 있었다. 시간은 벌써 4시가 넘었고 겨울해는 금방 저물기에 서둘러 하산을 결심했다. 6km가 넘는 성곽을 일주하려면 상당한 노력과 인내 그리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내려오는 길은 성벽을 따라 내려오지 않고 성안마을로 향해 오랜세월 이 지역 주민들의 신앙터인 아담한 공민왕사당을 구경하고 몇채 남지 않고 그나마 인적이 없는 듯한 텅빈 성안마을의 애처롭기도하고 을씨년스런 풍경을 바라보면서 임도를 따라 다시 동문지로 내려왔다. 석양 빛에 반짝이는 앙상한 억새풀과 여전히 계곡으로 몰아치는 바람은 주변 풍경들은을 더욱 쓸쓸하게 했다.

청량산성을 찾아 오던 길도 그러했듯이 길고 험한 길을 다시 돌아갔다. 하루종일 추위에 시달렸던지 집으로 가는 길이 재촉되었다.

 

<동문지 위 복원된 성벽>

<밀성대 주변 복원 성벽>

<밀성대 주변 복원 성벽>

<온성 형태의 성벽과 밀성대>

<자란봉과 선학봉을 연결한 청량산 하늘다리>

<축융봉에서 바라 본 청량산>

<축융봉에서 바라보이는 낙동강>

<북문지 주변 허물어진 옛 성벽 구간>

<산신각과 공민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