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안성 죽주산성과 옛 죽산현의 유적답사(2010.11.04)

필그림2 2010. 11. 5. 20:17

만추의 계절 11월을 시작하며 성곽답사를 어디로 정할것인지 고민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이 가을 정취도 내년으로 기약해야하기에 산성답사 겸 북한산을 가보고 싶었지만 북한산성은 성곽의 길이만도 10km가 넘고 암벽의 험한 산행이기에 많은 체력을 요구하고 아침일찍부터 준비해서 가지않으면 성곽종주가 어려운 점 때문에 우리집(산본)을 기준으로 차량으로 경기도 주변 1시간내외의 미답사 성곽을 생각한 끝에 한번 가봐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뤄왔던 안성 죽산면의 죽주산성을 답사하기로 결정했다.

간식과 답사자료를 대충 준비하고 11시 20분경에 집을나서 여전히 신갈-용인부근에서 정체를 겪고있는 강릉행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호법분기점에서 중부고속도로를 갈아타 일죽IC로 나왔다. 영동고속도로만 안 막히면 1시간정도면 충분한거리인데 1시간 40분만에 일죽IC를 빠져나와 매산삼거리에서 이천방면 17번국도를 5분정도 타다가 죽주산성 안내판을 보고 빠져나왔다.

17번국도 앞 휴게소 입구에서 산성까지 포장도로로 되어있어서 차를 이용하여 동문 입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휴게소 입구에서부터 걸어올라 산성답사를 하면 더욱 즐거울 것 같았다.

1시경 동문 아래 주차장에서 시작해 홍예문의 형식을 하고 있는 동문과 그 좌측으로 성곽보수 공사를 하고 있는 풍광이 보였다.

 

죽주산성이 위치하는 죽산현은 충청,전라,경상도의 삼남과 서울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 요충지로서 죽주산성은 해발 370m 비봉산 동편에 위치하여 내성(270m), 중성(본성,1.7km), 외성(1.5km)의 3중 구조로 된 테뫼식 성곽으로 우물터(약수터) 주변에서 벡제시대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다량의 토기편들이 출토되어 삼국시대에 축성되었을을 짐작하게 하며 개축과 증축을 통하여 고려시대에는 몽고군과 격전을 펼친 곳이기도 하고 조선시대에는 병자호란과 임진왜란때 전투를 치루었던 역사적인 성곽이다. 시설물은 문지·치성·각루·포대 등이 있다. 문지는 중성에 3개소, 외성에 2개소를 설치하였다. 대부분의 문지는 성벽의 중간부에 두었으나 남문은 중앙부가 완만한 경사의 능선임을 감안하여 서벽 가까이에 시설하였고, 서문은 본성을 약 20m 정도 벗어난 지점의 외성에 설치하였다.

성벽의 방향이 꺾이는 곳에는 각루를 두었으며, 군데군데 치와 포대를 설치하였다. 성 안에는 비교적 넓은 대지가 많은 편이며, 장대지를 비롯하여 각종 건물지도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다.

 

통일신라 말 진성여왕 때에는 기훤(箕萱)이 이곳에서 군사를 모아 크게 세력을 떨친 것으로 전해지며, 특히 고려 고종 23년(1236)에 몽고군의 3차 침입 때 이곳 죽주산성에 이르러 고려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면서 공격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이때 성을 지킨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 장군은 일찍이 귀주성(歸州城) 싸움에서 몽고군의 공격법을 알고 있어 대비하였기에 백성들은 그를 귀신 또는 신명(神明)이라 하였다. 송문주 장군은 고종 23년에 죽주방호별감이 되어 죽주산성을 방어할 때 몽고군이 죽주산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자 성에서 출격하여 몽고군을 물리쳤고, 몽고군이 다시 포로 공격하여 사문이 무너졌으나 포로써 반격하였으며 무려 15일간 다방면으로 성을 공격한 몽고군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공성구를 불에 태운 후 물러갔다고 한다. 장군은 이 공으로 좌우위장으로 승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군에게 내주었던 죽주산성을 변이중(邊以中),황진(黃進) 장군이 기습작전으로 탈환하여 일본군은 더 이상 용인과 이천을 넘보지 못했다고 한다. 포루가 만들어진 산정에 올라서면 안성,장호원이 한눈에 잡힌다. 성내에는 송문주 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충의사(忠義祠)라는 사당이 있다.

 

성곽답사는 동문에서 북문방향으로 시작했다.

성 동북쪽의 높이 4~5m, 폭 4m 정도의 복원된 구역을 따라 걷다보면 좌측으로 높이 1m 남짓의 내성이 보이고 조금 더 오르면 포루가 있는 북치성을 만난다 이 북치성에는 북,동,남면으로 장방형 석재를 이용해 포루를 만들고 총안을 설치했다. 이곳에서는 이천과 장호원 방향이 훤히 보이는 요충지임을 실감한다. 오늘은 연무가 있어 조망이 썩 좋지는 않았다.

성곽은 이 북치성앞으로 외성이 연결되어 서문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 급하게 꺽여 중성이 연결된다. 옛성벽과 복원흔적이 함께하는 북쪽 중성을 따라 걷노라면 주변의 소나무와 낙엽송들이 우거져 시원함을 더해준다. 중성을 따라 걷다보면 중성의 북문이 보인다. 이곳의 성문들은 누각이 없는 암문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북문을 조금 지나면 성곽은 북쪽으로 90도 꺽여 50여m 진행하다가 다시 90도로 꺽여 서쪽 정상방향으로 올라간다. 이 ㄱ자 형태로 꺽이는 부분에 모서리를 잘 다듬은 석재를 이용한 굽도리를 확인할 수 있다. 성곽은 다시 경사지며 산정상부로 올라가는데 정상부에서 중성과 외성의 연결지점이 나타나며 외성 시작지점에 서문이 있다. 서문을 지나 외성을 돌아본다.

성곽의 많은 부분이 허물어졌지만 완전한 형태의 옛성벽을 볼 수가 있다. 성벽은 서치성지에서 꺽여 계곡쪽으로 내려가고 계곡에는 잘다듬은 장방형 대형 석재들이 뒹굴고 있는데 이곳이 수구지 인것 같고 조금 지나 외성의 북문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북문지를 지나면 바위를 타고 성벽의 흔적이 약 5m 정도 잘 남아있고 동치성1의 흔적이 보인다. 동치성1에서 성곽은 다시 회절하여 동치성2로 연결되는데 성벽의 흔적이 희미하다. 동치성2를 지나면 아까 지나온 북치성(포루)와 만난다.

다시 북치성으로 올라와 해가 잠간 들어 연무에 조망이 안 좋았던 이까보다 좀더 시원시레 안성벌을 조망할 수 있었다. 포루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다시 중성을 따라 외성과 연결되는 지점으로 올라 남치성을 향한다. 이곳에서 북치성까지는 엣성벽과 복원된 흔적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 죽산면이 훤하게 보이고 비봉산이 눈앞에 보이는 산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다.

서치성 주변에는 최근 복원한 흔적이 확연한 구간을 볼 수 있으며 성벽이 5m는 족히 넘어 보이고 보축부도 보인다. 남치성 앞에서 복원구간은 끝나고 간간히 옛 성돌들이 드러나 보이기도 하면서 남치성을 확인할 수 있다. 남치성은 완만한 축성의 경사와 정면에서 볼 때 마름모꼴을 하고 있는데 왠지 순천왜성이나 울산 서생포왜성, 울산왜성 등에 보이는 특유의 왜성(倭城) 냄새를 물씬 느끼게 한다. 왜 이런 축성 특징이 조선성곽에 나타나는 걸까. 나는 궁금해하며 남쪽 성벽을 따라 동치성 방향으로 전진했다. 남문을 지나 옛 성벽이 잘 남아있는 구간이 이어졌지만 넝쿨이 우거져 제대로 성벽을 볼 수가 없었다. 성벽앞으로 소나무가 자라있는 구간은 옛 성곽의 운치를 더해주기도 했다. 동치성 부근에는 복원한 구간이 있었지만 동치성은 서치성보다 더 옛 모습 그대로 잘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 동치성도 왜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나를 놀라게 했다. 이 동치성에 일본성에서 보이는 천수각만 올려 놓으면 완벽한 일본성이 였다. 왜 이런 축성법이 보일까?

고민이 더 깊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이 성을 함락하여 일본식으로 개축하였을까? 아니면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군이 개축하면서 일본성의 특징을 차용한 것일까?  이 죽주산성의 내력을 더 고증해봐야하겠지만 나로써는 분명 의심할 수 없는 일본 왜성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성벽을 따라 다시 동문 방향으로 내려오면서 내내 생각을 했지만 나로써는 풀지 못하는 결론이였다. 복원공사가 진행중인 구간을 지나 동문으로 내려왔다. 최근까지 발굴한 동문 앞 평지는 발굴 후 임시 복토가 되어 보기가 좀 안 좋아 보였다.

2009년 8월 한백문화재연구원에서 3차례 발굴한 이 동문지 일대에서 신라시대에 조성된 집수시설  4기, 조선시대에 조성된 집수시설 2기를 비롯하여 추정 주거지 및 축대, 용도미상의 석재열 등이 확인되었고 이와 동반되어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지난 8월 같은 연구원 발굴조사에서도 조선시대 집수시설 아래에서 6~7세기 신라시대에 조성한 집수시설 2곳을 추가로 확인하기도 했다. 이렇게 6기의 집수시설을 계단식으로 조성한 특징은 고대산성에서 볼 수 없는 예라고 한다.
발굴한 흔적이 있는 내성 안의 치소를 따라 약수터로 올라 잠깐 휴식을 취하고 이번 죽주산성 답사를 마치고 가까운 죽산면의 유적들을 살펴보고자 3시 40분경 산성을 내려왔다.

 

                                                                            <자치안성신문 2009. 8. 30. 죽주산성 발굴조사 현장>

 

인근의 매산리 미륵불(태평미륵)의 꾸밈없는 아름다움과 수수함 그리고 너그러운 표정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안성지역의 특징 중 하나가 이런 불교와 민간신앙이 잘 어루어진 미륵신앙의 흔적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미륵불 하나하나의 표정들이 바로 우리 이웃들의 모습인 것 같다. 안성지역의 미륵불만으로도 답사여장을 꾸려도 괜찮을듯 싶다. 인근의 용화사 경내에 있는 보살입상을 관람하고 절 서남쪽 밭가운데 외로이 서있는 고려시대 석탑은 옛 봉업사(奉業寺)의 영화를 말해주었지만, 늦가을 스산한 저녁무렵 석양이지는 그 풍광 속의 봉업사터는 더 애잔하고 아련해보였다. 저 멀리 죽산리5층석탑까지 봉업사 사역이였다고 하니 그 위세는 대단했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다시 길을 재촉해 강 건너 고려석탑의 백미 죽산리5층석탑의 당당함과 건축미를 관람하는것으로 이 답사의 여정을 끝냈다. 서쪽에는 석양이 물들고 오늘 마지막 태양의 열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사실 여정은 여기서가 끝이 아니다. 다시 집으로 가는 길이 여정이고 나의 삶으로 돌아가는것이 여정이며, 내 삶 그리고 나의 또다른 답사길이 여정의 연속인지라 결론은 나의 삶이 바로 여정이리라.

 

2010년 11월 4일 만추의 가을 죽주산성과 옛 죽산현 유적들을 돌아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