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조선 성곽 축성기술과 과학기술이 만난 최고의 걸작, 수원 화성(水原 華城)('19.05.29수)

필그림2 2019. 8. 20. 19:32

조선 성곽 축성기술과 과학기술이 만난 최고의 걸작, 수원 화성(水原 華城)

- 수원화성박물관 개관 10주년 기획전시 「조선의 읍성과 수원화성」관람과 수원 화성 다시 둘러보기 -



사적 제3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0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화성은 팔달산(八達山)과 그 동쪽의 낮은 구릉과 평지를 감싸며 쌓은 평산성으로 도시의 중심부를 포용하여 평면형태는 타원형을 이룬다. 성벽의 전체둘레는 5,744m이고 높이는 4.9m∼6.2m이며, 면적은 188,048㎡이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성하여 전체 평면형태는 불규칙하다. 성벽의 기초는 지형에 따라 착평(?平)과 삭토(削土)를 위주로 조성한 후 그 위를 모래로 다지고 다시 그 위에 외벽만 쌓는 내탁법(內托法)으로 축성하였다. 외벽은 배흘림 기둥과 같이 하단부가 약간 부른 규형(圭形)을 이루고 치성은 중국식 성제를 따르고 있다. 성벽 주위에는 호를 둘렀는데 산지에는 두르지 않고 평지부분에만 둘렀다.
화성은 서쪽에 팔달산이 있고 동쪽에는 낮은 구릉이 있으며 그 사이에는 남류하는 개천을 중심으로 약간의 평지가 조성되어 있다. 개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평지에 수원시가지가 조성되었고 시가지를 둘러싸고 팔달산 정상에서부터 동쪽의 구릉정상부까지 성벽을 축조하였다. 때문에 성벽은 능선의 사면과 경사면에 위치하고 사면의 형태에 따라 불규칙하게 진행하며 높이도 일정하지 않다.
주요시설물로는 문루와 옹성(甕城)을 갖춘 사대문과 암문(暗門) 5개소, 수문(水門) 2개소, 은구(隱溝) 2개소, 연못 5개소, 장대(將臺) 2개소, 공심돈(空心墩) 3개소, 각루(角樓) 4개소, 포루(砲樓) 5개소, 양루(孃樓) 5개소, 봉돈(烽墩) 1개소, 궁대(弓臺) 2개소, 치성(雉城) 10개소, 용도(甬道) 1개소, 적대(敵臺) 2개소, 양사(孃舍) 3개소 등 48개 시설물이 일곽을 이루나 수문 1개소, 공심돈 1개소, 암문 1개소, 적대 2개소, 은구 2개소 등 7개소가 멸실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한다. 그리고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華城行宮), 중포사(中鋪舍), 내포사(內鋪舍), 사직단(社稷壇) 등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洛南軒)만 남아있다. 1975∼1979년『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의거하여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당초 수원성은 화성에서 남쪽으로 약 8㎞ 떨어진 화산(華山) 아래에 위치한 토축된 읍성이었다. 정조 13년(1789) 아버지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속칭 思悼世子)의 원침(園寢)인 현륭원(顯隆園)을 양주 배봉산(拜峰山)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그 아래의 읍치와 민가를 수원 팔달산 아래로 집단 이주시키고 성곽을 새로이 축조하여 화성이라 하였다.
화성은 정조 18년(1794)에 축성을 시작하여 2년 뒤에 준공하였다. 축성은 정약용(丁若鏞)이 쓴 『성설(城說)』(이후『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으로 편찬)을 설계의 기본으로 하고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성역(城役)을 총괄하고 조심태(趙心泰)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축성 당시 거중기(擧重機), 녹로(??) 등의 새로운 기구를 제작하여 장대석 등을 옮기는데 이용하였다. 그리고 팔달산 아래에는 행궁을 지어 현륭원에 행차하는 임금이 머물 수 있는 제반 시설을 갖추었다.
화성은 성곽의 축조에 있어 그 재료를 돌과 전(塼)을 병용하고 대포와 총 등의 화약무기를 방어할 수 있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었다. 또한 재료를 규격화하고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의 특징이 있다.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華虹門)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十’자형의 도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도로망에 주요하게 이용되고 있는 등 200년 전 축성당시의 도시계획이 현존하고 있다.
축성 후 순조 1년(1801)에 발간된 준공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에는 성의 축조에 동원된 석수, 목수 등 기술자의 수와 임금, 인부들의 양식 조달, 축성에 사용된 석재의 채취장소 및 소요 개수, 벽돌, 목재, 철물, 철엽, 숯, 기와, 석회 등 재료의 양 등 전체 소요경비와 제원조달 방법 등이 기록되었다. 또한 축성계획, 제도, 법식,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도 상세히 기록하여 조선후기 대규모 토목공사의 실상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으며,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다. 아울러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시설물 중에 팔달문과 화서문은 보물 제402호와 제403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외에 형태와 구조적으로 독특한 시설물이 다수 있다.
팔달문(八達門)은 보물 제402호로 화성의 남문이다. 정조 18년(1794) 석축의 홍예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우고, 주위 4면에는 여장을 쌓았으며 전면에는 반원형으로 옹성을 축조하였다.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이다. 문루 내부에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한 줄로 배치하였는데 상하층 대량(大樑)은 전부 이 고주에 연결된다. 공포(?包)는 상층이 내외 삼출목(三出目)이나 하층은 외이출목, 내삼출목이며 내부는 모두 초화문(草花文) 장식으로 되어 있다. 화성의 여러 건물들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
화서문(華西門)은 보물 제403호로 화성의 서문이다. 정조 20년(1796)축조되었다. 성벽 가운데 석축의 홍예문을 열고 그 위에 단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전면에는 반원형의 전으로 쌓은 옹성을 두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문루는 전형적인 2익공(翼工) 집으로 외목도리를 받쳤으며 창방(昌枋) 위에는 화반(花盤)을 배치하였다. 또 대량(大樑)에서 측면 기둥에 걸쳐 충량(衝樑)이 있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한국에 있는 다른 성곽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구조도 특수하다.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다. 석축의 홍예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우고 전면에는 반원형 옹성을 갖추었다.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층의 우진각지붕으로 화려한 다포집이다. 홍예 위로 4개의 누조(漏槽)를 설치하고, 성벽 위에는 안팎에 총구를 갖춘 여장을 쌓았다. 홍예 위에는 오성지(五星池)를 만들었다. 문에서 53보 되는 곳에 각각 적대가 마련되어 있다. 장안문은 규모나 구조에 있어 서울의 남대문과 매우 비슷하나 옹성, 적대와 같은 방어 시설을 갖춘 것은 특징적이다.
창룡문(蒼龍門)은 화성의 동문으로 정조 19년(1795) 건립하였다. 돌로 쌓은 홍예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우고 전면에는 옹성을 쌓았다.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홍예의 규모가 서로 다르다. 내홍예는 높이 4.8m이고, 외홍예는 4.5m이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기둥 위에는 새의 날개 모양을 한 간단한 첨차가 2중으로 놓인 이익공(二翼工)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 옹성은 장안문이나 팔달문과 달리 출입구가 한쪽 구석에 나 있다. 창룡문 왼쪽에는 축성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창룡문은 주변지형에 기복이 있어 좌우에 적대를 두지 못하고 그 대신 주변을 멀리 감시할 수 있도록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을 세웠다. 그리고 동문 옆에는 쇠뇌를 쏠 수 있는 동북노대(東北弩臺)를 두어 멀리 팔달산 정상의 서노대(西弩臺)와 마주 대하도록 했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창룡문의 북쪽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 비교적 너른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 최상층에 올라서면 화성의 전체모습이 보인다. 요동(遙東)에 있는 계성의 평돈(平墩)을 본 따 벽돌을 이용하여 내외 두 겹으로 만들었다. 동북공심돈은 건축적으로 화성에서 유일하게 원형 평면을 가지고 있으며 공심돈 중에서 성벽 안쪽으로 성벽과 따로 떨어져서 세워진 것 등은 다른 공심돈과 다른 점이다. 또한, 내부가 소라처럼 나선형으로 생겨 ‘소라각’이라는 별칭이 있다. 크기는 높이 17척 5촌(약5.42m), 바깥 원 둘레 122척(약38m),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약1.24m), 안쪽 원 둘레 71척(약 22m)으로, 내원과 외원 사이에는 4척 5촌(약1.39m)의 공간이 비워져 있다. 아래층 높이는 7척 3촌(약 2.26m), 가운데 층 높이는 6척 5촌(약 2m)이다. 아래층에서 시작되는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가면 정면 2칸, 측면 1칸의 누각을 세운 최상층에 이른다. 동북공심돈의 출입구 우측에는 공심 일부를 막아 온돌 한 칸을 지어 이곳을 지키는 병사가 거처하게 하였다.
수원성을 흐르는 물은 용연에서 한 번 휘돌아 나와 화홍문(華虹門, 북수문)을 거쳐 남수문으로 빠져 나가게 되어있다. 화홍문은 7개의 홍예문을 내었는데 홍예하단의 지대석이나 돌기둥, 물살과 마주치는 부재는 마름모꼴로 면을 다듬어 물살이 좌우로 갈라지게 하였다. 홍예문 위로 돌로 다리를 깔고 그 위에 누각을 세워 화홍문이라 하였다. 화홍문은 수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누각이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정조 18년(1794) 화성을 축조할 때 세운 누각 중 하나로 경관이 빼어나 방화수류정이라 불렸다. 화홍문의 동쪽에 인접한 높은 벼랑 위에 있는데 그 아래에는 용연(龍淵)이라는 인공 연못이 있다. 전면 3칸, 측면 3칸의 아(亞)자형 평면구조이며, 지붕은 8각 지붕을 기본으로 남북에 합각을 더 세워 십(十)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 삼절병통(三節甁桶)이 얹혀 있다. 정자의 이름은 중국 송나라 시인 정명도(程明道)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자료>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성곽봉수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