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오랜 역사를 간직한 서천 비인면의 성곽_월명산성,관적곡산성,불당골산성,비인읍성('19.03.10일)

필그림2 2019. 7. 4. 15:20

오랜 역사를 간직한 서천 비인면의 성곽_월명산성,관적곡산성,불당골산성,비인읍성

- 백제시대 군사상 중요거점에서 조선시대 서해안 해적방어를 위한 읍성이 있는 서천 비인면 -



서천은 충남의 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부여, 북쪽은 보령, 남쪽은 금강을 경계로 전북 군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서해와 접해 있다. 장수읍 수분리에서 발원한 금강이 무주, 영동, 장수, 옥천, 금산의 물을 합하여 부강(芙江)을 이루고, 다시 진천에서 발원한 미호천(美澔川)의 물을 합하며 다시 공주, 부여, 강경을 거쳐서 군산과 서천 장항 사이에서 서해로 합류한다.

서천은 웅진백제와 사비백제의 군사상 중요한 거점이었다지금의 장항지역인 기벌포를 포함하여 백제의 마지막 왕도 사비성을 지키는 중요한 관문임과 동시에 곡창지역으로, 평상시에는 광활한 옥토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고, 외세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논산의 득안성과 함께 군사상 최후 저지선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서천지역에는 백제 때 산성이 많이 남아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했던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으로 추정되고 있는 한산의 건지산성, 서천의 남산성, 비인의 불당곡산성, 관적곡산성, 장항의 장암진성 등이다. 비인면 성내리에는 비인읍성은 1421(세종 3)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고려 중기에 흙으로 쌓은 성을 돌로 다시 쌓았다. 성의 높이는 2m, 길이는 3,000m 정도이며, 지금은 성의 형태만 남아있고 대부분 훼손되었으나, 일부 복원된 구간도 있다.


봄이오는 3월 비인중학교에서 월명산(298m) 정상을 거쳐 북쪽 능선을 따라 관적사 입구로 하산하여 성내저수지를 지나 읍내 비인교회 뒤 비인읍성 남쪽과 서쪽을 답사하였다.



월명산성(舒川 月明山城)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 월명산(月明山)에 자리하고 있는 석성이다. 산성이 자리한 월명산은 해발 298m의 낮은 산이지만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봉에 해당되기 때문에 전망이 매우 좋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서해의 비인만(庇仁灣)과 장구만(長久灣)이 내려다 보이고, 남쪽으로는 남산, 북쪽으로는 관적곡산성(觀寂谷山城)·불당골산성, 서쪽은 성북리산성(城北里山城), 동남쪽은 장구리산성(長久里山城)·선도리산성(船島里山城)·장포리산성(長浦里山城)등과 연결된다.
산성은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며, 전체 둘레는 250m. 대부분의 성벽이 급경사면을 지나게 되어 있어 성벽의 대부분이 이미 크게 붕괴된 상태이며, 성내에는 회곽도(廻郭道)가 돌아가고 있다. 부대시설은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다만 성내의 북쪽에 길이 25×40m 크기의 건물지가 남아 있는데, 이 부분에서 기와편과 토기편이 수습되는 것으로 보아 건물지로 추정된다.


관적곡산성(舒川 觀寂谷山城)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에 위치한다. 비인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5가량 떨어진 곳에 관적사(觀寂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을 에워싸고 있는 산 위에 산성이 축조되었는데, 둘레가 1.5가량 되는 석축산성이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지만 돌무더기의 흔적은 확인할 수 있다. 성벽은 약 3개의 산봉우리를 포용하고는 골짜기를 따라 내려와 계곡부를 감싸고 있어, 포곡식 산성으로 분류된다. 비인면 지역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산성에 해당한다.
성안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지만 우물지와 건물지가 들어설 만 한 평탄지도 발견할 수 있다. 성내부에서 시설물은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관적사가 위치한 부분이 이 성을 출입하는 문지에 해당된다. 이곳에서 확인되는 유물은 조선시대 기와편과 경질토기편, 도자기편 등이다.

관적곡산성은 성에 오르면 동북쪽의 구릉지대와 서북쪽의 서해바다가 안면도까지 훤히 드러나 보이고 서해의 서남부까지 조망되어 한눈에 보아도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월명산(289m)은 비인면의 명산으로, 높이는 그리 높지 않지만 정상에 오르면 가까이로 비인면 일대가 한눈에 보이고 서천 리아스식 해안과 어우러지는 서해바다의 거침없는 풍광이 서남에서 서북쪽으로 펼쳐져 있다.



불당곡산성(舒川 佛堂谷山城)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 덕명동 마을 뒷산에 축조된 산성이다. 산세는 마치 꺽쇠와 유사한 형태로서 서북, 동남의 양쪽에 형성된 봉우리가 서남방의 덕명동을 향하여 감싸며 내려온다. 산성은 해발 140m의 능선상에 자연할석을 이용하여 구축한 석축산성인데 현재는 거의 붕괴되었다. 성벽은 동북벽의 윤곽이 비교적 뚜렷했으며 능선을 따라 약 100m 진행되다가 끊어졌다. 동남벽에서도 같은 현상인데 나머지 부분의 성벽 통과선은 확인하기 어렵다. 남아 있는 성벽은 600m 정도지만 성내는 경사도가 심하고 건물지가 있었을 만한 평탄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유물 또한 발견할 수 없었다.


비인읍성(舒川庇仁邑城)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33. 서천군 비인면 소재지에 있는 읍성은 낮은 구릉 두개를 연결한 상태로 바다쪽을 바라보며 축조되어 있는 구릉성이다. 이 읍성의 동··북이 산악으로 둘려 있고 서로는 경작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멀리 서해가 바라다 보이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은 남북으로 긴 타원형으로 둘레가 1,500정도이다.
남벽의 길이는 210정도이고, 남벽과 서벽은 거의 직각으로 교차한다. 남벽은 구릉정상부에 토루 상으로 잔존하며 성 외측에 1∼2단의 석축이 남아 있다. 이 석축은 대형의 부정형 석재로 쌓았으며, 군데군데 쐐기돌을 박은 것이다. 성벽의 높이는 외벽 높이 3∼4, 내벽 높이 2∼3이다.
동벽은 전체길이 400중에서 남단부의 150정도는 도로와 민가에 의하여 파괴되었고 북단부 250가량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벽의 외벽 높이는 4∼5이고 장방형의 할석을 사용하여 네모막돌바른층쌓기 수법으로 축조하였다. 외벽은 잘 남아 있는 곳에서 6∼7단을 나타내고 있으며, 모서리와 면을 잘 맞추어서 거의 수직이 되게 쌓고 쐐기돌로 틈을 메운 축조방법을 사용하였다. 성체의 내측은 흙과 돌로 채워 넣은 경사면의 내탁부를 이루고 있다, 동벽에서 거의 직각이 되게 북벽이 축조되어 있는데 북벽의 길이는 현재 250에 달한다.
북벽의 서단부는 비인읍성의 잔존 성벽중에서 가장 잘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의 성벽축조는 성체의 외벽을 장방형의 할석으로 면을 맞추어 네모막돌바른층쌓기 수법으로 수직이 되게 쌓고, 그 내측으로 비교적 크기가 작은 할석으로 채워 넣고, 그 뒤에 흙으로 내탁하였다. 체성의 외벽 높이는 7∼8에 달하며, 내벽의 높이는 4∼5정도이다.
북벽과 서벽의 연접부는 둥글게 처리되고 있고 서벽길이는 550정도이다. 서벽의 중앙부분은 민가와 통로로 인하여 파괴되었으며, 파괴된 부분의 길이는 180정도이다. 서벽은 토루상으로 잔존하며 외벽의 높이는 북단부에서 5∼6, 남단부에서 4∼5이며, 내벽의 높이는 3∼4이다.
읍성의 중요한 시설이었던 동문지와 서문지는 서천대천간의 도로 개설로 인하여 파괴되어 그 형적을 찾을수 없다. 또한 읍성의 동북방 지장천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이 소하천을 이루며 읍성을 동에서 서로 관통하고 있으므로 동벽과 서벽에 각기 1개소씩 수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확인하지 못하였다. 또한 북벽의 중앙부에 폭 3∼4의 절개부가 있는데, 현재 통행로로 이용되고 있다. 남벽의 외측에는 해자가 잔존하는데 현재 성벽외면에서 5떨어진 곳에 폭 5∼6, 깊이 70∼110의 규모를 나타내고 있다.
읍성의 내부에는 비인초등학교를 비롯한 관공서 및 민가가 밀집되어 있고 성벽 내외측은 전답으로 경작되고 있다. 또한 성내에 우물이 3개소 있었다고 하나 형체를 알 수 없고,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한 곳은 현재 양조장에서 개수하여 우물로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한곳은 식당에 있는데 지금은 묻어버리고 그 위에 마루를 설치해 놓았으며, 또 한 곳은 간이 상수도로 이용되고 있다.
비인읍성에 대한 문헌기록으로는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읍성은 석성으로 둘레가 1,9338촌이고 선덕 5(세종 12, 1430)에 청화역 동쪽에 축조하고 현의 치소를 옮겼다.고 하였다. 또한 문종실록(文宗實錄)에는 읍성의 규모 및 시설에 대하여 상세하게 수록해 놓고 있다. 즉 읍성의 둘레는 1,933척으로 나타나고 있어 세종 12년에 축조한 규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의 높이는 평지가 11, 높은 곳이 9척이고, 여장의 높이는 3척이며, 적대는 5개소에 시설하였다. 성문은 3곳에 두었는데 그 중 1곳은 옹성이 시설되지 않았으며, 여장은 423, 성내에는 우물이 3이고, 해자의 둘레는 2,152척인데 간혹 메워져서 없어진 곳도 있다 기록하고 있다. 한편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성곽조에는 읍성은 석축으로서 둘레가 3,505, 높이 12, 성내 우물 3, 바다입구까지는 160, 세종 3(1421)에 여러 고을의 군정(軍丁)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공해조에는, 객관 10, 아사 12, 현사 7, 향청 4, 훈련청 3, 작청 5칸이 건립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확인이 불가능하다.




<참고자료>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성곽봉수편) - (성곽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