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소백산 백두대간(고치령~죽령 구간)에서 만난 산성, 마당치산성과 소백산성('18.06.08금)

필그림2 2018. 6. 13. 19:46

소백산 백두대간(고치령~죽령 구간)에서 만난 산성, 마당치산성과 소백산성

- 험준한 소백산의 옛 교통로와 고개에서 만난 치열했던 역사의 흔적을 만나다 - 



남진하던 백두대간이 태백산을 지나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국토의 중앙부에 위치한 소백산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로서 높고 험한 산맥을 이루고 있는 이 일대는 과거 삼국시대 삼국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다. 이후로 험산준령을 넘는 여러 고갯길이 뚫렸고 그로부터 소백산은 장벽으로서가 아닌 영남과 경기, 충청의 문물교류가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소백산을 넘는 고개로는 크게 3개가 있다. 제1의 고개는 죽령(竹嶺, 689m)으로 국토의 대동맥으로서 예나 지금이나 수 많은 사람들과 물류가 넘나드는 길이다. 삼국사기 아달라이사금 5년조는 '춘삼월에 죽령을 열었다'(春三月 開竹嶺)고 적었다. 서기 158년의 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중종)의 경상도 풍기군 산천조는 '죽령: 군의 서쪽 이십사리에 있다. 신라 아달라왕 오년에 비로소 개통했다.' (竹嶺: 在西郡 二十四里 新羅 阿達羅王 午年 始開路)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소백산 동쪽,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옛 고갯길 두곳이 고즈넉히 자리하고 있다. 마구령(馬驅嶺, 820m)과 고치령(古峙嶺 또는 串赤嶺, 760m). 현지 주민들은 메기재, 고치재라고 부른다. 마구령은 소백산 국립공원 경계 지역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고개로서 경북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임곡리를 이어주는 고개이다. 마구령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경북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를 남북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충청도 영춘현과 경상도 영천군(지금의 영주) 사이에 '통행'을 의미하는 선이 그어져 있다. 그리고 그 선과 백두대간 마루금이 교차하는 곳에 '馬兒嶺'(마아령)이 표기돼 있다. '마아령'이 지금의 '마구령'(馬馬+區嶺)으로 변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러 정황상 일제가 한반도 땅이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고개명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사료 추적 결과, 마구령은 조선총독부가 지난 1918년 발행한 조선지형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 이전은 모두 마아령으로 표기됐다. 충북 영춘에서 경북 북부지역을 넘는 백두대간 고개는 고치령, 마구령, 여촌령(呂村嶺·대동여지도 참조) 등 3개가 존재하고 있다. 고치령은 영춘과 순흥, 마구령은 영춘과 영주, 여촌령은 영춘과 봉화를 연결하고 있다. 이는 조선 조정이 오지인 영춘에 왜 현(懸)을 설치했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고치령은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마락리~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를 잇는 고갯길이다. 해발고도는 마구령보다는 조금 낮은 770m 정도이며, 좌석리에서 고치령 정상까지 교행이 어려울 정도의 좁은 산길이지만 포장길이지만, 고치령 정상에서 의풍리 방면으로는 험한 비포장 내리막길이다.

고치령은 태백산이 끝나고 소백산이 시작되는 백두대간의 주능선이다. 고치령 정상에는 한 칸짜리 아담한 산령각(서낭당)이 자리해 있다. 단종 복위 운동의 주무대로 단종은 태백산신으로, 금성대군은 소백산신으로 모신 이곳 산령각은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는 영험하기로 이름난 곳이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1866)는 대동여지도에서 경상도 순흥-충청도 영춘-강원도 영월을 거의 직선으로 연결했다. 그리고 그 직선이 백두대간과 만나는 지점에 '곶적령'(串赤嶺)을 적어놨다. 곶적령을 '관적령'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으나, 지금의 지명이 '고치령'인 점을 고려하면 곶적령이 맞아 보인다. 곶적령 이름은 문헌상 세종실록지리지(1425, 단종),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중종) 등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1752, 영조) 산천조에 처음 등장한다. '곶적령: 부(순흥 지칭)의 삼십리에 있다. 마아령에서 왔고 길은 영월, 영춘으로 통한다.'(串赤嶺: 在府北三十里 自馬兒嶺來 路通寧越永春)-<여지도서>

고치령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국방봉 방향으로 1.2km 정도 산길을 따라 가다보면 능선위로 흩어져있는 인공의 돌무더기와 기와, 강돌 등을 확인하게 된다.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 양다리와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 마을 경계인 소백산 기슭 해발 931m에서 1,041m 부근에 성곽둘레가 1,415m 가량 되는 마당치산성(馬堂峙山城)이다. 소백산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여러 개의 산성이 있으나 이중 마당치성이 가장 큰 규모로서 문헌 기록이 없으며, 마당재에 있다고 해서 마당치산성으로 명명되었다. 단양향토문화연구에서 발간한 「양백지간(兩白之間)의 산성(山城)·봉수(烽燧)」에서는 "마당치산성 내에는 우물터와 집터의 주춧돌 7개가 놓여있으며, 산성은 해발 900m 능선을 따라 두개의 계곡에 걸쳐 축조돼 있다"며 "능선에는 토성을 쌓았고 아래는 석성을 쌓은 것으로 볼 때 고구려군이 남쪽의 신라 군사를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석축의 흔적이 부분적으로 남아있고, 건물지와 망루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골문 기와편과 조선시대 기와편이 산재해 있으며, 공성전을 대비해 강변에서 지고 올라왔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둥근 강돌들이 쌓여있는 곳도 있다. 마당치에 이르기 전에는 문터 1곳도 확인되었다.

국망봉에서 능선을 비로봉 가는 해발 1,400m의 백두대간 길에 소백산성이 나온다. 퇴계가 언급한 그 석성(石城)일 가능성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중종)등의 문헌에 둘레가 1천4백28척(약 640m)이라고 하였다. 현재 급경사지, 절벽등 자연 성벽과 석성의 흔적이 확인되는 구간이 있으며, 우물지, 군창지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세운 소백산성 안내판에는 "퇴계이황 선생이 다녀간 소백산성"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퇴계 이황(1501~1570)이 1549년(명종 4) 소백산에 올라 그 감흥을 고스란히 남긴 「유소백산록」에서  "석륜사에서 하루 밤을 묵고 상가타에 가기 위해 석성을 지났다"고 했다. 여기에서 언급한 "석성"이 지금 마루금에 위치한 이 곳을 말하는것인지는 아직 고증이 더 필요할 것 같다.

퇴계 이황은 1549년(명종 4) 소백산에 처음 올랐다. 그 감흥을 고스란히 「유소백산록」에 담았다. 지금까지 전하는 최초의 소백산 유산록이다. 퇴계보다 조금 앞선 인물인 신재 주세붕(1494~1554)도 소백산 유산을 하면서 시와 유산록을 남겼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일부 시詩만 몇 수 전할 뿐이다. 따라서 퇴계의 유산록은 이후 소백산을 오르는 많은 선비들의 교본이 되어 비슷한 형태의 유산록이 잇달아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퇴계는 백운동서원에서 하룻밤을 자고, 초암사→석륜사(1박)→국망봉→석륜사(1박)→석성→죽암폭포→관음굴(1박)→박달현→비로사→욱금 쪽으로 하산하면서 총 4박5일간의 전체 일정을 끝낸다.
 
소백산 일대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서 삼국시대부터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장이었다. 따라서 수많은 성과 보루, 망루, 봉화 등이 축조되었고, 고려, 조선으로 이어오면서 외적을 방어하고 피난을 위한 방어시설이 축조되고 개축되었다. 현재 소백산국립공원 일대에는 이번에 답사한 마당치산성,소백산성 이외에도 묘적산성,도솔산성,죽령산성,용부원리산성,대어구산성,마구령차단성 등 많은 관방유적이 남아있다.


<참고자료>
양백지간(兩白之間)의 산성(山城)·봉수(烽燧)/단양향토문화연구회/2000
국사관논총 제16집/국사편찬위원회/1990
신라육상교통로 연구/학연문화사/서영일

충북일보/대동여지도와 백두대간 충북의 옛고개

다음백과사전 - 마구령/고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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