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옛 장흥부와 회주목의 치소, 장흥(長興) 회주고성(懷州古城)('17.11.12 일)

필그림2 2017. 11. 13. 21:25

옛 장흥부와 회주목의 치소, 장흥(長興) 회주고성(懷州古城)

- 천관산의 유명새에 반해 사라져가는 옛 장흥의 역사를 간직한 치소성 -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와 외동리를 연결하는 성으로 호남의 명산 천관산(723.1m) 동쪽 봉우리인 주양봉(325m)에서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흘러 윗쇠골 옥당제까지 늘어진 긴 성이다. 현재 확인된 회주고성의 전체 길이는 675m이며, 체성(體城)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은 윗쇠골 옥당제에서 주양봉으로 오르는 경사면이다. 체성은 장성(長城)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석축을 이용해 내․외벽을 쌓았는데 체성으로 보아 해안에서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한 성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체성이 해안에서 들어오는 동쪽 벽이 아니라 관산읍이 위치한 북쪽을 중점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성이기 때문이다. 성의 북서쪽 바깥 측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1.5m~2m 정도 이다.
회주고성에 대한 문헌이 많지 않아 성의 축성 연대와 폐성에 대한 정황들을 확인할 수 없다.


회주고성에서 남방으로 1km 정도 떨어진 옛 장흥성의 서문 밖 지점에는 높이 2.4m의 돌장승과 미륵불이 정답게 서 있다. 장흥 방촌리 석장승(중요민속문화재 제275호, 2013.06.14 지정)이라 명명된 2기의 석장승 중 서쪽에 위치한 장승은 ‘男長栍’, ‘벅수’, 명문에 따라 ‘鎭西大將軍’으로 불리우고, 이 장승과 마주하는 동쪽의 장승은 ‘미륵석불’, ‘벅수’, ‘돌부처’, ‘女長栍’, 등 다양하게 불리우나 명문은 없다. 진서대장군(鎭西將軍軍)이라 음각된 돌장승은 고려시대 여․몽 연합군이 일본 정벌시 무운장구를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이 남아 있어 회주고성은 고려시대 때 축성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마주 보고 있는 미륵불은 반대로 눈을 내리깔고 투박한 입술을 하고 생각에 깊이 잠긴 모습이다. 두 석상 모두 지대석 없이 땅에 묻히게 되어 있어 잘 손질한 것은 아니나 표정만은 잘 나타나 있다. 소박한 솜씨로 서민에게 친근감을 갖게한다.

고려 元宗 6년(1265) 장흥부(長興府)가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 개칭되고, 회주목의 치소가 있던 방촌을 보강하고자 상령산성(觴岺山城)과 회주고성(懷州古城)을 축성하면서, 성문인 북문동의 동쪽에 미륵으로부터 치소를 지키고자 한것으로도 추측된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이 회주고성의 서쪽이 약하다하여 읍성의 보허진압(補虛鎭壓) 및 수호를 위해 서문 밖에 이 장승을 세웠다고 전해져 오고 있으나, 동쪽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오는 미륵석불이 진서대장군과 함께 쌍을 이루고 서있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는 밝혀져 있지 않고, 방촌 석장승은 제작연대와 그 기능, 형태와 명문 등으로 보아 민속신앙과 생활문화사와 관련된 귀중한 학술적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


회주고성에 대한 기록은 조선후기의 사찬지리지(私撰地理誌, 1747) 고적조(古跡條)에 “장흥 지북(현 관산읍 지정리)으로부터 천관산을 지나 수금포(현 대덕읍 연지리)와 연결되어 있다”고 쓰여있다. 회주고성이란 명칭은 고려후기 장흥부(長興府)가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원종 6년, 1265~충선왕 2년, 1310)된 적이 있어 붙여진 것이다. 사찬지리지의 기록을 근거로 볼 때, 회주고성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시 입보처(入保處)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는 추측에 불과해 앞으로 체계적인 연구조사가 필요하다.



<방촌리 천관산 주차장 인근 회주고성 석축 흔적>



천관산 정상 연대봉에 남아있는 봉수대(천관산 봉수)는 고려 의종(1160년)때  설치되었다고 하며, 회주고성이 위치한 방촌마을과 다도해를 관측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 제5노선 직봉의 연변봉수로서 동쪽의 전일산봉수에서 횃불을 받아 서쪽 강진 원포봉수로 전달했던 전라우수영 소속의 봉수대로써,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장흥도호부편에 "천관산 봉수는 동쪽으로 장흥부(長興府) 전일현(全日峴)에 응하고, 서쪽으로 강진현의 남원포(南垣浦)에 응하며, 북쪽으로 억불산(億佛山)에 응한다." 라고 하였다. 언제부터인지 석축의 바닥 일부만 남기고 무너진 것을 이지역 사람들이 1986년에 복원하였다. 복원한 연대는 돌로 네모반듯하게 쌓았는데 둘레가 27m이며, 높이는 2.6m나 된다. 서쪽 면 한가운데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이 천관산 봉수도 회주고성과 관련된 유적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현재 천관산 주차장 앞 좌측 공용화장실 주변에 희미한 글씨의 "회주고성터" 안내판이 조그마하게 설치되었으나, 자세히 보지않으면 확인이 쉽지않다. 이 안내판을 지나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우측으로 축사가 나오는데 이곳 우측에 돌무더 같기도 하고 토축 같기도한 흔적이 회진고성의 성벽 흔적인데 이 또한 확인이 쉽지 않다. 남아있는 성벽의 중간 쯤 구간 위에는 과거에 유적안내를 위한 기념표석이 설치되어 있는데 얼씬연스럽고, 성벽 위에 설치되어 있어 성벽 훼손에 한몫을 하고 있는 샘이다. "회진고성터" 유적안내 표석을 입구 쪽으로 옮겨야 할 것이고, 최소한의 보호를 위한 문화재 지정 및 안내문 보완이 절실하다. 천관산 산행을 위한 관광객이 전국적으로 모여들지만 이곳 관산면 방촌리 일대가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 초까지 장흥의 군사와 행정을 관리하던 치소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참고자료>

전라도성터이야기/김선기,오재만/보림

한국고고학전문사전-성곽,봉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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