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하늘이 내린 청야입보 산성, 동해(東海) 두타산성(頭陀山城)(2014.10.04)

필그림2 2014. 10. 6. 08:40

   하늘이 내린 청야입보 산성, 동해(東海) 두타산성(頭陀山城)

- 민관군의 청야입보 산성은 무릉도원의 비경으로 남다 -

 

 

 

두타산성(이 있는 강원도 동해시는 21세기 환동해권의 중심도시를 건설함으로써 균형있는 국토 개발과 새로운 동해안시대를 개척하겠다는 국가계획에 따라 1980년 4월 1일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을 통합하여 만들어진 도시이다.

두타산성은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 및 미로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두타산(頭陀山,1352.7m)의 북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두타산성을 찾아가려면 동해시 삼화동의 무릉계곡(武陵溪谷)으로 들어가야한다.

 

무릉계곡은 1977년 국민관광지 제77호로 지정되었다. 산수의 풍경이 중국 고사의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과 같다 하여 무릉계곡이라 부르며,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계곡입구 좌측에서 부터 두타산(1352.7m),청옥산(1403.7m),고적대(1353.9m) 등 높고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만들어진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 하나의 계곡이 되어 동쪽으로 장장 14km의 하천을 이룬다. 무릉이란 이름만큼 신비롭고 아름답다.

태암(胎巖),미륵암(彌勒巖),반학대(半鶴臺),능암(能巖),쌍현암(雙峴巖),학소대(鶴巢臺) 등의 기암괴석과 학소폭포,관음폭포,쌍폭포,용추폭포 등 계곡을 따라 절경들이 연연히 이어져있어 숲길을 걷는 즐거움과 함께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매표소를 지나 철조노사나좌불(보물 제1292호)과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등의 유물이 있는 천년 고찰 삼화사(三和寺) 초입의 금란정(金蘭亭)과 함께 시인,묵객 그리고 이 지역을 거쳐간 관리들의 이름과 싯구들이 새겨져 있는 6,600㎡(약 2,000평)의 무릉반석(武陵盤石)은 천여 명이 앉아도 부족함없이 넉넉해 보였다.

삼화사 경내를 잠시 둘러보았는데 10월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거행되는 수륙대재 준비로 어수선하고 분주했다. 삼화사 국행수륙대재(國行水陸大齋)는 태조 이성계가 고려 왕족에 대한 천도 기원과 사회적 통합을 위해 태조 4년(1395년)에 삼화사를 수륙도량으로 정하고 매년 봄, 가을에 설행해 왔다고 하며. 이후 숭유억불정책으로 단절됐던 것을 삼화사가 소장한 의례집인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를 근거로 2005년부터 매년 10월 범패작법 의식을 봉행해 오고있다고 한다.

 

<천연 암벽을 이용한 출입시설 - 두타산성 동문지>

 

삼화사를 지나 계곡을 따라 약 2km 지점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난 된비알의 등산로를 500m 쯤 오르면 암반과 절벽에 쌓은 두타산성의 첫 흔적인 인공과 자연암벽이 절묘한 성문을 만날 수 있었다.

두타산성에서 바라보는 기암절벽과 그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란 늙은 금강송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 아래 세상에서 가져온 근심걱정은 어느새 머리속에서 지워져있다. 그래서인지 이 두타산성에 오르는 길은 일반 관광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무릉계곡을 따라 걷기를 원하는 일반 관광객들도 계곡 갈림길에서 등산로를 따라 500m 정도 숨이 가쁠 정도로 올라오면 그만한 가치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

 

두타산성은 두타산이 북쪽으로 뻗은 지맥의 험준한 지형과 암벽등을 이용하여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산성은 남고북저형으로 높은 지역인 북족에는 내성이 낮은 지역에는 외성이 자리하고 있으며, 내성의 북서회절부와 외성의 북서회절부, 북동회절부에는 도와 익성이 길게 시설되어있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6,510m이며, 평면형태는 부정형이다축성방식은 성벽이 없는 자연 구간과 암벽 위에 내외협축(內外夾築)과 내탁(內托)을 혼용한 석축 난층쌓기를 하였다.

 

<두타산성 석축>

 

김부식의『삼국사기』「신라본기 파사왕 23년(102) 8월조」기사에 따르면 이 지역에 "실직국(悉直國)"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실직국의 영역은 남쪽의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싸워 영덕에까지 미치고 있었으나 파사왕 23년 신라에 복속되었다. 이 지역 전설에 의하면 실직국이 신라와  싸웠던 마지막 전쟁터가 두타산성이란 이야기도 있다. 두타산성에 대한 옛 기록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두타산석성은 부(府)의 북쪽에 있다. 둘레가 1,518보이며 안에 세 골짜기의 물이 함께 흘러 하나의 계곡을 이루는데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다."라고 하였고,『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타산성은 석축이며 둘레가 8,607척, 높이 5척이다."라고 하였으며, 조선 현종3년(1662)에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편찬한 『척주지』「두타산기」에서는 "두타산성은 부의 서쪽 45리에 있다. 석축으로 8,725척이다. 영락11년 태종13년(1413) 계사년에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성을 쌓았다. 후에 왜구가 쳐들어와 함락하여 성안에서 살생을 자행하였다고 한다."라고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두타산성은 신라 파사왕 23년(102)에 최초로 축성하였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 조선『태조실록』에는 고려 고종 40년(1253)에 야굴(也窟)에 의한 몽고의 5차 침입때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李安社)가 두타산성에 들어가 난을 피했다고 하였다. 조선 태종13년(1413) 또는 14년(1414)에 삼척부사 김맹손(金孟孫)이 옛 성을 다시 축성하였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서 함경도 안변에서 남쪽으로 후퇴하는 왜병의 주력부대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남녀노소등 민관군이 3일간의 치열한 혈전을 벌였지만 함락되어 처참하게 희생되었다고 한다. 1996년 관동대박물관에 의한 지표조사때 12~13세기의 고려시대 청자편과 토기편과 어골문 기와편들이 다수 채집되었고, 그 이전인 1972년에는 산성 아래 삼화1리에서 고려자기가 대량으로 출토되어 두타산성의 축성 시기와 관련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두타산성 추정 망대지에서 바라본 두타산성>

 

두타산성은 등산로를 따라 다수의 축성 흔적을 볼 수 있으며, 일부 구간에서는 험준한 계곡을 이용하여 절묘하고 아슬하게 쌓은 옛 모습 그대로의 성벽을 찾아 볼 수 있다. 두타산성은 불행하게도 비지정문화재로서 1996년 관동대박물관과 동해문화원에 의해 지표조사가 이루어졌을 뿐 아직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두타산과 청옥산, 무릉계곡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천헤 일품의 주변 경관은 지역 최고의 관광명소이자 많은 사람들이 찾아 소중하게 보살피고 의미를 되세길 수 있는 역사의 교육장으로 사랑받고 있다.

산성을 내려와 한참을 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가보았다. 차갑지만 알싸한 공기와 함께 상쾌함이 더해진다. 세상의 근심걱정을 모두 두고 올 수는 없었지만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만큼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무릉계곡과 두타산에도 조금씩 가을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유적명 : 동해(東海) 두타산성(

소재지 : 강원도 동해시 삼화로(삼화동) 산167

문화재 지정 : 비지정

  

 

 

 <참고자료>

 

『한국고고학전문사전 - 성곽·봉수편』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嶺東地方 高麗 城郭 硏究』 「단국대대학원 석사학위논문(김진형)」 2009. 12

『강원도 산성기행』  진용선著(집문당)  1996.

『東海 地表調査報告書』 「관동대박물관 · 동해문화원」 1997.

 <숲에on, 삼척 두타산성>    강원도민일보 2009년 12월 4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