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해안방어와 지역 행정을 함께한 산성형 읍성, 포항(浦項) 장기읍성(長鬐邑城)(2014.07.31)

필그림2 2014. 8. 5. 21:26

해안방어와 지역 행정을 함께한 산성형 읍성, 포항(浦項) 장기읍성(長鬐邑城)

- 옛 유배지의 흔적과 푸른 동해안의 풍광이 바라보이는 멋스러운 읍성 -

 

 

 

포항 장기면(옛 지행면)에 위치한 장기읍성(長鬐邑城)은 동악산(東岳山,해발 252m)에서 동쪽 해안으로 뻗은 능선에 쌓은 산성형 읍성으로 장기 들녘과 동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하여 해안선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축성한 동해안의 다른 읍성 및 진성들과 같이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주요 군사기지 역할을 겸하였다.

 

이곳 장기(長鬐)의 신라시대 이름은 양주(良州) 의창군(義昌郡)에 속한 지답현(只沓縣) 이었다. 이후 경덕왕대에 기립현(鬐立縣)으로 개칭되고, 고려시대에 의창군은 흥해군으로 기립현은 장기현으로 바뀌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현종(顯宗) 2년(1011)에 동해안의 청하(淸河),흥해(興海),영일(迎日),울주(蔚州), 장기(長鬐)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慶州府)의 속현(屬縣)으로 고려 공양왕대(恭讓王代)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하였으며, 조선 태종(太宗) 15년(1415)에 장기읍성의 지리적 중요성에 따라 현감(縣監)을 4품이상으로 높여 무신을 임명하여 지현사(知縣事)라 하였다가  이후 현감으로 고치고 그 밑에 훈도(訓導)를 두었다. 조선 예종 1년(1469)에 편찬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세조 5년(1460)에는 속진(屬鎭)으로 되었다가 동왕 12년(1467)에 속진(屬鎭)을 파하였다고 하였다. 고종 23년(1895)에 장기군(長鬐郡)으로 바뀌고 경주의 감포(甘浦),양남(陽南),양북(陽北)이 합병되고, 군수(郡守),좌수(座守)와 별감(別監) 2인의 관원을 두었다. 현재 포항시에 딸린 퇴락한 작은 면에 불과하지만 이렇듯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곳임은 분명하다.

 

<장기읍성과 장기면 읍내리>

 

조선시대 장기읍성의 축성 기록을 살펴보면 우선 단종 2년(1454)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성의 둘레가 174步이고 성안에 우물이 두 곳이 있다"라고 하였으며, 앞서 언급한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세종 21년(1439)에 돌로 쌓고 둘레가 3,664尺, 높이는 12尺이며 샘(泉)이 두 곳이고, 못(池)이 두 곳으로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고, 군창(軍倉)도 있다"라고 하였다. 중종 25년(1530)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은 석축이고 둘레가 2,980尺, 높이가 10尺으로 우물이 네 곳이고 못이 두 곳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구읍성이 현의 남쪽 2里에 있으며 돌로 쌓아 그 둘레가 468尺, 높이가 12尺이고 샘이 두 곳이다"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기록으로 볼 때 장기읍성은 여러대에 걸쳐 중축된 것으로 짐작되며, 현재의 위치에 읍성이 위치하기 이전에 현 남쪽 2리에 고읍성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성벽이 많이 허물어져 남아있는 성벽도 훼손의 우려가 커지자 1991년 당시 영일군(현 포항시)에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하여 학술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선 초기 연해읍성의 구조와 축성방법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판단하였다.

1999년 2월 성곽 100m를 복원한 것으로 시작하여 현재 북서쪽 성벽과 동쪽 성벽 일부를 제외하고 서문지와 치성을 포함한 상당 부분의 성벽을 복원하였으며, 또한 북문지와 주변 성벽 복원이 한창 진행중이다. 복원 과정에 있어서 부족한 예산과 함께 시공업체의 잦은 변경으로 일관성 없는 복원이 이루어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장기읍성 남동쪽 성벽과 치성>

 

성의 형태는 타원형으로 둘레가 1,440m이며 옹성을 갖춘 동,서,북 3개의 성문과 1개의 수구지, 12개의 치성, 그리고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인 음마지(飮馬池)가 있다. 성 안에는 현재 10여호의 민가가 있으며 교육기관이었던 장기향교와  동헌 터가 남아 있는데 동헌인 근민당(近民堂)은 정면 5칸 측면2칸의 팔짝지붕으로 1922년 지금의 면사무소 위치로 옮겨와 면사무소와 자재창고로 사용해오면서 원형이 훼손되어 1986년 복원하였다. 근민당 옆에는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이후 같은 해에 전국 주요 교통로에 일제히 세운 높이 127.5㎝, 너비 45㎝, 두께 18.7㎝의 대원군 척화비(斥和碑)도 잘 남아있다.

 

장기향교(長鬐鄕校)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현의 남쪽 2리에 처음으로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3년(1600)에 중건하고, 정조 9년(1785)에 현감 황익진(黃翼振,1784~1785)이 마산 구석곡(현 장기초등학교 동편)으로 이건하였다. 1785년 향교를 이건할 때 덕계(德溪) 임재화(林再華)는 대대로 살던 자기 집터를 희사하였다.

그 후 1931년에 군수 김영수(金永銖)가 향사(鄕士)들과 함께 읍성(邑城)내에 있던 구 객관(客館)을 수리하여 명륜당(明倫堂)을 만들고 대성전(大成殿)을 새로 건립하여 위패를 옮겨 안치하였다.

 

<복원중인 장기읍성 북문과 주변 성벽>

 

장기(長鬐)는 조선시대 유배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인물로는 우암 송시열로서 조선 숙종 1년(1675) 6월부터 4년간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679년 3월에 거제(巨濟)로 이배((移配)되었고, 이후 우암의 제자들이 이곳에 죽림서원(竹林書院)을 창건해 학문에 정진하였다. 우암이 유배생활을 하고 120여년이 지난 순조 1년(1801)에 다산 정약용이 220일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같은 해 11월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이외에도 100여명의 선비들이 유배되어 이곳에 높은 수준의 학문과 신문화를 전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 수도 서라벌(경주)을 침공하는 왜구를 방어한 군사기지였고, 이후 고려, 조선시대에도 해안방어 역할과 행정기능을 충실히 한 장기읍성과 장기 일대는 오늘날 산딸기 생산으로 유명하며 동해안 일출 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

무더운 여름날, 한적한 장기면 읍내리 면소재지 일대를 거닐며 역사유적을 답사하고 장기읍성에 올라 누렇게 알곡이 여무는 드넓은 장기 들녘과 푸른 동해를 바라보며 최근 일상에서의 아쉬움과 반성, 그리고 새로운 나날들을 위한 호연지기를 느껴보았다.

 

 

유적명 : 포항 장기읍성(浦項 長鬐邑城)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 127-2번지 외

문화재 지정 : 사적 제386호 (1994.03.17)

※ (영일 장기읍성 → 포항 장기읍성)으로 명칭변경. (2011.07.28 고시)


 

<참고자료>

 

『長鬐邑城 地表調査報告書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991

『浦項 迎日 長鬐邑城 東門址 遺蹟』  「성림문화재연구원」 2008

 포항시 장기면 홈페이지(http://janggi.ipoha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