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충주(忠州) 대림산성(大林山城)(2014.10.24)

필그림2 2014. 10. 24. 23:31

충주(忠州) 대림산성(大林山城)

- 고려말 치열했던 대몽항쟁의 역사현장에서 전작권없는 대한민국 현실을 생각해 본다 -

 

 

 

오늘 이른 아침부터 TV와 인터넷 뉴스에서 "전시작전통제권 무기한 재연기"라는 기가막힌 소식을 접하며 다시한번 대한민국 대통령과 그 권력자들의 무능함과 무책임 그리고 비상식적인 행태에 분노를 느끼게 했다.

한민구 국방장관과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은 23일(미국 현지시간, 한국시간 24일) 미 국방부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2015년 12월 1일로 예정됐던 전시작전통제권(이하 전작권) 전환 시기를 재연기하기로 합의했다. 이번에도 한국 측이 미국에 재연기를 요청한 것이다.

청와대는 24일 오전까지도 전작권 환수 공약 파기에 대해 침묵하다가 곳곳에서 비판이 제기되자 오후 브리핑에서 "전작권 전환은 그 어떤 경우에도 계획된 전환시기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공약의 철저한 이행보다는 국가 안위라는 현실적 관점에서 냉철하게 바라봐야 할 사안"이라고 했다. 그리고 새누리당은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실험으로 한반도의 안보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했다. 또한 "전작권은 전시에 대비한 작전인 동시에 전쟁을 막기 위한 억제 기능도 해야 한다" 라고 말했다.

 

정부와 여당의 전작권 재연기가 아직 우리가 북한의 위협에 대응할 만한 독자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세계 15위의 경제력과 세계 12위의 국방비(약 317억 달러, 35조6,650억원)를 사용하고 있는 국가이다. 국민총생산을 포함해 남북한 차이는 30배내지 100배라 하고 국방비도 북한(북한 국방예산은 9억7,340만달러(988억원)의 35배 차이가 난다. 글로벌파이어파워(www.globalfirepower.com) 사이트 기준으로 한국 군사력은 세계 8위이고 북한은 29위 이다.

이러한 한국군의 능력이 어떠한 통계와 분석에도 북한군에 뒤쳐지는 것이 없는데 군사력이 북한에 비해 열세라며 전작권을 포기하거나 연기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일부 군사전문가들은 한국 군대가 기강 해이와 각종 비리, 추태로 얼룩져 있으며, 겉으로는 안보를 위해 한미동맹을 한다고 하지만 뒤로는 돈이 목적인 보수수구세력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례로 지난 4월 윤일병 구타 사망사고 및 6월 GOP 총기난사 사건과 같은 폐쇄적이고 사회적 병리 현상이 심한 병영문화도 군의 기강 해이에 한 몫을 했다. 병영문화 혁신위원 10여명이 지난 10월 6일 평택 해군 2함대에서 고속정을 타고 인천해역방어사령부로 향할 때 인천대교 부근에서 고속정 엔진이 멈춰 30~40분간 바다에 떠 있어야 했던 일, 해병대 상륙용 돌격장갑차(KAAV)가 기관총에도 뚫릴 만큼 노후화가 심각하다는 조사 결과, 육군 특수전사령부 방탄복 2,000벌이 북한군 소총에 완전히 관통되는 품질 불량의 제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구입한 사실, 탐사 인명 구조를 위한 첨단 구조함인 통영함에 쓸 2억원짜리 음파탐지기를 41억원에 사게된 사례등 한국 군대의 어두운 면과 방위사업청의 비리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여 엄청난 국방비를 쓰고 있는데 군장비는 노후되었고, 상당한 세금이 군 간부 주머니에 흘러들러가고, 엉터리 무기와 불량 군수품 만드는 방산업체로 넘어가고 있다. 또한 군 안팎으로 국가안보를 위장한 자기영달을 위해 미국에 잘 보이거나 사업거리를 찾는 기회주의자가 많다고 한다. 참여정부 때 전작권 전환을 강력히 반대하는 성명서를 낸 김상태 당시 성우회 부회장이자 전 공군참모총장은 한국 공군의 기밀을 빼내서 넘긴 대가로 미국 록히드마틴사로 부터 25억원의 대가를 받았다. 김종대 한국미래발전연구원 이사이자 <디펜스21플러스>편집장의 말에 따르면 한 전직 미 대사관 관계자는 "미 국방정보국(DIA) 관계자에게 한국군 장교들이 면담을 하려고 아우성인데, 만나보면 한국군 내부정보를 구해오거나 자기 상관을 헐뜯는 말도 서슴지 않아 놀랄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1950년 7월 14일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한테 이양한다는 서한을 보내면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미군으로 넘어갔다. 1954년 11월 17일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작전지휘권'은 '작전통제권'으로 용어가 대체되었다.

박정희 정권인 1968년 '1.21 청와대 습격 사태'에 대한 대응면에서 한미간 이견이 생겨 작전통제권 환수를 요구하기도 했으며, 이후 작전통제권을 되찾기 위한 시도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다시 시도했다. 1987년 민주정의당(새누리당 전신)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작전통제권 환수'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고, 1994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이 작전통제권의 일부인 '평시 작전통제권(평작권)'을 미군으로부터 돌려받았다. 당시 한국 수구와 보수층의 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여론등을 고려해 작전통제권을 '평시'와 '전시'로 구분하는 개념 분리가 이뤄졌다. 전작권은 참여정부 때인 2005년 10월 국군의날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권국가로서 전작권을 반드시 가져와야 한다고 천명했고 국방부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방계혁 2020' 계획을 수립했었다. 이때 가장 큰 전제는 국방예산을 향후 15년간 연 8%이상 증가시킨다는 것이었다.

2006년 9월 16일 한미정상회담에서 전작권을 한국군으로의 전환이 합의되었고 이듬해 2월 23일에 당시 김장수 국방부 장관과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부 장관이 만나 전환 일자를 2012년 4월 17일로 합의했으며, 참여정부에서는 국방부 예산을 꾸준히 연 8% 이상 늘렸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전환시기를 2015년 12월로 연기했고, 4% 내외의 국방예산만 늘렸다. 박근혜 대통령도 2012년 대선 후보 시절 "전작권을 (2015년)예정대로 전환받겠다"고 공약했다. 이것이 중도층 표를 얻기위한 선거전략이라는 분석도 있었지만, 이미 한차례 연기한 바 있는데다가 미국도 전작권 전환을 원하고 있어 현실적으로도 재연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 국방을 의존하려는 국내 수구보수세력과 대중국 방어선으로 한국을 활용하고자 한 미국의 요구가 맞물렸으며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 취임에 맞춰 3차 북한 핵실험에 따라 전작권 전환이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지만, 이는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정부와 여당 그리고 군수뇌부의 자신감과 책임의식을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정부와 청와대가 전작권 환수를 사실상 무기 연기한 것은 현재 국민의 안보 불안 심리를 더욱 자극할 수 있다. 그리고 전작권 환수를 2020년 중반으로 막연히 상정한다는 것은 전작권 환수를 아예 포기하는 것이거나 자기 나라의 안보를 스스로 책임지지 않는 나라로서 군사주권이 없는 것은 매우 비정상적이고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통일대박론" 또한 전작권의 완전한 환수가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한국은 북한의 도발을 억지할 수 있는 경제력과 군사력 그리고 국제적 위상을 갖추고 있기에 전작권을 환수하여 행사할 수 있는 자원과 역량이 충분하다. 끝으로 전작권을 보유하고 있을 때만이 우리가 고유한 독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자신감과 책임의식을 통하여 당당하게 우리 입장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전시작전통제권 무기한 연기라는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소식에 고려말 치열한 대몽항쟁의 현장이던 충주 대림산성(大林山城)으로 가는 답사길이 어느때 보다도 슬프고 무거웠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IC를 이용하여 건국대 글로컬캠퍼스를 지나 달천(達川)을 오른쪽으로 끼고 약 20여분을 가면 대림산성이 있는 살미면 향산리에 이른다.

 

충주는 남쪽 괴산에서 시작한 달천과 동서를 관류하는 남한강이 탄금대에서 합류하고, 구룡천,요도천,원곡천,한포천,대전천 등 많은 지류가 남한강에 흘러 들러간다. 충주의 동남쪽은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서쪽은 차령산맥으로 둘러쌓인 그 중앙에 위치한 분지이다. 이렇듯 충주지역은 수륙교통의 요충지이자 풍부한 철 생산지이기 때문에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으로써 삼국시대 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방유적이 축조되었다. 충주지역에서 확인되는 성곽은 봉현성,충주읍성,충주영액,용관동산성,충주산성(남산성),탄금대토성,장미산성,보련산성,대림산성,한훤령산성,마골재산성,견학리토성,문주리산성,장태산성,호암동토성 등 약 15개소가 있다.

 

대림산성은 충주의 진산인 대림산(大林山, 487.5m)의 능선을 따라 둘레 4,906m로 쌓은 포곡식 또는 고로봉식의 토석혼축 산성이다. 산성의 평면형태는 동서로 부정형의 긴 타원형이고 서쪽이 가장 낮아 주 출입문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림산 정상에는 조선 후기까지 사용된 "대림산봉수대"가 남아있다. 남쪽 성벽의 일부분에서는 品자형 축성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후대에 개보수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성벽에는  폭과 깊이가 15㎝인 6개소의 수직홈이 확인된다. 성벽의 높이는 4~6m이고, 4개소의 성문과 암문이 있으며, 길게 돌출된 10여 곳의 능선에는 치성(또는 용도)을 쌓았다. 성 내부를 따라 4~5m 폭의 내환도를 설치하였으며 망루와 장대를 비롯한 건물지와 우물터가 곳곳에서 확인 되었다.1996년 상명대박물관에 의한 지표조사에서 인화문토기편, 당초문평와당, 고배뚜껑편, 고려청자편, 어골문와편 등이 발견되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까지 경영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특히 13세기를 전후한 상감청자편과 어골문기와편이 많이 발견되고 있어 이곳이 충주지역 대몽항쟁의 중심지인 충주산성(忠州山成)일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7세기 후반경에 유행한 인화문토기와 단판선조문기와편 등의 유물들로 보아서 신라 문무왕 13년(673) 8월에 설치한 국원성(國原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대림산성은 규모면에서 상당히 크고, 방어하기 유리한 지형에 축조되어 있다. 남쪽과 동쪽, 북쪽은 능선 밖으로 가파른 산기슭이며, 서쪽은 수직의 절벽사이로 트여있으며 성내 계곡의 물길이 관통하고 성내 주 출입구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가는 달천과 달천변의 구 19번국도(유주막로) 주변은 당시부터 이용된 교통로로 추정된다. 이 길은 죽령을 넘어 월악산을 지나 충주로 들어오는 길과 문경새재를 넘어 괴산에서 충주로 들어오는 길이 합해지는 길목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을 것이다. 대림산성에서 북쪽으로는 멀리 장미산성이 바라다보이고, 동쪽으로 남산성(충주산성)이 가까이 위치하고, 북서쪽으로 용관동산성 등이 있다.

 

대림산성은 규모와 입지 조건, 출토유물 등을 통하여 고려시대 이전에 축성되었으며, 이후 대몽항쟁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이와 관련된 옛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에서 산성 또는 내부 봉수대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輿覽)』권14 충청도 충주목 「고적조」에 "대림산성은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638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다. 지금은 폐하였다. 대림산은 고을 남쪽 10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대림산봉수는 남쪽으로 연풍현(延豊縣) 주정산(周井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마산(馬山)에 응한다." 라고 산성과 봉수에 대한 간략한 기록을 남겼다. 18~19세기 충청도 각 읍지를 모아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는 "대림산봉수는 고을 남쪽 10리에 있고, 남쪽으로 연풍현 주정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마산에 응한다. 별장 1명, 감관 5명, 군인 100명이 상주하고 있다."라고 기록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면 대림산성은 거의 이용되지 않고 봉수만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간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충주군조에는 "충주면 호암리, 살미면 향산리 성지는 대림산성이라 짐작되는 것의 일부로서, 천험의 암벽을 이용한 둘레 약 1,800칸의 석성지로 거의 붕괴되어 도처에 기와편이 산재해 있다. 봉수는 대림산봉수라 짐작되는 원형의 석루 2단이 있다. 2단을 합한 현재 높이는 30척이고 규모가 크다."라고 붕괴된 석축성의 규모 및 현황과 봉수대에 대한 비교적 구체적인 기록을 남겼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고종40년(1253) 10월 충주에 야굴(也窟)이 이끈 몽골의 대군이 쳐들어 왔을 때 충주산성(또는 충주성) 방호별감(防護別監) 김윤후(金允侯)가 관민과 함께 70일이 넘는 기간 동안 몽골의 대군을 맞아 적을 물리쳤다고 했다. 충주지역 대몽항쟁의 중심지였던 충주산성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충주산성(남산성 또는 금봉산성)이 아닌 이곳 대림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학계와 향토사학계에서 커지고 있다. 옛 기록들에 대림산이 충주의 진산으로 나오고, 남산성은 둘레가 1,145m이고 정상에 쌓은 테뫼식산성이지만, 대림산성은 4,906m에 포곡식산성으로 우물이 있어 대군을 맞아 70여일 간 장기적으로 항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대림산성에서 13세기 고려시대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대림산성 답사는 달천강변의 단월동과 향산리 경계지점 창골 버스정류장에서 산성 내부로 들어가는 마을길을 따라가다 돌무지 입구(추정 서문지)에서 축성의 흔적이 희미한 우측의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10여분 오르면 남쪽 능선에 이른다. 통신탑 주변으로 잘 남아있는 성벽(치성)을 확인 할 수 있으며, 남아있는 일부 성벽에서 수직홈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종주바위를 지나 평탄한 남문지와 치성이 있는 동문지를 지나면 봉수대가 남아있는 정상에 오른다. 북쪽으로 충주시내가 훤히 바라다보이고 동쪽으로는 충주산성(남산성)이 마주하고 있다. 정상에서 북문지에 이르는 길은 서쪽으로 달천이 내려다 보이고 석축의 흔적이 거의 없는 완만한 능선이다. 석축의 흔적이 남아있는 북문지 주변에는 치성(용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북문지에서 다시 서문지로 내려오는 북쪽 성벽은 매우 가파르지만 부분적으로 석축의 흔적이 잘 남아있었다.

 

대림산성을 일주하는 등산로가 아직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아 조금 힘들었다. 그리고 가을이 한창이라 등산로와 허물어진 성벽 사이로 독사와 말벌(장수말벌)이 많아 자칫 큰일을 당할 뻔 했다. 대림산이 충주의 진산이지만 시내와 접근거리가 멀어 충주산성이 있는 남산에 비해 찾는 사람이 적고 관리가 소홀했다. 따라서 충주지역 대몽항쟁의 역사적인 유적지가 소홀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에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오늘 대한민국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무기한 연기"라는 암울한 소식에 우리 선조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끝까지 지켜내고자 했던 이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다시한번 깊이 생각하고 반성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유적명 : 대림산성(大林山城)

소재지 : 충북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 산45

문화재 지정 : 충북 기념물 제110호 (1999. 12. 31 지정)

 

 

<참고자료>

 

『충주 대림산성 정밀지표조사보고서』  「상명대학교 박물관」 1997

『한국 중부내륙권 산성군의 기초자료 조사보고서』  「충청북도, 한국성곽학회」 2007. 3. 30

『중원의 산성』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08. 11

『高麗 對蒙抗爭期의 築城과 入保 』  「충북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김호준)」 2012

新羅 國原小京과 西原小京의 防禦施設 變遷』  「충북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노병식)」 2014. 8

『한.중 중원지역 제철문화와 고대 도시 - 중원출토유물보관센터 완공 기념 국제학술대회 자료집』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14. 10. 22

『월간 문화재사랑(2014. 8월호) - 한반도의 역사가 교차된 중원문화의 중심지 "충주"』  「문화재청」 2014. 9

< 전시작전통제권 재연기>관련 2014. 10. 24日字 각종 신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