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울산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성(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城)(2014.02.22)

필그림2 2014. 2. 24. 21:16

울산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성(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城)

-조선시대 경상좌도지역의 육군 본영(사령부)-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성(이하 경상좌도병영성 또는 병영성)은 조선 태종17년(1417) 축조된 467년 동안 낙동강 동쪽의 경상좌도 지역을 방어하던 병마절도사의 사령부이다. 행정구역상 울산광역시 중구 동동,서동,남외동에 걸쳐있는 석축의 포곡식 평산성이다. 울산 북서쪽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와 울주군 두서면의 치술령(765m)에서 뻗어 내린 함월산(200m)을 지나 태화강의 지류인 동천에 닿기 직전 말단 구릉에 위치해 있다. 동쪽은 경주 외동읍에서 시작하는 동천이 흐르고, 남쪽 약 2.5km 지점에는 태화강이 동쪽 미포만으로 흘러들어간다.

경상좌도병영성은 울산에서 남쪽 동래부 기장과 연결되고 언양을 지나거나 현재 7번국도를 따라 경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경주부를 거쳐 경산,하양,대구 등 경북내륙과 장기,흥해등 경북동해안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경상좌도병영이 있던 울산은 고려초기에 호족 박윤웅(朴允雄)이 왕건을 도와 고려건국에 기여하여 태조23년(940) 흥려부(興麗府)로 개칭되고, 고려 성종14년(995)에 공화현(恭化縣)으로 격하된 후 현종9년(1018)에는 헌양현(巘陽縣),기장현(機長縣),동래현(東萊縣)을 통합하여 울주(蔚州)로 확대 개편되었다. 조선 태조6년(1397)에는 울산에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가 지주사(知奏使)를 겸하게 했다. 태종13년(1413)에는 울산군(蔚山郡)으로 개칭하여 지군사(知郡事)를 두었으며 , 태종17년(1417)에 경주 모화(毛火)에 있던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영(慶尙左道兵馬都節制使營, 관문성 또는 기박산성에 있었다고 추정됨)을 이곳으로 옮겨 병마도절제사가 지군사를 겸하였다. 이후 세종8년(1426)에 한동안 좌병영이 혁파되고 진이 설치되었으며, 우도병영과 합쳐 창원 합포에 경상도병영이 설치되었다가 세종19년(1437)에 경상도병영이 분리되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면서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으로 복귀되었다. 이때에는 병마도절제사가 도호부사를 겸하였다. 그러나 같은해에 도호부는 폐지되고 군이 설치되면서 군수가 별도로 파견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32년(1599)에 울산군이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병마절도사가 도호부사를 겸하였고, 광해군9년(1617)에는 별도의 도호부사가 파견되었다. 고종32년(1895)에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울산도호부가 울산군으로 개칭되었고, 군사체계 개편시 각도의 병영 및 진영, 진보가 폐지될 때 함께 폐지되었으나, 이곳 병영 출신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광무11년(1907)까지 군대가 주둔하며 조련하는 광경을 보았으며 군대해산식을 목격하였다고 했다.

 

경상좌도병영은 원래 경주 모화지역에 있던 것을 조선 태종17년(1417)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석성으로 쌓았다. 처음 축조 당시에는 성벽과 여장 등의 기본시설만 갖추었다가 세종때 옹성,적대,해자 등을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있고, 문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문종1년(1451) 9월5일 "주위가 3,732척, 높이 8척, 여장 높이 3척, 적대 21개소 내에 아직 쌓지 않은 것이 3개소이고, 문이 4개소인데 옹성이 있으며, 여장 908개, 성내 우물 1개소, 샘이 3개소, 해자는 혹은 파고 혹은 아직 파지 않았다" 라고 기록하였다. 이후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대동지지(1864년)에도 비슷하거나 약간 추가된 기록을 남겼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군창(軍倉), 동융루(董戎樓), 선위각(宣威閣), 조련고(組練庫) 등 성내 시설물의 기록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영조33년(1757)에서  영조65년(1765)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좌병영지도에는 둑당(纛堂, 纛神에게 제사 지내는 곳), 선위각(宣威閣,객사), 제오헌(制鰲軒,절도사집무실), 매죽당(梅竹堂), 내아(內衙, 수령처소), 해조당(解條堂), 진해루(鎭海樓, 관아와 객사로 출입하던 시설), 백화당(百和堂, 군관이 거처하던 곳), 찬주헌(贊籌軒), 심약청(審藥廳, 약방), 영리청(營吏廳, 아전 사무실), 진무청(鎭撫廳), 별군관청(別軍官廳, 하급무관이 거처하던 곳), 기고관청(旗鼓官廳), 장군청(將軍廳), 여러 창고(倉庫) 등이 상세하게 그려져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경상좌도병영성을 차지하면서 내부 관아시설이 파괴되고 성벽의 훼손이 일어났다. 특히 정유재란 때인 선조30년(1597) 10월~12월 하순간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총병력 1만6천명을 동원하여 울산읍성에서 동쪽으로 1km 떨어진 도산을 중심으로 왜성을 쌓았는데 이때 울산읍성과 병영성의 돌을 빼어다가 쌓으면서 성벽 대부분이 훼손되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기단석 1~2단 정도만 잔존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병영성은 복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피폐한 채로 남아버렸다. 앞서 언급한 영조때 간행한 여지도서(1757~1765)에 주요건물의 배치와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영조 이전의 어느 시점에 성벽과 관아의 복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철종10년(1859) 병사(兵使) 이원희(李元熙)가 남문 밖에 외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일부에 대한 증축공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경상좌도병영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부분적으로 몇차례 이루어졌다. 1985년 동아대박물관에 의해 체성 동남쪽의 일부 구간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어 체성과 치성을 확인하였으며, 1999년에는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북문지와 주변 체성 및 해자를 발굴하였고, 2002년~2003년에는 울산문화재연구원이 북문지 부근의 체성과 해자를 비롯해 성벽 아래층에서 청동기시대와 삼한시대 주거지를 조사하였다. 또한 병영초등학교 내 다목적교실 신축예정부지를 2002년 6월부터 10월까지 울산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하여 병영성 관아와 객사를 출입하던 정문인 진해루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조사되었다. 이후 2009년 3얼 19일부터 5월 21일까지 새로 선정된 다목적교실 대상부지에 대한 시굴조사에서 하층에서 건물지 1개소와 구상유구 2기, 상층에서 건물지 3개소와 적석유구 1기가 확인되었다.

 

최근 울산광역시 중구가 병영성 정비 활용 방안을 내놓았다. 중구 소재 6개 성곽의 역사적 실체 고증을 통한 고유한 가치 규명으로 "성곽도시 중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성곽과 성곽을 연결하는 옛길, 탐방로 등을 조성하고 스토리텔링 자원을 발굴·융합함으로써 "역사도시 중구"의 문화 역량을 강화하고자 한다.

성곽 및 관련 시설의 보존 및 정비를 우선 고려하여 병영성 축성 600주년인 2017년을 기점으로 단기 및 중장기 사업으로 구분해 시행하고 단기사업의 완성년도인 2017년에는 축제, 심포지엄 개최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할 예정이다.

올해부터 2017년까지 추진하는 단기사업에는 북서구간 성벽 수리 및 정비, 동문 복원과 해자 정비, 둑당 복원과 독제 개발, 성내 탐방로 정비 등이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남서구간 성벽 수리 및 정비, 북문 및 서문 복원, 진해루 복원과 장대 복원, 연지 복원과 주차장 조성, 전시관 건립과 전통가로 조성 등이 있다.

 

경상좌도병영성을 비롯한 중구 소재 6개 성곽의 역사적 실체 고증을 통한 "성곽도시 중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산업도시 울산"에서 "역사도시 울산"으로의 이미지 확대와 변화에 울산의 역동성을 다시 확인해볼 수 있을것 같아 기대가 되어진다.

 

유적명 :  울산 경상좌도병영성(蔚山 慶尙左道兵營城)

울산 중구  서동 149-8외

사적  제320호 (지정일 1987.07.18)

 

 

<참고자료>

 

울산 중구, 성(城) 정비활용계획수립 학술용역 최종 보고회   부울경뉴스 2014. 2. 14

중구, 6개 성곽 연결 '케슬시티 중구' 청사진 내놔   뉴시스 2014. 2. 14

蔚山倭城.兵營城址  東亞大學敎博物館 古跡調査報告書 第十二冊  1986

경상좌병영성 건물지-울산 서동 311번지 병영초등학교 다목적교실부지 발굴조사 보고서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  2010

경상좌병영성-북동구간 성곽정비사업구역 내 발굴조사 보고서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