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의 추억

강세황 탄생 300돌 특별전-18세기 남종화의 거두 표암, 벼락출세 까닭은...(한겨레 2013.5.5 외)

필그림2 2013. 5. 13. 14:43

18세기 남종화의 거두 표암, 벼락출세 까닭은

강세황 탄생 300돌 특별전 잇따라

친형의 부정행위·역모 탓 재야 떠돌다 환갑에 벼슬
‘시서화 삼절’ 극찬 있지만 ‘평범한 문인화가’ 평가도

 

71세의 강세황은 만년에야 벼슬아치가 된 자신을 상징하듯, 평복에 관모를 쓴 기묘한 모습의 자화상(보물 제590-1호)을 남겼다 [자료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표암 강세황(1713~1791) 탄생 300돌을 기념하여 괄목할 만한 전시 두 개가 잇따라 열린다. 간송미술관에서 열리는 ‘표암과 조선남종화파전’(5월12~26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강세황: 예술로 꽃피운 조선 지식인의 삶’(6월25일~8월25일).

 

강세황을 제대로 보려면 두 전시를 모두 보아야 한다. 간송미술관이 진경산수를 높이 쳐 그것과 크게 다른 표암을 탐탁지 않아하는 반면, 한달 뒤에 특별전을 여는 국립중앙박물관은 표암을 ‘18세기 예원의 총수’라며 그의 진면목을 보이겠다고 벼르기 때문이다. 그만큼 표암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간송에서는 표암의 작품 18점을 중심으로 그보다 앞선 심사정, 이인상, 최북과 뒤를 잇는 원명유, 김홍도, 이인문, 김득신, 신윤복, 이유신, 임희지, 신위 등 조선남종화가 20여명의 작품 70여점을 두루 선보인다. 간송이 보유한 표암의 작품 90%를 내놓았다는데, 눈에 띄는 작품은 적은 편이다. 화보에 자주 등장하는 평범한 구도의 작품들이며 화격도 그리 높지 않아 내세울 게 없다.

 

반면 중앙박물관은 <자화상>(사진) <영통동구도> <무> 등 교과서에 나오는 표암의 대표작을 포함해 40여 작품을 선보이는데, 표암과 인연이 있는 동시대 문인화가들의 작품과 그에 대한 표암의 화평을 함께 전시한다. 간송이 닥닥 긁어낸 반면, 중앙박물관은 골라서 낸 만큼 한쪽만의 전시로 표암의 전모를 가늠하긴 힘들다.

 

노인관수(老人觀水: 노인이 물을 바라보다)

단풍잎이 드문드문 달려 있는 나무가 계절의 무상함을, 홀로 앉은 노인이 쓸쓸함을 드러낸다. ‘밀려난 자들의 그림남종문인화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표암 강세황의노인관수(老人觀水). 바위 틈으로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노인이 표암 자신을 상징하는 듯하다. [자료 사진 = 간송미술관]

 

표암은 환갑 되던 해(1773년)에 영릉 참봉(종9품)으로 벼슬에 나아가, 정조가 임금에 오른 해(1776년)에 동부승지로 임명된다. 71살에는 정2품 지중추부사에 올라 ‘대한민국 학술원’에 해당하는 기로소에 들어간다. 10년 만에 이뤄진 벼락출세이니 곡절이 있을 법하다.

 

표암은 애초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조부와 부친이 모두 예조판서를 지낸 명문가이지만 그의 형 강세윤이 과거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다 적발돼 처벌을 받았고, 영조 정권을 무너뜨리려던 반란 때는 이천부사로 있으면서 반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은 까닭이다. 그는 자포자기하여 처가가 있는 안산에 은거하게 되는데, 이때 한창 잘나가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풍에 강한 거부감을 느껴 명 문화의 진정한 계승을 명분으로 남종문인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가 50살 무렵, 정국을 주도하던 홍봉한의 눈에 띄게 된다.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덜기 위해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남소론계 표암을 주목한 것이다. 홍봉한은 표암을 “시서화 삼절”이라며 영조에게 추천했고, 화단을 이끌던 겸재가 타계하자 새 인물을 물색하던 영조가 10여년 동안 지켜보다가 그를 받아들였다. 영조는 1776년 노인을 위한 특별과거인 기구과를 만들어 표암을 장원으로 뽑아 당일에 동부승지 벼슬을 주었다. 그해 영조가 승하하고 뒤를 이은 정조는 1778년 표암에게 정시문과를 보게 하여 장원으로 뽑아 종2품으로 품계를 올려준다.

 

30여년 재야에서 시서화를 갈고닦은데다 두 국왕의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되니 당대 시화단의 총수가 된 것은 당연해 보인다. 당대 중국에서는 “글은 한퇴지요, 글씨는 왕희지, 그림은 고개지, 사람됨은 두목지인데, 광지(강세황의 자)는 이를 겸했다”라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정약용은 그의 대나무 그림을 두고 “죽화일 뿐 어찌 화죽이랴”라며 대나무의 전정한 모습을 옮긴 것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200여년 전 상반된 평가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는 셈이다.

 

표암이 당대 시화단 네트워크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은 인정된다. 두 전시는 모두 그러한 점을 부각한다. 표암의 화평을 두고 ‘높은 감식안’ 또는 ‘주례사 비평’이라고 엇갈리기는 하지만…. 그가 청나라에 동지사로 파견돼 젊은 옹방강, 유용 등과 교유함으로써 훗날 추사와 연결고리 역할을 한 점은 모두 높이 쳐준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등록 : 2013.05.05 20:13>

 

 

 

환갑을 지나서야 빛 본 화필... 18세기 문인화의 절창

표암 강세황 탄신 300주년 … 간송미술관·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그는 밀려난 이들의 대변자였다. 명문가 태생이었지만 출세길이 막혀 그림 그리는 데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호구지책으로 농사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화평을 써주면서 수 십 년간 연마한 실력은 환갑이 돼서야 세상에 드날릴 수 있었다. 60세에 처음 벼슬길에 나섰고, 예원(藝苑·예술계)의 영수로 18년을 더 살았다. 후대는 그를 시서화 삼절(三節)이자, 단원(檀園) 김홍도(1745~1806?)의 스승으로 기억한다.

표암(豹菴) 강세황(1713∼91) 얘기다. 표암이 올해로 탄신 300주년을 맞았다. 그를 기리는 여러 행사 가운데 첫 단추는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끼운다.
12일부터 여는 ‘표암과 조선남종화파전’이다. 표암을 중심으로 동년배인 원교(圓嶠) 이광사(1705∼77), 호생관(毫生館) 최북(1712∼86), 제자 세대로 단원 김홍도, 긍재(兢齋) 김득신(1754∼1822) 등 20명의 70여 점을 내놓는다.

다음 달 25일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서 ‘강세황: 예술로 꽃피운 조선 지식인의 삶’전을 연다. 간송의 전시가 표암과 그의 시대를 일별하는 입문 성격이라면,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는 표암의 자화상,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이명기가 그린 표암 초상화, 서양화풍을 실험한 표암의 산수화 ‘영통동구(靈通洞口)’ 등 이 박물관이 갖고 있는 표암 관련 대표작을 한껏 뽐내는 특별전이다. 또한 표암의 묘가 있는 충북 진천군에서는 한국미술사학회 주관으로 7월 초 학술대회를 연다.

 

벼슬길 막혀 농사 짓기도... 뒤늦게 출세

 

비범한 출생, 젊은 날의 역경, 강세황도 이런 길을 밟았다. 증조부는 영의정을 지냈고, 종조부는 현종의 부마(임금의 사위)였다. 명문가의 가세는 그의 대에 기울었다. 맏형이 과거 부정을 저지른 데 이어 역모에 가담했다. 입신(立身)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체면을 유지하려면 문인화가로 살아가는 길 뿐. 생계가 어려워 32세에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낙향했고, 여기서 환갑이 될 때까지 농사 지으며 서화를 수련했다.

인생의 전기가 된 사건은 임오화변(壬午禍變), 즉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한 일이다. 그날은 표암의 50세 생일, 소식을 들은 표암은 생일상에 고기를 쓰지 않고 소찬만 올리라 했으며 평생 생일을 그렇게 지냈다.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 이런 표암을 눈여겨봤고, 그의 벼슬길을 열어줬다.

정조 또한 그를 배려했다. 아끼는 화원 단원의 스승이자, 부친에 절의를 지킨 이여서다. 표암이 정조 시대 예술계를 주도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일흔이 넘은 표암은 청 건륭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행단으로 북경을 방문, 후에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와 어울리는 고증학파를 알게 되고 서양 문물도 경험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겸재에서 추사로 이어지는 교량 역할을 하게 된다.

 

표암 강세황의 ‘소림묘옥(성긴 숲 속의 띠풀 집)’.56.5×122.0㎝ [자료사진 = 간송미술관]

 

남종화추종...쓸쓸한 분위기 그림 그려

 

표암은 비슷한 이력을 가진 6세 연상의 현재(玄齋) 심사정(1707∼69)에게 공감한 듯하다. 심사정 역시 조부의 과거 부정과 역모로 벼슬길이 막힌 문인화가였다. 진경산수화풍이 한창이던 시대에 태어난 표암이 조선남종화를 추종하게 된 까닭이다.

쓸쓸한 문인화가의 눈길 머무는 곳에는 산수(山水)도, 난죽(蘭竹)도 쓸쓸하다. 이것이 조선남종화의 정서다. 조선남종화가 계승한 것은 명대의 남종문인화, 원말 사대가를 계승한 재야 문인화가들의 사의적 화풍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표암일까.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연구실장은 “지금 우리가 처한 입장과 비슷해서”라고 운을 뗐다. “만족의 환희, 실망의 고통, 예술이란 크게 이 두 가지 감정에 공감하는 표현인 경우가 많다. 표암의 경우 후자다. 처한 상황이나, 그림에서 풍기는 쓸쓸한 정조가 그렇다. 성공한 이들보다 실패한 이들이 더 많은 것이 우리의 세상이다. 표암의 그림이 더욱 큰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간송미술관의 전시는 26일까지, 오전 10시∼오후 6시. 02-762-0442.

중앙일보 권영근 기자 <입력 2013.05.03 01:01 / 수정 2013.05.03 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