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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 47년만에 해체..사리장엄구 수습(연합뉴스 2013.04.02 外)

필그림2 2013. 4. 3. 12:47

석가탑 47년만에 해체..사리장엄구 수습(종합)

2층 옥개석 해체, 상반기에 기단까지 해체

 


국보 21호인 불국사 석가탑(삼층석탑)이 47년 만에 속살을 드러냈다.
석가탑 해체 수리 복원 사업을 진행 중인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석조문화재보수정비사업단은 2일 오후 2시 현장에서 변영섭 문화재청장과 불국사 주지 성타스님, 김상준 경주시 부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2층 옥개석(屋蓋石. 지붕처럼 덮은 돌)을 해체하고 그 아래 몸돌인 탑신(塔身)의 사리를 모시기 위한 공간인 사리공(舍利孔)을 노출했다.

 

 

 

 

 

석가탑이 사리공(가로세로 각각 41㎝, 깊이 19㎝)을 노출하기는 1966년 이후 처음이다.
옥개석은 불국사 측에서 준비한 간단한
불교의식을 치른 뒤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석장 기능보유자인 이의상 씨의 지휘 아래 크레인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해체됐다.
옥개석이 분리되자 그 아래 탑 몸돌 정중앙에서는 사각형으로 판 사리공이 노출되고, 그 안에서는 1966년 해체 수리 완료 때 다시 봉안한 사리장엄구가 보자기에 덮인 채 모습을 드러냈다.
사리공이 드러나자 조사단에서는 곧바로 유리판을 그 위에 덮어 훼손을 대비하는 한편, 그 주변으로 비닐 장막을 덮어씌우고 습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사업단 배병선 단장은 "사리장엄이 오랜 시간 봉안됐다가 갑작스럽게 외부로 노출되면 훼손될 우려가 있는데 따른 조치"라면서 "사리장엄 대부분은 1966년에 새로 봉안한 것이기는 하지만 일부는 원래의 성보문화재를 봉안했다"고 말했다.
보자기를 걷어내자 철제 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함을 걷어내자 그 안에서는 1966년 해체 수리복원 당시 복제해 넣은 금동 사리외함이 약 반세기 만에 노출됐다. 사리장엄구는 그 내부에 봉안된 상태였다. 사리공의 바닥과 네 공간에는 향나무로 보이는 나무껍질로 가득 찬 상태였다.
들어낸 사리장엄구는 곧바로 불국사 주지실로 옮겨져 사리를 친견하는 의식이 진행됐다. 사리 친견에는 성타스님과 변 청장 등이 참여했다.

석가탑은 일부 석재에서 균열 등이 발견돼 2010년 12월16일
문화재위원회가 해체 보수가 결정했다. 지난해 9월 해체를 시작해 그 해 12월에는 상륜부(上輪部)가 모두 해체된 상태이며, 이날 현재 탑신부 해체가 진행 중이다.
석가탑은 1966년 사리공의 사리장엄 유물을 노린 도굴꾼들에게 훼손되자 해체수리가 결정됐다.
그 과정에서 2층 탑신 사리공에서 사리와 함께 금동제 외합, 은제 내합,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고려 초기 때 석탑을 고쳐 쌓은 내력을 기록한 문서인 중수문서 등이 발견됐다. 이 중 28건은 국보 제126호로 지정돼 현재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번 해체 과정에서 수습한 사리장엄구 중 은제 사리호와 목제 사리병은 1966년에 재봉안한 원래의 성보문화재다.
연구소는 수습한 사리를 석탑 복원 때 재봉안하기 전까지 약 1년 동안 불국사
무설전에 모시고 석가탑 사리친견법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또한 사리장엄구는 수습 후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조사와 보존처리를 시행한 후에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재봉안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원년(740)에 김대성이 불국사를 발원하면서 세운 석가탑은 고려 초기인 현종 시대에 경주 일대를 덮친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자 대대적으로 수리했으며, 이후 천년을 버티다 1966년 해체됐다. 하지만 반세기 전 해체를 진행하다가 2층 옥개석을 들어내리는 과정에서 돌이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해체를 중단하고, 2층 몸돌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만 수습한 채 다시 탑을 쌓아올렸다.

2층 옥개석까지 해체한 석가탑은 상반기 중으로는 기단까지 전면 해체된다.
연구소 배병선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하부까지 모두 해체한 다음 지반 조사를 할 예정"이라면서 "그 결과에 따라 석탑 하부와 주변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이게 된다"고 말했다.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지반을 보충한 석가탑은 내년 3월 무렵에는 재조립에 들어가 6월 무렵에는 복원을 완료할 계획이다.

 

연합뉴스 | 입력 2013.04.02 16:03 | 수정 2013.04.02 16:04  (경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사리 모신 곳 석가탑 2층의 속살, 47년 만에 드러냈다

2층 옥개석 들어올리자 사리합·사리병 등도 노출
1000년 만의 전면 수리… 향후 해체 작업 과정서 또 다른 유물 발견 기대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21호·석가탑)의 2층 탑신 내 사리공(사리를 봉안한 곳)과 사리합 등이 47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2일 오후 2시 불국사 대웅전 앞. 동쪽 다보탑 맞은편의 석가탑 주변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해체 작업을 위해 설치한 가설덧집 속의 석가탑은 이미 3층과 상륜부가 해체된 상태였다.
남아 있던 2층 옥개석(지붕돌)이 스님들의 염송 속에 조심스럽게 들어올려졌다. 지붕돌을 들어올리자 사각형의 사리공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사리공이 공개된 것은 1966년 도굴 미수사건으로 인한 부분 수리 때 이후 처음이다.

 

 

사리공에는 비단으로 덮은 밑면이 없는 철제정육면체 뚜껑이 있었다. 철제뚜껑을 들어올리자 금동제 사리외합이 보였다. 66년 수리 당시 이 사리공에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6호)과 금동제 사리외합, 은제 사리합, 유리 사리병, 구슬과 같은 사리장엄구 등 28건(국보 126호)의 유물이 발견됐다.
이날 모습을 드러낸 유물들 중 사리와 은제 사리호, 목제 사리병 외에는 모두 복제품으로 66년에 봉안한 것들이다. 진품 유물은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통일신라시대인 742년 세워진 석가탑은 오랜 세월에 따른 기단의 균열 등으로 지난해 9월부터 고려 때 이후 약 1000년 만에 전면 수리를 위해 해체 중이다. 4일에는 고려 정종 때(1038년) 수리한 이후 약 1000년 만에 2층 탑신이 수리를 위해 해체될 예정이다.

해체수리 실무를 맡은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 배병선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석가탑의 해체수리는 석조문화재 해체·복원에 모범이 되도록 하겠다”며 “향후 석조문화재 복원작업 등에 귀중한 경험과 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석가탑은 앞으로 2층 탑신에 이어 1층, 기단부, 기단 내부의 적심(20여t에 이르는 탑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채운 흙더미)이 해체되고, 탑 하부지반도 조사된다. 특히 66년 수리 때는 2층 지붕돌까지 손을 댔기 때문에 2층 탑신 아랫부분의 해체는 문헌기록상 1038년 이후 약 1000년 만에 처음 이뤄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문화재계 관계자들은 향후 석탑 해체 과정에서 또 다른 귀중한 유물들의 발견도 크게 기대하고 있다.

해체된 석탑 부재들은 세척한 뒤 접합과 강화처리 등을 거쳐 2014년 상반기 중 다시 세워진다. 적심도 보강된다. 이날 현장을 찾은 변영섭 문화재청장은 “석가탑은 비례미가 뛰어난데다 간결하면서도 장중해 한국 석탑의 백미로 꼽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며 “계획대로 잘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석가탑은 중수기에 따르면 경덕왕 원년(742년)에 세워진 이래 고려 때 지진 등으로 크게 수리를 받았고, 이후 오랜 세월에 걸친 노후화 등에 따라 기단석에 금이 가고, 적심이 약화돼 결국 전면 해체수리에 들어갔다. 불국사를 찾는 관광객들은 현재 투명하게 만든 가설덧집 안으로 석가탑 해체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경향신문 입력 : 2013-04-02 21:26:57수정 : 2013-04-02 21:26:57  <경주 | 도재기 기자 jaekee@kyunghyang.com>

 

 

<불국사 석가탑, 그 영광과 수난의 1300년>

경덕왕 원년 건립, 지진·도굴 피해..국보 쏟아내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다보탑과 나란히 버틴 석가탑(삼층석탑)은 올해로 정확한 나이가 1천273세다.
그것을 세운 정확한 연대는 최근에야 밝혀졌다. 1966년 석가탑을 해체수리할 때 발견된 고려시대 초기의 석탑 수리 문서를 통해 신라 경덕왕 원년(740)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석가탑은 문화재보호법상 정확한 이름이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이며, 현재 국보 제21호다.
불교미술사학계에서는 이 석탑을 신라시대 삼층석탑의 정형을 보여주는 탑으로 평가한다.
2중 기단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세웠다. 기단이나 탑신에는 이렇다 할 조각이 없어 각종 화려한 장식을 한 인근 다보탑과는 달리 간결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학계는 이 석탑이 전탑(벽돌탑)과 유사한 신라 초기 석탑 형식에서 발전한 것으로 평가한다.

부재를 분할하지 않고 통돌을 사용한 가장 이른 예로 후대 신라 삼층석탑의 정형을 확립한 뿌리로 평가되기도 한다. 쉽게 말해 그 이후 한반도에 태어난 삼층석탑은 모두 석가탑을 롤 모델(role model)로 삼는다 해도 과언이 아닌 기념비적인 탑이다.


◇ 석가탑 수난사


석가탑은 한동안 처음 건축 이래 단 한 번도 큰 보수는 없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1966년 해체 수리 때 사리공에서 발견한 석탑 중수기(수리내역서)가 최근 판독되면서 사정이 일변했다.
이를 통해 먼저 고려 현종 15년(1024) 해체수리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원인은 지진으로 보인다. 이어 12년 뒤인 정종 2년(1036)에도 지진으로 피해 보수를 했으며, 다시 2년 뒤인 정종 4년(1038)에도 다시 지진으로 피해를 보아 고쳐 쌓았다.

조선 선조 20년(1586)에는 낙뢰로 탑 꼭대기 뾰족한 부분인 상륜부가 손상돼 떨어져 나갔다. 이때 손상한 상륜부는 1972년에야 복원하게 된다. 하지만 원래 모습을 알 수가 없어 석가탑과 비슷한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실상사 삼층석탑의 그것을 본떠 붙였다.
조선 후기에는 불교에 대한 각종 압박이 심해져 불국사가 쇠락하면서 석탑 또한 훼손이 가속했다.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할 무렵에 촬영한 사진들을 보면 훼손이 극심하다. 그러다가 1925년 무렵에 팔방금강좌대와 주변을 정비했다.

석가탑 훼손현황(왼쪽)과 해체수리 내용(오른쪽)


석가탑은 1966년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를 훔치려던 도굴꾼들에게 탑재 일부가 훼손됐다. 이렇게 해서 당시 해체 수리가 결정됐다. 하지만 이마저도 2층 옥개석을 분리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떨어뜨리는 어이없는 사고가 발생해 사리장엄구를 수습하는 것으로 해체수리는 끝났다.
그러다가 2010년 12월1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석탑을 정기 안전 점검하던 중 기단 갑석에서 길이 1천320㎜, 간격 5㎜ 정도의 균열이 확인됐다.
그 원인을 분석한 결과 기단 내부를 채운 흙과 돌덩이인 적심(積心)이 유실되고, 상부 하중의 지지점이 상실됨에 따라 일어났다는 결과가 제출됐다.
이에 석탑은 2010년 12월16일 문화재위원회에서 해체수리를 결정했으며, 지난해 9월27일 해체수리에 착수했다.

◇ 1966년 해체 보수

현대에 들어와 석가탑의 대대적인 보수는 1966년 도굴 시도 실패에 따른 후속 조치로 진행됐다.
당시 해체 보수는 10월부터 11월까지 진행됐다. 애초 계획한 해체의 범위가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 전면 해체였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탑신 2층 옥개석까지 해체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1966년 석가탑 해체 모습


옥개석을 분리해서 땅에 내려놓는 과정에서 그만 돌이 굴러 떨어진 대형 사고가 발생한 여파였다.
이런 우여곡절에서도 조사단은 2층 탑신석에서 사리공을 찾아내고 거기에서 사리 48과와 사리장엄구를 수습했다.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로 기록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바로 이 사리공에서 발견됐다. 다라니경과 사리장엄 관련 유물들은 국보로 지정됐다.

사리공은 가로·세로 각각 41㎝에 깊이는 19㎝였다. 이곳에서는 금동제 사리외함과 공양품 등 총 40건에 달하는 유물이 발견됐다.
사리를 담는 그릇인 사리기는 모두 3종이 확인됐다. 하나는 유리제 사리병으로 사리 46과를 봉안했다. 이 사리병은 은제 사리 내호, 은제 사리 외호, 금동제 사리 외함으로 덮여 있었다.

두 번째는 목제 사리병으로 사리 1과를 봉안했다. 금동제 방형 사리합으로 감쌌는데 사리공 동북쪽 모서리에서 발견됐다. 세 번째는 은제 사리 소호로서 사리 1과를 봉안했다. 은제 사리합으로 감싼 이 사리소호는 사리공 서북쪽 모서리에 발견됐다.
불교미술사학계에서는 각각 다른 양식이라는 점에서 2차례 정도 석탑을 중수하면서 새로 넣은 사리기로 본다.
  

금동제 사리외함


해체 보수 때 발견된 묵서지편(墨書紙篇)이라는 종이류 뭉치는 뒤늦게 그 내용이 판독되면서 불국사와 석가탑 역사를 뒤흔들게 된다. 2005년 무렵 당시 이를 보관 중이던 국립중앙박물관이 이 종이 뭉치를 하나하나 해체한 결과 고려 초기 때 석가탑을 수리한 내용을 기록한 중수기 문서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석가탑의 정확한 창건 연대가 드러나고, 석가탑은 단 한 번도 수리 보수가 없었다는 신화가 붕괴됐다.
이런 역사를 지닌 석가탑이 해체 수리 근 반세기 만에 다시 전면 해체 수리가 진행 중이다. 이번에는 석탑 기단까지 전부 들어냈다가 다시 세우는 전면 해체다.

연합뉴스 | 입력 2013.04.02  (경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고려땐 지진, 20세기엔 도굴범에… 석가탑, 고단했던 1000년

[보수 공사 역사로 본 석가탑 수난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나온 1966년, 옥개석 부서지고 사리병은 깨뜨려… 이 사고로 해체 공사 전면 중단돼
이번엔 탑 아래 땅속까지 발굴 "석가탑 신비 벗는 大사건 될 것"

 

1966년 이뤄진 석가탑 부분해체 공사. /조선일보 DB
지진, 벼락, 도난, 공사 사고…. 국보 21호 석가탑은, 풍파를 많이 겪은 한국의 문화재 중에서도 유독 파란만장한 사건을 시대별로 체험했던 '수난의 석탑'이었다. 이 탑의 해체·복원 공사는 2일 이후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1966년 부분 해체 당시 2층 탑신의 사리공 부분까지는 조사가 됐지만, 2층 옥개석이 땅에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한 뒤 공사 자체가 중단돼 그 아래부턴 미답(未踏)의 영역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드러나는 석가탑 속의 모습이야말로 '신라사(史)의 민얼굴'이 되는 것이다.

◇지진과 벼락, 60년대엔 도굴 시도

서기 742년(신라 경덕왕 원년) 건립된 석가탑 해체는 이번으로 네 번째다. 1024년(고려 현종 15년) 첫 번째 해체 수리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고(다보탑 해체라는 설도 있음), 1036년(고려 정종 2년)의 지진 피해로 2년 뒤인 1038년 다시 보수를 했다. 1596년(조선 선조 29년)엔 벼락을 맞아 상륜부(탑 위쪽의 장식물)가 손상됐다.

1966년의 세 번째 해체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다. 9월 초, 탑이 남쪽으로 6도 정도 기울어진 것이 발견됐다. 처음에는 8월 말 발생한 지진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밀 조사 결과 '사리를 탐낸 도둑의 소행'이었음이 드러났다. 도굴범의 손을 탄 것이다. 이들은 대담하게도 10t짜리 공기압축 잭을 들고 와 1층과 2층 탑신을 들어올리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액운 이어진 1966년의 보수공사

당시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의 전신)은 기울어진 석가탑의 전면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1966년 10월 13일, 2층 탑신의 사리공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유물이 나왔다. 아름다운 금동제 외합(外盒)과 은제 내합(內盒)은 물론,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로 판명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불과 두 시간 뒤에 사고가 터졌다. 2층 옥개석을 들어올리다가 땅에 떨어뜨렸고, 그것이 하필이면 이미 해체해 바닥에 내려놓은 3층 옥개석 위로 떨어져 함께 파손됐던 것이다. 받침대로 쓰던 나무 전봇대가 썩어 무게를 지탱하지 못했다. 이 사고로 해체공사는 중단됐다. 전문가들은 "그 당시엔 대단히 황망한 상황이어서 더 이상 공사를 진척시킬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액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리 46과(顆)가 들어 있던 녹색 유리제 사리병을 불국사 고위 관계자가 옮기다 떨어뜨려 깨뜨리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석가탑에 손을 대는 건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다.

 

◇다라니경 다음엔 또 무엇이?

지난해에야 비로소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용기를 냈다. 9월 석가탑 해체를 시작해 12월 상륜부 해체를 끝냈고, 지난 2월에는 부재 정밀 실측과 3D 스캔, 초음파의 조사를 완료했다. 새 상륜부는 봉암사 삼층석탑 등을 참고로 석가탑의 비례에 맞게 다시 만들 계획이다.

이제부터 시작될 2층 탑신의 해체부터는 '1000년 동안 숨겨졌던 역사의 베일'을 벗기는 셈이다.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탑 아래 땅속까지 발굴할 예정이기 때문에 창건 이래 최대 규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석가탑은 경주 남산의 돌을 가져다가 만든 것이지만, 현재 남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기 때문에 석재 채취가 어렵다. 이 때문에 복원에 새로 필요한 돌은 석질(石質)이 경주 남산과 비슷한 포항시 기계면에서 갖다 쓸 예정이다.

 

<석가탑>

경북 경주시 불국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높이 10.4m의 거대한 규모이며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부른다. 1962년 국보 제21호로 지정됐다.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마주 서 있는 탑 가운데 서탑(西塔)이다. 정식 명칭은 불국사 삼층석탑으로 비례와 균형미가 돋보여 신라 석탑의 표본이 되는 탑이다.

조선일보 문화 2013.04.03 00:21 (경주)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