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희귀한 조선시대 창성유적, 아산 공세곶창성(貢稅串倉城)(2012.12.24)

필그림2 2012. 12. 25. 21:47

희귀한 조선시대 창성유적, 아산 공세곶창성(貢稅串倉城)(2012.12.24)

- 번화했던 옛 조창의 흔적은 한적한 민가 담장과 고딕식 성당 터로 남아 과거의 아련한 역사를 말해준다 -

 

 

 

평택에서 아산만방조제를 지나 아산(온양)시내 방향으로 자동차로 5분정도 가다보면 우측에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가 나온다.

이곳 공세리는 고려 우왕2년(1376)에 폐지되었던 조운제(漕運制)가 조선초기부터 재정비되어 운영된 전국 9개 조창(漕倉) 중 충청도의 세곡을 한양으로 운송하던 공세곶창(貢稅串倉)이 있던 곳이다. 공세리라는 이름도 이 공세곶창에서 유래되었다.

창성(倉城)이란 국가 소유의 창고를 보호하거나 창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쌓은 성곽을 말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창성으로는 이곳 공세곶창성(貢稅串倉城)과 익산의 덕성창성(德成倉城), 영광의 법성포창성(法聖浦倉聖), 황해도 강음의 조음포창성(助邑浦倉城)과 고려시대 통양창(通陽倉)이 있던 사천 선진리성(船津里城) 등으로 남아있는 예가 드룰다.

 

공세곶창이 있던 공세리 주변지역은 현재 아산만방조제와 간척사업으로 육지가 되었지만, 당시 창성 주변으로 조운선이 정박할 정도로 바다와 접해있던 해상교통의 중심지역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7년(1425) 충청우도 지역에서 거둔 조세를 한양으로 운송하던 조창을 처음에는 면천현  범근천(犯斤川, 현재 당진시 우강면 창리)과 아산현 공세곶에 각각 두었으나, 범근천이 매년 토사가 쌓여 물길이 낮아져 성종 9년(1478)에 아산현 공세곶으로 세곡을 옮기도록 하였다. 이후 성종21년(1490)에는 범근천의 창고를 공세곶으로 모두 옮기게 되었다.
15세기 초(세종조) 창고도 없이 곡식을 노적하다가 중종18년(1523)에 이르러서야 80칸 규모의 창고를 짓고 공세곶창을 공진창(貢津倉)이라고 개칭했다.
옛 기록들과 지도에는 창성내 봉상청(捧上廳), 사창(社倉), 침해당(沈海堂), 조선소박처(漕船所泊處)등의 시설들이 있었는데 현재에는 공세리성당과 농협창고 그리고 마을회관과 민가가 자리잡고 있어 옛 건축물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공세리성당 성체 조배실 앞 대나무숲 공세곶창성곽>

<남문거리 남문지 부근 잔존 성곽, 2011.01>

 

영조38년(1762)에 해운창(海運倉)이 폐지됨에 따라 공세곶창도 위축되었다. 1894년 이곳에서 포교를 하던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에밀 드비즈(Emile Devies 한국명 成一論, 1895~1930)신부가 1897년 폐기된 공세곶창 터를 매입해서 창고를 헐고 구성당과 구사제관을 지었으며, 다시 신축공사를 시작한지 25년만인 1922년 10월 현재와 같은 조적조 유사고딕양식의 성당과 사제관이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이 공세리성당은 조선의 9번째 성당이자 충청도 최초의 성당이 되었다.  성당과 사제관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있고 낮은 언덕 같은 야산 위에 세워져 있어 주변 풍광과 건축미가 잘 어우러져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고 있다.

 

1980년대 후반까지 종기나 상처에 붙이는 고약의 대명사인  "이명래고약"이 이곳 공세리성당에서 유래하였다는 것도 흥미로운 이야기다.

드비즈 신부는 포교 이외에 지역주민들을 위한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한국에 오기 전 중국에 있을 때 배운 한의학 지식으로 직접 한약을 조제했는데 이때 고약도 직접 제조하였다.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의 한국식 이름을 따서 "성일론 고약"이라 했으나, 신부를 도와주던 이명래(李明來,세례명 요한)에게 전수하여 "이명래 고약"이 되어 전국적인 명성의 의약품이 되었다가 2002년에서야 생산이 중단되었다. 이명래 선생의 막내딸이자 제헌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선생의 부인인 이용재 여사가 1970년대 고약을 만들던 이명래 고약 공장이 서울 구로구 궁동의 와룡산 인근에 남아있다고 한다.

 

<공세리성당 전경, 2011.01>

 

영조 33년(1757)에 시작해서 동 41년(1765)에 완성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공세곶창성의 규모는 <辛未石築周回三百八十尺高五尺五>라 하여 "길이 380척, 높이 5.5척" 이라 하였다. 이는 포백척으로 환산하면 대략 길이 177.57m, 높이 2.57m 이다.

공세곶창성의 성곽 흔적은 남문거리라 불리는 마을입구에서 부터 공세리성당이 있는 신풍산 주변에 걸쳐 남아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마을의 북쪽 즉, 공세리성당 뒤편에 74.6m, 성당 동편 성체 조배실 앞 대나무 숲 길을 따라 134.5m, 마을 동남쪽에서 남문거리에 이르는 120.9m, 마을 서쪽인 성당 주차장 후면에 39.2m가 남아있다. 공세리성당 뒤편에 위치한 74.6m 중 약 25m는 근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봐서 현재 흔적을 알아 볼 수 있는 성곽은 약 370m이며, 이를 통해 유실된 성곽을 추측해보면 약 330m로써 성곽의 전체 둘레는 대략 700m 정도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어 여지도서의 오기나 후대 증축의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현재 공세곶고지 문화재 안내판과 삼도해운판관비(三道海運判官碑)가 있는 남문거리 앞 잔존 성벽은 남문이 있던 것으로 추측되는 구간이고, 공세리성당 동편 대나무 숲이 있는 성체 조배실 부근에 동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축성형식은 조선시대 연안이나 해안에 만들어진 읍성이나 진성의 축성형식과 유사하다. 하부에는 큰 면석을 사용하고 상부로 올라 갈수록 작은 면석을 사용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상부에도 큰 면석을 사용하기도 하고 작은 돌을 채워넣기도 하였다.

 

<남문거리 삼도해운판관비와 아산현감 선정비>

 

공세곶창성은 중앙에서 파견된 충청도,전라도의 조운을 담당한 전함사(典艦司) 소속 종5품 해운판관(海運判官)이 상주하였으며, 18세기 중반에는 조선(漕船) 15척과 조군(漕軍) 723명이 배치되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조선후기에 접어들어 조창의 기능이 약화되어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로 하여금 겸임하게 하다가 영조38년(1762)에 해운창(海運倉)제도가 폐지됨으로써 공세곶창도 아산현감이 관리하게 되고, 고종2년(1865)에는 조창제 자체가 완전히 폐지되면서 방치되기에 이르렀다.

남문거리 앞 잔존 성벽 아래에 6기의 삼도해운판관비와 3기의 아산현감선정비는 마을 주변에 흩어져있던 것을 이처럼 한 곳에 모아두었다고 한다.

9기의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인조 27년(1649)에 세운 비이고, 가장 후대의 것은 숙종 34년(1708)에 세운 비이다.

 

눈이 살짝 덮힌 구불구불한 마을 길을 따라 창성의 흔적을 찾아 다니다보면 열려진 대문들 사이로 아름다울 것도 없는 시골살림의 평범함 속에서도 따스한 온기를 느낀다. 낯선 이방인의 기웃거림에 마당 한켠 가는 겨울 햇살아래 휴식을 취하던 어린 백구들이 짖어대는 풍경이 다정스럽다. 이렇게 마을 길을 따라 옛 성벽을 찾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언덕 위 성당에 다다른다. 한여름 녹음 우거진 고목들 사이로 보이는 오래된 고딕의 성당을 거니는 것도 좋겠지만 이렇게 휑하니 속살을 들어낸 고목들 사이 당당하게 서있는 성당을 바라보고 잠깐 내부로 들어가 신앙인의 마음으로 평온함을 느껴보는 것도 좋았다. 마을 주변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성당 언덕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조용히 한해를 마무리하는 답사여행에서 만난 옛 성곽의 흔적과 그 흔적을 파괴하고 만들어진 서양 건축물은 다소 어울릴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이곳 공세리에서 만난 풍경들은 소복히 쌓인 하얀 눈길을 걷는 행복함과 겨울햇살 만큼이나 은은하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화려함보다 수수하게 성탄절을 준비하는 수녀님의 모습에 100년 공세리성당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참고자료>

『조선시대 충청해안지역의 성곽연구』 「경희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재혁)」1986.

『아산 공세리 가톨릭 성당건축의 보존』 「충남대 대학원 건축공학과 석사학위논문(유형구)」1993.

『조선시대 아산 공세곶창지의 특성에 관한 연구』 「충남대 대학원 건축공학과 석사학위논문(임초롱)」2007. 8

『근대이후 한국 성당건축의 평면 변천에 관한 연구』 「건국대 산업대학원 건축공학과 석사학위논문(차윤오)」2009.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