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충청도 수군의 총 본영인 충청수군절도사영이 있던 보령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2012.10.12)

필그림2 2012. 10. 17. 15:28

충청도 수군의 총 본영인 충청수군절도사영이 있던 보령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2012.10.12)

-  천수만의 풍광에 넋을 잃고, 전장의 긴장감은 사라진지 오래인 옛 수영성 아래 오천항은 오늘도 낚시꾼들로 분주하기만 하다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931번지 일대에 소재한 충청수영성은 조선 세조 13년(1467년)에 설치되고 1896년 폐영될 때까지 430년간 330여명의 절도사가 재임하였으며 평택에서 군산에 이르는 서해 요충지를 지키는 충청수군의 본영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 속진에 배속된 군선(軍船)은 142척, 수군(水軍)은 8,414명에 달했으며, 최전성기에는 본영에만 군함 90여척과 수군 5300여명이 주둔했을 만큼 그 위세가 컸다고 한다.

선조 29년(1596년) 충청수사 최호(崔湖)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서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년) 7월 15일 칠천량 해협에서 일본군에 패하여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 등과 함꼐 전사하였으며, 원균도 선전관 김식(金軾)과 함께 육지로 탈출하였으나 추격하던 일본군에게 전사하였다.

 

충청수영성은 조선 중종 4년(1509년)에 현재의 석축으로 축조됐으며, 길이 1,650m의 서쪽이 약간 튀어나온  타원형 석성이다.진남문(鎭南門),만경문(萬頃門),망화문(望華門),한사문(漢舍門) 등 4성문과 소서문(小西門)을 두었으며 성안에는 영보정(永保亭),관덕루(韻德隱),대변루(待變樓),능허각(凌虛閣),고소대(姑蘇臺) 등이 있었으나 모두 허물어지고, 현재는 아치형의 서문인 망화문(望華門, 또는 용금문)과 백성을 돌보던 진휼청(賑恤廳), 장교들의 사무실로 사용되던 장교청(將校廳), 동헌인 공해관(控海館, 동헌)의 내삼문(內三門) 등이 보존 및 복원되어 있다.

지난 2010년 7월 충청수영성 발굴조사를 착수하여 수영내 대표적 시설이던 영보정(永保亭) 터를 확인했으며 영보정 복원을 시작으로 2018년까지 국비를 지원받아 수영 내부를 복원할 계획이다. 영보정은 연산군 11년(1504년)에 수군절도사 이량(李良)에 의해 건축되었다가 187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충청수영성은 1973년 "보령 오천성" 이라는 이름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됐으며, 2009년 8월 "보령 충청수영성"을 정식 명칭으로 하여 국가 사적 제501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충청수영성이 위치한 오천항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곳으로써 지금도 많은 관광객과 낚시꾼들이 찾는 명소로 유명하다.

 

 

 

<충청수영성 정비기본계획 조감도, 충남역사문화연구원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