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최진연 저자와 함께한 역사의 흔적 <경기도산성여행>(2012.06.10)

필그림2 2012. 6. 13. 05:04

최진연 저자와 함께한 역사의 흔적 <경기도산성여행>(2012.06.10)

 

 

지난 30여년간 한국의 사라져가는 옛 관방유적과 서정적 풍경들을 조사하고 취재하고 기록으로 남겨온 최진연 사진작가 겸 데일리안 유적전문기자가 2012년 5월21일 <역사의 흔적 경기도산성여행>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책 제목에서 처럼 기자께서 최근 2~3년간 경기도 전역의 성곽유적 211개를 조사하고 기록한 자료를 총 망라한 엄청난 분량의 산성종합자료서이다.

이 책에 소개된 211개의 경기도 성곽 중 저자가 최초 발견한 성곽유적이 60개소나 된다는 점에서 학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600여 쪽의 방대한 역작, 경기도산성여행 표지>

 

이 책 <역사의 흔적 경기도산성여행>은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비교자료집과 향후 소실 위험이 있는 문화유산에 대한 자료 확보차원에서 출판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역사의 현장을 직접 몸으로 발로 돌아다니며 땀과 열정으로 기록한 최진연 기자의 숭고하고 투철한 프로페셔널리즘의 결실이다. 최근에는 산성 조사를 하다가 왼손 새끼손가락을 다쳐 구부려지지가 않는다. 수십년간 산하를 헤집고 다닌 저자의 몸에는 상처가 이것뿐이랴.

최진연의 유적사진은 기록을 위한 사실성과 작품으로서의 예술성이 함께 이루어져있다. 그의 글은 단순하지만 군더더기없이 명료하고 유적에 대한 애정이 듬뿍 녹아있다.

그의 외모에서도 이런 성격이 잘 드러난다.

 

최진연 기자가 성곽관련 책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3년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한국의 성곽- 최진연,차용걸 공저>이란 책이다.

한창 역사와 고고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단순히 고고학과 역사의 한 분야로만 생각했던 성곽유적에 더욱 더 깊이 매료되었다. 성곽유적을 고고학의 학문분야로 키운 충북대 차용걸 교수의 성곽발달사 서문과 최진연 기자가 지역별 대표성곽을 천연원색의 사진과 설명으로 본문을 꾸민 이 책은 한국 성곽의 아름다움과 역사성을 표현해 놓은 걸작이다. 그 후 나는 성곽답사를 좀 더 체계적으로 하고자 여러 학술도서와 자료를 수집하게 되었다.

 

최진연 기자는 소박하고 겸손하다.

전국 각지도서를 찾아 다니며 기록으로 남긴 성곽자료를 남기고 있지만 정작 이런 자료를 활용하는 학계에서는 그를 아웃사이더로 취급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성곽연구 관련 학계와 성곽유적의 대중화에 기여한 그의 공적은 결코 작지않으며 그의 도서,사진 등 기록물들은 불후의 명작,명저로 남겨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의 다음 저작은 무엇일까 기대하고 고대한다.

 

그동안 최진연 기자는 성곽사진전도 몇차례 개최했고 인터넷신문 데일리안 선임기자로서 현재 <최진연의 우리터,우리혼>을 연재하면서 아름답고 고졸하며 때론 소리없이 사라져가는 우리의 역사가 묻혀있는 성곽과 봉수유적을 소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이 연재기사를 통하여 2년전 최진연 기자와 산성 취재에 동행 할 수 있었고 그 후 몇차례 성곽과 봉수유적 조사에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인터넷 블로그를 통하여 알게 된 경기대 박용진 교수의 제안으로 최진연 기자와 함께 연천,포천일대 산성 답사에 동참할 수 있었다. 이번 답사는 전적으로 박용진 교수의 적극적인 의지와 지원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한달째 가뭄과 더위가 지속되고 있다. 대기 흐름이 없어서인지 스모그와 연무현상 때문에 시야가 좋지않다.

 

 <허물어진 초성리산성 - 서쪽 성벽 구간>

<초성리산성 남쪽 성벽>

 

일행은 우선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에 위치한 초성리산성(哨城里山城)을 찾았다.

경원선 초성리역을 10분쯤 지나 말턱고개 약수터로 진입해서 임도를 따라 500여 미터쯤 올라가 차를 세우고 좁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해발 150m의 낮은 봉우리 정상부에 석축으로 둘러쌓은 원형의 테뫼식산성이 대부분 허물어진채로 남아있다.

규모는 대략 둘레가 300m 미만이고, 무너진 성벽의 규모로 봐서 높이는 5m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성벽 구간에 유일하게 높이 2m, 길이 2m 정도의 10여단의 석축과 그 아래에 기저부 또는 보축성벽으로 보이는 석축 흔적이 약간 남아있다. 비록 작은 규모의 산성이지만 주변 전망이 좋아 관측과 방어에 용이하였으리라 추측되어진다.

675년 9월 당나라 장수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20만 대군과 신라군 3만이 결전을 치뤄 신라가 대승을 하여 나당전쟁의 전환점이 된 격전장 매소성(買肖城, 또는 매초성)으로 추정되는 대전리산성(大田里山城)이 초성리산성 동북쪽 3k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이 초성리산성은 대전리산성의 배후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인근의 초성리토성(哨城里土城) 또한 매소성에 주둔했던 당나라 군과 정면승부를 펼치기 위한 전초기지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허물어진 성벽 주변으로 부분적으로 성돌을 이용한 군사용 교통로가 파여져있고, 정상부에도 군 참호가 설치되어 있어 훼손이 심하다.

이렇듯 약 1,500년전 군사시설 위에 20세기를 이어 21세기 남북 분단의 산물로서의 군사시설이 존재하고 있음에 안타까운 마음은 돌아 내려오는 발길을 내내 무겁게 한다.

 

 <초성리토성 서쪽 성벽>

<훼손이 심한 초성리토성 남쪽 성벽>

 

임도로 내려온 일행은 인근에 위치한 초성리토성을 찾았다.

이곳을 다시 찾은 최진연 기자님도 변해가는 주변 환경으로 쉽게 찾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이 되고 있는 유적이다.

동서 150m, 남북 100m의 장방형 판축으로 다진 초성리토성은 무등리,우정리 등 주변의 보루와 한탄강 단애에 만든 성곽들과 함께 고구려가 5~6세기 임진강과 한탄강을 지배하고 있을때 축성한 유적으로 추정한다. 2005년 연천군에서는 토성내부와 성벽 일부를 허물고 공원(청산공원)을 만들고 수목과 꽃을 심어 원형을 크게 훼손시켰다.

다행히 북쪽 성벽은 군부대 담장으로 사용되고 있어 훼손이 덜하지만 동쪽과 서쪽 성벽은 도로가 관통되어 많은 부분이 없어지고 훼손되었으며 남쪽 성벽도 밭과 민가가 있어 훼손이 진행되고 있다. 이곳 초성리토성은 675년 나당전쟁시 당나라 군대가 주둔한 매소성(대전리산성)을 향해 결전을 벌이기 위해 신라군이 주둔했던 곳이라 한다.

연천군 관계자는 물론 지역주민들 마저도 토성의 존재와 가치를 알고있지 못해 유적이 훼손되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 같았다. 초성리토성을 보면서 행정당국의 잘못된 업무처리가 유적의 돌이킬 수 없는 멸실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등리2보루 동쪽 성벽에서 바라보이는 임진강>

<무등리2보루 동쪽 성벽 기저부>

 

후끈하게 찌는 더위는 정오를 지나면서 더욱 강렬해졌다.

2011년 5월 고구려 찰갑(札甲 : 작은 쇳조각을 가죽끈으로 엮어서 만든 물고기 비늘모양의 갑옷)이 발굴되어 주목을 받고 최근 5월31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만 볼 수 있었던 사행상철기(蛇行狀鐵器 : 말 안장 뒷부분에 고정시켜 장식하는 것)로 추정되는 철기가 출토되어 다시 한번 학계를 놀라게 했던 무등리 2보루 유적을 찾았다.

무등리 2보루(無等里二堡壘)는 왕징면 면소재지를 지나 서쪽 임진강변의 해발 93m의 낮은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 300m 거리의 통신탑 주변은 무등리 1보루가 있다. 무등리 보루가 위치한 곳은 지형이 낮지만 보루 아래 왕징면과 강건너 군남면 일대가 훤하게 잘 조망된다.  발굴조사 기관인 서울대박물관은 무등리 보루가 건너편 군남면 진상리와 왕징면 무등리 사이를 잇는 나루터(유연진(楡淵津),유연나루) 일대를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6.25전쟁 때 연천을 탈환하고 개성 방향으로 진격하던 UN군의 도하를 위해 미군 공병대대가 다리를 가설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은 임진강을 잇는 임진교(臨津橋)가 설치되어 군남면과 왕징면을 연결해 주고 있다.

무등리 보루는 1991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실시된 군사보호구역내 지표조사에서 처음 보고 되었으며, 이후 서울대박물관에 의해 3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동안의 발굴조사로 성벽과 치성, 축대의 흔적과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다량의 탄화미가 출토되고 있어 보루 내에 큰 화재가 있었음이 추정되어진다.

이번 3차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자료에 따르면 사행상철기는 고구려 국내성의 환도산성 궁전지에서 용도 미상의 철기로 일부분이 보고적은 있으나, 지금까지 중국이나 북한에서도 이처럼 완전한 유물이 견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고구려 쌍영총 고분벽화에는 사행상철기 말단에 휘날리는 깃발을 달고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다행히 일행은 지난 6월1일 실시한 현장설명회가 끝나 비닐막을 덮어버린 발굴현장을 볼 수가 있었다. 조사기관 관계자의 현장답사가 있다고 비닐막을 열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발굴현장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은 1998년 8월 경주시 외동읍에서 있었던 구어리고분군 발굴조사에서 였다. 그 당시 현장 책임자였던 분(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었지만 그분은 현재 영남문화재연구원 하진호 조사실장이셨다)의 친절한 안내로 발굴 현장을 조심스럽게 살펴볼 수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열린 사고의 포용력있는 고고학자가 아니였나 싶다. 고고학이 좋아 결혼식 마저 유적발굴 현장에서 올렸다던 그 분 근황이 새삼 궁금하다.

이번에는 발굴기관의 직접직인 배려는 아니였지만 어부지리로 무등리 2보루의 축성 흔적과 치성, 배수로, 사행상철기 출토지 등을 관찰할 수 있었다.

최진연 기자님은 향후에도 무등리 2보루에서 어떤 유물이 예측불허로  출토될지 잔뜩 기대되는 곳이라고 했다.

일행은 최진연 기자님이 안내한 군남면 소재지의 오래된 냉면집에서 시원하고 맛있게 점심을 해결하고, 험준한 계곡부를 막아 만든 천혜의 요새 포천의 보개산성(寶盖山城)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지장계곡 입구 보개산성 서쪽 성벽>

<보개산성 남문지>

<보개산성 북쪽 성벽, 자연암벽과 인공의 절묘한 조화를 볼 수 있다>

 

포천지역을 몇번 찾아와 봤지만 산이 많고 골이 깊어 계절이 바뀔때마다 초행지 같은 낮설음이 있다.

비둘기낭 폭포로 유명한 영중면 대회산리 이정표를 지나 관인면 중리로 향했다. 중리삼거리에서 지장계곡 쪽으로 들어갔다.

계곡입구에서부터 벌써 야영객과 피서객 그리고 등산객으로 버스,승용차,인파들이 넘쳐났다. 예로부터 지장계곡은 물이 좋아 입소문을 통하여 찾는 사람들이 늘고있단다. 한탄강댐이 완공되면 주변이 부분적으로 수몰될지도 모르는곳이다.

차량출입을 막은 곳부터 계곡을 따라 30여분 걸어 더 깊숙히 들어갔다. 지장계곡입구에서 정상 잘루맥이 고개까지 4km가 넘는 이 길은 철원으로 가는 옛 길이다. 지금도 4륜구동 차량은 넘어갈 수 있다고 한다. 2년 전만해도 비포장길이었는데 포장이되고 부분적으로 잘 정비되어있었다.

보가산성(保架山城, 또는 보개산성) 안내표지판이 있는 곳에 계곡을 막은 성곽의 흔적을 잠시 만나고 계속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만나는 계곡부로 올라갔다. 문지와 온돌시설을 갖춘 건물지, 수구가 잘 남아있는 성벽이 있다. 이곳에서부터 정상을 따라 가파르게 오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땀은 온몸을 적신다. 정상을 따라 오르는 사면으로 희미하게 축성의 흔적을 볼 수 있고 더 올라가면 자연암벽과 바위사이사이를 견고하게 막아 쌓은 보개산성의 비장미와 절정미를 보여주는 성곽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2년전 겨울이 오는 11월의 가을에 이곳을 찾아왔을때 다리까지 빠지는 낙엽과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겨울나기 채비를 하던 풍광과는 또다른 매력의 여름산성 풍경이었다.

짙푸른 녹음사이로 한줄기 햇빛이 들어오면 이끼낀 옛 성돌은 더 처연하고 아름답다.

일행은 한참을 이곳에서 보개산성의 내력과 풍광을 얘기했다.

1995년 육군박물관에 의해 실시된 지표조사에 의하면 고려시대 기와편이 발견되었다.

보개산성은 인근 명성산성와 함께 후삼국 태봉국 궁예가 왕건에 쫒겨 최후의 항전을 했다는 곳이지만 궁예와 관련된 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역사의 기록은 승자 독식의 기록이다. 따라서 역사 속 패자인 궁예의 기록은 설화나 민담으로 구전되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산성의 이야기에는 영광과 희망이 있기만 하지는 않다. 좌절과 패망의 아픔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인생을 배우기도 한다.

 

오늘 연천과 포천을 다니며 4개소의 성곽을 찾을 수 있었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성곽. 그렇지만 그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것은 연구자들 뿐만 아니라 현장을 직접 찾는 답사객들이다.

일행은 서울로 돌아와 막걸리를 앞에 놓고 오랫동안 성곽이야기와 향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이야기했다.

나이, 직업, 생활방식, 철학은 다르지만 성곽답사를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최근 6월5일 중국 정부가 만리장성 길이가 3년만에 기존 발표(2009년 4월, 8851.8km)보다 2배 이상 늘어난 2만1196km라고 공식발표했다.

북한 신의주를 마주하고 있는 중국 단동의 압록강변 호산(虎山)의 고구려 석축 성곽인 박작성(泊灼城) 위에 약 천년 후 명나라는 1496년 전축성을 만들었다. 2004년 중국은 이 명나라 성을 대대적으로 증축하고 보수하여 고구려 성곽과 우물 흔적이 분명히 있던 곳을 허물었고, 고구려 역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역사박물관도 건립하였던 것이다. 나는 2008년 여름 동북3성 고구려유적 답사때 직접 목격했으며 큰 대리석 조형물아래 "만리장성동단기점 호산(萬里長城東端起點 虎山)"이라는 명문을 보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0년에는 장춘,연변,도문,훈춘 일대에서 114km의 장성을 발견했다고 했다.

중국 당국은 고구려 성곽들을 중국 성으로 둔갑시켜 만리장성의 길이를 계속 늘리고 있다. 만리장성을 동쪽으로 확장하면서 고구려,발해 역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의도(동국공정)가 있으며 향후 한반도 통일에 대한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보고있다.

우리 학계와 전문가들은 중국 만리장성과 고구려,발해 성곽연구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며, 나같은 일반인은 사라져가는 우리 성곽들에 더 애정을 갖고 보듬어야 할 것이다. 나는 조상들의 피와 땀이 서린 성곽에 대한 답사를 꾸준히 이어갈 것이다.

그리고, 오천년 역사를 노리는 주변국들의 양면성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역사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오늘 성곽답사를 추진한 경기대 박용진 교수님과 선뜻 길라잡이를 해 주신 <경기도산성여행> 저자 최진연 기자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린다.

또 이와같은 멋진 동행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