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6세기 초 신라 삼년산성과 대치한 백제 동부전선, 노고산성(老姑山城)(2012.05.21)

필그림2 2012. 5. 23. 15:12

6세기 초 신라 삼년산성과 대치한 백제 동부전선, 노고산성(老姑山城)(2012.05.21)

- 6세기 초 백제 동부 최전선이자 일제시대 보은지역 3.1운동 근거지로서의 역사적 현장 -

 

 

 

보은읍내 삼년산성 북서쪽 회절부 망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금강 상류의 한 지류인 보청천(保靑川)을 사이에 두고 동서 양쪽으로 길게 산맥이 이어지고 그 안쪽으로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이곳 망대 11시 방향 약 5km 전방으로 말안장 모양의 산이 관찰되는데 이곳이 보은읍 산성2리 잣미마을 뒷산으로 구구절절 옛 이야기가 묻혀있을 것 같은 노고산성(老姑山城)이 그 모습을 감추고 있는 곳이다. 노고산성을 한자로 풀면 늙은 시어머니 또는 늙은 할머니 산성이 된다. 이는 마고할멈(할미) 또는 마고신녀가 하루만에 성을 쌓았다는 등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전국적으로 노고산성 또는 마고산성으로 불려지는 산성이 많은데 철원군(할미산성),포천시(노고산성),대전(노고산성),청원군(노고산성),용인시(할미산성 또는 노고성), 문경시(마고산성), 양산시(마고산성), 남원시(할미산성) 등이 이러한 부류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산성들이다.

 

<삼년산성에서 바라 본 노고산성 방면>

 

보은읍내에서 구 19번 국도를 이용해 보청천을 따라 산외면,미원면,청주방향으로 가다가 춘수골삼거리를 지나 10분정도 계속 직진하면 잣미길과 심함2길 안내석을 만난다. 여기에서 좌측 잣미길을 따라 가다가 산성교를 지나면 노고산 아래 잣미마을에 다다른다.

잣미마을자랑비가 있는 마을입구 정자에서 대낮 더위를 식히고 있는 마을 어른들께 노고산성의 위치를 여쭈었다. 마을 뒷산 정상부가 산성인데 골목길 끝까지 올라가면 외딴집이 나오는데 거기 근처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라고 하신다. 녹음이 우거져 산길이 험하니 올라가는 길이 없을 것이라고 조심하라고 당부하셨다.

노성산 중턱쯤 되는 외딴집 앞에는 주변이 탁트여 조망이 매우 좋다. 보청천이 가로지르는 넓은 들녘과 멀리 남쪽으로 삼년산성이 바라보인다.

외딴집 뒤 최근 조성된 것같은 가족묘 뒤 계곡 옆 오솔길을 따라 무작정 정상을 향해 10여분 오르니 어느새 길은 희미해지고 숲이 무성하다.

계절은 아직 5월 봄이지만 숲은 이미 여름 한철이다. 노고산성 같이 인적이 드물고 길이 없는 산성 답사는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어 낙엽이 떨어질 때나 겨울을 기다려 찾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계곡으로 많은 돌이 미끄러져 내려온 것을 봐서 성벽에 다다른 것 같았다. 하늘을 가린 잡목사이로 켜켜히 쌓은 성벽의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동남쪽 성벽의 일부구간이었는데 30여m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있었다. 햇빛이 수풀에 가려 사진에 담기가 어려웠다.

 

 <노고산성 동남부 성벽> 

<노고산성 동남부 잔존성벽>

 

노고산성은 노고산의 가장 높은 동북쪽 봉우리(해발402m)에서 서쪽 봉우리(해발396.4m)사이 말안장 모양의 능선을 에워싸고 있는 마안봉형 테뫼식산성이다.

동남쪽 성벽 아래에서 올라와 반시계방향으로 산성을 돌아본다. 성벽위 내환도가 잘 확인되고 동쪽 정상 방향으로 내벽 잔존 성벽이이어진다.

신라양식의 성문인 현문 형식의 동문지 흔적도 관찰되고 동북쪽 정상부 성벽 회절부에는 높이 쌓은 치성의 흔적이 확인된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북쪽 성벽은 울창한 수목에 가려 관찰이 어렵다. 이곳은 내북면 서지리 방향이다. 내환도를 따라 사람이 다니는 길은 이미 수풀에 가렸다. 그냥 오던 길로 돌아가고 싶지만 이미 많이 돌아와서 그것마저 쉽지 않다.

 

 <노고산성 동쪽 성벽 내측>

 <노고산성 동문 주변 무너진 성벽>

 <노고산성 동문지>

 

겨우 수풀을 헤치고 가려는데 살이 올라 상당히 크고 긴 누런 뱀(구렁이)이 성급히 몸을 비비며 도망간다. 나 또한 깜짝 놀라 가던 길을 멈추었다. 한놈은 도망가지도 않고 풀속에 그대로 숨어있다. 이 상황에서는 그냥 앞만 보고 걸음아 날살려라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최상이다. 이렇듯 숲이 우거진 여름날의 산성답사는 많은 위험 요소가 숨어있다.

벌,독사,멧돼지 등등... 혼자서의 산성답사는 더 위험할 수도 있지만 함께 할 일행이나 동료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혼자서의 산행과 산성답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어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서쪽 봉우리 끝 북서쪽 성벽 회절부 쯤에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노고산성 내성>

 

북서쪽 성벽 회절부에서 내성으로 보이는 무너진 성벽이 보이고 다시 남쪽 성벽을 따라 오면 수목사이로 성내 식수를 공급하던 원형의 저수시설이 관찰된다.

현재에도 물이 고여있는 너비 7~8m 정도의 정연한 석축을 한 이 저수시설은 당시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기술을 보여 주는 유적일 것이다.

저수시설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 이 노고산성의 숨어있는 진실을 말해주는 유물들이 상당히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다.

구전에 의하면 노고산성은 백제가 초축한 산성으로 삼년산성에 주둔한 신라군과 대치했던 성이라고 한다. 신라군에게 패한 후 보청천 건너 마주하고 있는 문암산성(門岩山城)과 함께 내북면과 산외면 방향에서 보은읍내로 들어오는 교통로를 관방하며 삼년산성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활용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산성의 주요 방어입지와 함께 저수시설은 서울,경기지역의 초기 백제산성에서 관찰되는 원형의 저수시설의 발달된 형태를 보이는 것으로  볼 때 백제에 의한 초축 이후 고구려 또는 신라에 의해 경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노고산성내 판석을 쌓아 만든 원형의 저수시설>

<노고산성에서 바라본 잣미마을 일대 풍경>

 

무사히 산성을 한바퀴 돌고 희미한 오솔길을 따라 다시 내려왔다.

마을로 내려와 다시 정자에서 어른들을 만나 인사를 하였다. 잣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잣미(栢峰)"의 마을 유래를 들었지만 산성에 얽힌 이야기등을 자세히 들을 수는 없었다. 이 지역 출신 충북대 차용걸 교수는 "잣미"의 의미가 잣, 즉 성(城)이 있는 메,뫼(산)라는 뜻이라고 한다. 지명 중 잣고개,잔미,백봉, 백현,성재 등은 산성과 관련된 지명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삼국시대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노고산성은 15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역사에 기록된다.

1919년 3.1운동이 한창일 떄 이 마을출신 이용기(李龍基) 의사는 음력 4월8일 수한면 묘서리의 최용문,안만순 선생 등과 속리면의 이창선,김용석,이인하 선생 등과 함께 노고산성에서 봉화를 올려 속리산 문장대, 산외면 관모봉 등지와 연결된 횃불시위를 통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보은 최초의 3.1만세운동으로서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할 것이다.

 

비록 허물어져 찾는 이 많지 않고 바람만 잠시 쉬어가는 쓸쓸한 옛 산성이지만 등산로와 성곽 위 수풀제거를 통하여 한번 쯤 찾아와 나라와 가족을 위하여 쓰러져간 이름모를 옛 선인들의 비장함과 슬픔을 되새길 수 있고 조용히 역사의 흔적을 통하여 평안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정비되길 바란다. 최근의 무분별한 발굴작업과 복원사업은 충분한 조사와 연구, 고증을 통한 최소한의 작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 이런 옛 모습과 역사적 사건을 간직한 유적들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