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삼국시대 견고한 축성술의 발견, 보은 매곡산성(昧谷山城)(2012.05.21)

필그림2 2012. 5. 23. 14:54

삼국시대 견고한 축성술의 발견, 보은 매곡산성(昧谷山城)(2012.05.21)

- 시간이 멈춘듯 아스라한 옛 회인현(懷仁縣)의 풍경만큼 쓸쓸함을 간직한 옛성 -

 

 

 

 

경부고속도로 청원JC에서 청원-상주간 고속도로를 갈아타서 대청호로 유명한 문의를 지나 피반령터널을 통과하면 보은군 회북면이 된다. 청원-상주간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청원군 문의에서 보은으로 가려면 25번 국도를 이용하여 피반령(皮盤領,해발360m)을 넘어야 했다. 길이 참 편해지긴 했지만 옛 정취는 조금씩 사라지고 산과 산을 관통하는 고속도로의 높은 교각들이 새로운 볼거리가 되고 말았다.

피반령터널을 지나 회인IC를 만나기 직전 고속도로 우측으로 야트막하게 붙어있는 산이 매곡산성이 있는 아미산(蛾眉山,해발186.7m)이다. 회인IC를 나와 옛 회인현 치소였던 회북면 소재지인 중앙리와 부수리로 향한다.

매곡산성이 있는 회북면 일대는 삼국시대 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지금의 문의면 일대)에 소속된 미곡현(未谷縣)이었다가 신라에서 이 지역을 경영하면서 그대로 미곡현(未谷縣)이 되었고, 경덕왕 16년(757년)에는 매곡현(昧谷縣)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연산군(燕山郡:지금의 문의면 일대)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회인현으로 개칭했으나 현종 9년(1018년)에 청주(淸州)의 속현이 되었다. 대한제국기인 1895년에는 공주부 회인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충청북도 회인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통폐합 때 회인군(懷仁郡)이 폐지되고 읍내면,서면,동면이 회북면으로, 남면,강외면·서면이 회남면으로 되어 보은군에 통합되었다.

 

<매곡산성 전경-동남쪽>

 

 

매곡산성은 회북면 소재지 북쪽 아미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산성으로 남쪽은 금강의 지류인 회인천이 흐르고 있어 천연 해자역할을 하고 있고 그 앞쪽으로는 넓은 평야와 면소재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 지역은 백제와 신라가 대립하고 있던 6세기 후반이래 신라 영토인 동쪽의 삼년산군(三年山郡)과 경계를 하고 있는 곳이었다. 백제 영토로서 가장 동쪽에 있던 금강 상류지역 여러 산성들 중에 하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둘레 1,152척, 높이 8척의 석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포백척으로 환산하면 둘레 약 538m, 높이 3.7m이다. 1998년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에 의한 지표조사 결과 대략적인 길이는 672m이고, 성벽의 높이는 최고 15m 이상으로 추정하였다.

축성의 재료는 이 지역에서 쉽게 채취할 수 있는 흑색 점판암을 얇게 쪼개 사이사이 점토를 섞어 층층이 쌓아 매우 견고하고 섬세한 축성술을 보이고 있어 매우 놀라웠다. 이 지역에는 이러한 점판암을 얇게 쪼개어 축성한 산성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마을 곳곳에는 점판암을 쪼개어 담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풍경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현재 가장 잘 남아있는 성벽은 남문으로 추정되는 곳의 너비 약 7m, 높이 약 4m 정도의 우측 측면부 성곽이다. 이곳에서 한참 성곽을 만져보고 쳐다봤다.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렇게 원형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에 성곽의 견고함에 놀라워함을 넘어서 성스러운 존재로까지 느껴진다.

 

<매곡산성 남동쪽 성벽 흔적>

<추정 남문쪽 우측 성벽>

<정밀하고 견고한 매곡산성 잔존 성벽> 

 

문지는 4곳으로 추정되고 여러 곳의 치성이 확인된다.

매곡산성에서 출토되는 유물로는 청동기시대 무문토기편과 삼국시대 토기편과 와편, 신라시대 굽다리접시(高杯)편, 고려초기 와편과 도기편,  조선초기 분청사기편등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이른 시기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았으며 삼국시대에 최초로 산성이 축성되어 고려를 거쳐 조선초기까지 유지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매곡산성은 후삼국시대 이 지역의 호족인 공직(龔直)이 독자적 세력을 형성한 곳이기도 하다. <고려사> (열전)에 공직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다.

공직은 후백제 세력이 강했던 서기 910년경 견훤에 귀부하였으나 930년경 고려의 세력이 강해지자 다시 왕건에게 귀부하여 매곡산성 일대의 독립적 지배권을 유지하였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936년) 한 3년 뒤인 태조 22년(939년) 이후 더 이상 공직과 그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는것으로 봐서 이 지역의 정치적,군사적 중요성이 떨어졌음을 말해준다.

산성 내부는 무덤과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는데 2007년 경작지 소유주가 진입로를 만들면서 북쪽 성벽 일부가 원상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매곡산성내 평탄지>

 <동남쪽 회절부에서 바라본 남쪽 풍경>

<인산객사와 매곡산성>

 

매곡산성은 1998년 지표조사 이후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견고하고 정밀한 축성 흔적으로 보아 장기간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시간이 멈춘듯한 조용하고 평온한 옛 회인현을 돌아다닐땐 발걸음마저 조심스럽다.

현재 매곡산성 아래 회북면 소재지인 중앙리와 부수리는 분주했던 옛 회인현의 풍경들은 사라지고 조용한 작은 시골마을로 전락하였다. 회인객사(인산객사)와 회인향교, 회인초등학교내 현감들의 선정비 등 옛 회인현의 흔적들이 남아있어 그 옛날 영화를 말해줄 뿐이다.

온듯 안온듯한 나그네는 과거와 같은 현재, 현재 속의 과거. 옛 회인현을 다시 빠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