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명활산성(明活山城), 신라 서라벌 동해구(東海口)를 지키다.(2012.04.27)

필그림2 2012. 4. 27. 22:53

명활산성(明活山城), 신라 서라벌 동해구(東海口)를 지키다.(2012.04.27)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파사이사금 22년(101년) 2월 월성을 축성하고 그해 7월 왕의 거처를 월성으로 옮겼다.

신라는 고구려,백제와 달리 궁성 주변으로 나성을 쌓지 않고 경주 분지의 자연환경을 고려하여 사방에 산성을 쌓아 궁성을 방어하였다.

신라 초기에는 궁성과 가까운 도당산성(都堂山城),남산성(南山城),명활산성(明活山城)을 축조하였으며, 이후 도성 방어는 더 외곽으로 확장되어 동쪽은 바다와 인접한 지리적 특성상 명활산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서쪽은 선도산성(仙桃山城또는 西兄山城), 남쪽은 남산신성(南山新城)과 고허성(高墟城)), 관문성(關門城), 북쪽은 북형산성(北兄山城)과 작성(鵲城 또는 鵲院城), 부산성(副山城)을 축성하여 도성 주변과 그 외곽 방어의 범위를 넓혔다.

 

명활산성은 동해안으로 상륙하는 왜와 동해안 해안선을 따라 남진하는 북방세력과 고구려가 신라 도성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되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명활산은 신라가 성립하기 이전인 서라벌의 6부연맹체제 떄 경주 배씨 시조인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촌장 지타공(祗沱公)의 탄강지로 알려져 있어 신라초기 부터 신성시되었으리라 보여진다.

산성은 북쪽의 비교적 평탄한 흰등산과 그 서쪽의 장군봉을 둘러싸고 있는 약 9.5km의 포곡식산성으로 북쪽 외성은 석성, 남쪽 외성과 함께 내성은 토성으로 축조하였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마립간 4년(405)에 왜가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으로 봐서 그 이전에 이미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을 쌓는 수법에서도 앞면만 대충 가공한 돌을 바른층 쌓기 한 것으로 봐서 신라 초기 축성 방식을 보이고 있다. 능선으로는 내탁으로 계곡사이로는 내외협축을 하였다.또한 성벽외부로 보축을 견고히하여 2중성벽을 연상하게 하였다.

 

<삼국사기>에 자비마립간 18년(475년) 월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기 위해 궁성을 명활성(明活城)으로 옮겨 소지마립간 10년(488년)까지 13년간 임시 궁성의 역할을 했다.  선덕여왕 16년(647년) 귀족세력인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이 명활산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김춘추와 김유신 등의 왕권세력이 10여일만에 진압한 뒤 신라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1988년 산성의 북서쪽에서 높이 66.8㎝, 최대 너비 31.0㎝, 두께 16.5㎝의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가 발견되었다.  비문에는 공사 총책임자, 공사 실무자, 공사 담당 위치와 거리, 축성참가자 수, 공사기간 등의 기록이 있어 명활산성의 축성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비문 첫머리의 '신미년'(辛未年) 간지는 진흥왕 12년(551년)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봐서 그 이전에 만들어진 명활산성이 대대적인 보수 또는 석축으로의 개축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경주시내에서 알천을 따라 보문관광단지로 이어지는 도로를 가다가 보문삼거리에서 보문호반도로로 조금 가면 우측으로 명활산성 안내판이 보인다. 이곳을 따라 들어가면 계곡입구에 복원된 북쪽 성벽이 나온다. 복원된 성곽 동쪽 끝에서는 발굴조사가 한창이었다. 답사를 위해 복원된 성벽 서쪽 끝으로 난 오솔길을 오르려는 데 발굴조사기관 관계자로 보이는 젊은사람이 어떻게 온거냐, 시굴,발굴조사 구간의 사진촬영은 절대 안된다는 심문하는 듯한 말과 다짐을 하고서는 내려갔다. 다행히 강압적이지 않아서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답사를 하다 마주치는 조사단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행동, 심지어 멀리서 구경하는 것조차 못하게 하는 행위는 즐거운 답사의 기분을 망쳐버린다.

요즘엔 많이 개방되어 현장설명회에 일반인들이 참관도 할 수 있고 보고서 열람도 가능하지만 아직도 유물 발굴과정과 학문적 성과의 공개에 있어서 그들만의 폐쇄적인 학연,지연의 악습이 남아있는 곳도 여전히 많다. 또한 무분별한 개발에 의한 구제발굴과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사단법인발굴조사기관은 고고학과 발굴을 단지 치적과 돈벌이로만 생각하는것이 아닌가하는 일부 학계의 우려섞인 반응도 있다.

 

복원된 북쪽 성벽을 따라 한창 발굴중인 북문지를 지나 시굴을 위해서 성벽 곳곳을 허물어버린 흔적들과 중장비의 이동을 위해 만들어 놓은 길이 어지러웠다.

중장비 이동길과 오솔길을 따라 허물어진 성벽이 잘 관찰되었으며 작은 계곡에는 수구의 흔적도 찾을 수 있었다.

1m 남짓의 말뚝같은 일제 조선총독부 고적 안내비가 세월의 무게에 반쯤 기울어져 기약없는 자신의 처지를 읍소하는 것 같았다. 비록 일제시대 안내비이지만 하나의 역사적 자료로 보존되었으면 한다. 북동쪽 정상부에도 부분적으로 성벽의 시굴조사가 이루어진 흔적과 멀리 허물어진 성벽이 이어지는 동쪽으로는 중장비를 이용하여 흘러내린 성돌을 걷어내고 있었다.

대부분의 성벽이 허물어져 버렸지만 육중하고 견고했던 명활산성의 옛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명활산성 동쪽 구간에서 바라보는 보문호와 주변의 연초록빛 신록의 산야는 나의 눈을 정화해주며 평온한 봄날의 여유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보문분지 일대가 호수로 변하지 않았던 그 옛날 웅장한 불탑(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된 고선사지 석탑,천군동 쌍탑 등이 현존)들이 즐비한 사찰과 많은 민가가 거주했었을 것이며 동해로 쳐들어오는 적을 이 명활산성에서 관측하고 방어했을 것이다.

오솔길을 따라내려 가면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에 정토사라는 작은 절집이 있다. 이곳은 북문지와 비슷한 지형으로 내외협축의 성벽이 남아있다. 이 절집에서 키우는 진돗개의 경계로 더 이상의 성곽 답사가 어려웠다. 다시 북분지 방향으로 돌아왔다. 성곽 총 연장의 약 5분의 1정도만 둘러볼 수 밖에 없었지만 명활산성의 아련한 흔적을 따라 걷는 봄날의 성곽답사였다. 

 

경주시는 2008년 명활산성복원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2009년 사유지 3만1000여㎡를 매입했으며 산성주변 2만5000여㎡에 수목을 제거했고, 2012년 현재 북문지 주변 발굴조사와 북동쪽 성벽의 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2016년까지 사업비 400억원을 투자해 명활산성(明活山城) 9.5km 중 사업비 305억원을 들여 석성 4.5km를 복원 정비하고 36만5천여㎡의 사유지 매입 및 발굴사업에 95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단다. 이처럼 명활산성이 잘 정비되어지면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인 경주역사지구의 또 다른 볼거리와 의미를 남기리라 생각되어지지만 한편으론 졸속 복원으로 인하여 옛 멋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근심이 되기도 한다.

 

 

<참고자료>

<명활산성에 대한 일고찰> 신세정, 2004 영남대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경주인터넷신문 2009.8.27  기사

 

 

 <복원된 구간과 발굴중인 북문지 주변 성곽>

 <명활산성 북쪽 성벽>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고적76호 명활산성 안내 비석>

 <장군봉 부근에  남아있는 성곽 여장>

 <허물어진 명활산성 북동쪽 성벽 내측>

 <명활산성 동쪽 체성>

 <명활산성 앞으로 보문호가 평화로이 바라보인다>

 <비록 허물어졌지만 육중한 명활산성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명활산성 동문지 부근 옛 성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