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5세기 후반 신라 성곽의 정수(精髓), 보은 삼년산성(2011.12.29)

필그림2 2012. 1. 1. 08:54

5세기 후반 신라 성곽의 정수(精髓), 보은 삼년산성(三年山城)(2011.12.29)

 

 

 

<삼년산성 북쪽 성벽 내측>

 

보은읍 동쪽 보청천 건너 어암리 오정산(해발350m) 정상에 있는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왕(慈悲王) 13년(470)에 공사를 시작해 3년 후 완공하였다.소지왕((炤知王) 8년(486)에는 일선군(一善郡) 장정 3,000여 명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다.

삼국시대 이 지역의 이름이 삼년군 또는 삼년산군 이었으며 그 치소로도 이용했었을 것이기에 삼년산성이라고 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보지만, 『삼국사기』에는 “삼년이라는 것은 역사(役事)를 시작하여서부터 끝날 때까지 3년이 걸렸으므로 이름한 것이다(三年者 自興役始終三年訖功 故名之)" 라고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에는 오항산석성(烏項山石城)으로 나오고 “둘레가 1,220보이고 험하고 높다. 성안에 샘 6개가 있어 사철 마르지 않으며, 군창이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3,599척,  높이 18척이고 성내에 우물이 5개소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烏頂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680m이고, 동서남북으로 형식이 다른 문지 4개소, 치성 7개소, 우물지 5개소, 아미지(蛾眉池)라는 저수시설 1개소, 건물지 등이 남아있다.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더욱 견고히 하였다.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최고 높이 22m, 폭 8~10로 당시 엄청난 토목공사의 결과물이다. 축성 방법은 대부분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은 내외협축과 장대지와 지대가 높은 지역에 부분적으로 내탁을 하였다.

 

 

<삼년산성 동쪽 성벽>

 

신라 소지왕(炤知王) 470년 때에 금강 상류인 이 지역을 영토로 하여 백제와 연합한 후 고구려 군을 크게 격파하고, 486년에 이르러 장수 실죽(實竹)을 통해 이 삼년산성과 굴산성(屈山城, 옥천군 청산, 청성면 산계리 토성과 그 북쪽의 산성으로 추정) 등을 수축하였다. 신라는 이곳 속리산 일대를 확보하여 한강 상류와 금강 상류를 장악한 후  고구려 및 백제 방면 진출의 최대 요새가 이곳 삼년산성에 완성한 것이다.

보은지역은 5~6세기 삼국의 접경지대로 시대와 초축대상을 달리하는 산성이 14개소가 분포하고 청주,옥천,영동,상주 등 주변 지역을 확대해보면 약 60여개의 산성이 분포하고 있다.  이처럼 삼년산성은 영동과 상주의 경계에 있는 백화산의 금돌성(今突城)과 함께 서쪽 금강유역 확보와 백제 공략의 거점,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와 북진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그 뒤 헌덕왕14년(822)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김헌창(金憲昌)이 난을 일으켜 이곳을 거점지로 이용하였고, 918년 왕건이 후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이곳을 직접 공격하다가 실패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고,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 천기의 삼국시대 고분이 있다고 한다.

삼년산성은 축성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몇 안되는 삼국시대 성곽으로 고대 축성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유적이자 삼국시대 최고의 성곽으로 꼽힌다.

 

 

 

보은읍내에서 동쪽 군청방향을 바라보면 정면으로 야트막한 오정산 정산에 당당한 모습의 산성을 볼 수있다.

산성 아래까지 도로와 주차장이 시설되어있다. 대부분의 답사는 정문인 서문에서 시작한다.

서문주변의 서쪽 성벽은 복원한 구간이라서 규모에 비해 큰 감흥을 느끼기에는 조금 미흡하지만 성문지 흔적과 수래가 이동할 수 있도록 홈을 파낸 유구등이 남아있고 아미지라는 예쁜 이름의 저수시설이 있다. 그리고 성내 넓은 건물지에 설치되어 있는 대장간 체험은 청소년들의 훌륭한 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문지에서 본 삼년산성 서쪽 성벽, 2010.5>

 

복원된 서쪽 성벽을 따라 반시계방향으로 이동하면 작년까지 복원이 한창이던 남문지 주변이 마무리 되어있었다. 남문지는 현문형식으로 복원되어 있었다.

남문지를 지나서부터 동문지를 지나 북문지까지는 1,500여년의 세월 동안 풍파를 견뎌낸 옛 성벽구간이다.

많은 부분의 성벽이 무너져버렸지만 아직도 여전히 철옹성 같은 삼년산성의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삼년산성의 위용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산성을 돌아보며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 흔적 없고 서걱거리는 낙엽과 바람에 날리는 들풀들 사이로 이끼낀 옛 성돌의 반쯤 허물어져 폐허와 같은 그런 모습에 인생무상의 허전함과 함께 욕심과 상념이 잠깐이나마 사라지고 인간애와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폐허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절정의 풍경을 이런 옛 성벽에서 느낄 수 있다. 이곳과 가까운 상주 견훤산성과 영월 정양산성 그리고 이번 여름에 만난 대야리산성 같은 곳에서도 이런 느낌을 받았었다.

요즘 대부분의 성곽들이 무분별하게 복원 또는 보수로 원형을 잃어 왜곡되거나 옛 멋을 반감시켜버리는 것을 볼 때 복원과 보수가 역사적 의미 부여나 관광상품화로써의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부분적으로 무너지거나 원형을 잃은 그 자체에도 의미가 있으며 최대한 보존하는 것도 역사적,정서적으로 공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문형태의 동문지 주변도 복원이 한창이다. 동문 양 옆으로 옛 성벽구간을 뜯어내고 성 안팎으로 건설기계용 길을 내어 놓았으며 옛 성돌이 아닌 다른 돌을 이용하여 참 어색한 복원이 이루어질 것이 분명해보였다.

동문 복원 현장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북동치성과 복원된 북문지 사이의 북쪽 성벽의 옛스러움과 웅장함, 정밀한 축성술 그리고 주변의 시원스런 풍광에 또 한번 놀란다.

 

삼년산성에 오르면 왜 이곳이 5~6세기 삼국의 대결구도에서 전략적 요새가 될 수 있었는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어젯밤  이곳 보은지역에 살짝 내린 눈이 따뜻한 날씨로 녹아내려 질퍽해진 성곽길을 따라 걷기에 조금 불편하기도 했지만 서쪽 성벽과 북쪽 성벽에서 바라보이는 보은 들녘의 평화로움과 속리산,구병산과 같은 아름다운 산맥들을 감상하면서 심신을 정화하기에 좋은 답사길이었다.

오랫만에 아내와 단둘이 거닐며 산성에 대한 역사 이야기와 인생 이야기를 함께하며 정겹게 거닐어 더 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삼년산성 북쪽 성벽, 2010.5>

 

(성내에서 대장간 체험을 운영하는 <보은대장간>을 보은 읍내로 직접 찾아가서 캠핑용 도끼를 기념품쪼로 하나 구입했다. 직접 담급질하고 두드리고해서 만든 순수 국산 전통 농기구라서 더욱 정감이가고 견고해보였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잘 팔린다는 독일제 무슨무슨 제품보다 훨씬 듬직하고 견고해보였다. 직접 사용해보니 장작 패기에 제격이었다. 제품마다 보은대장간이라는 낙인을 찍어 책임을 더하는 것 같았다.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보은대장간을 조금이나마 응원해주고 싶다.)

 

 

<삼년산성 북문지, 2010.5>

 

<삼년산성 서문지 유구>

 

<참고자료>

문화재청 홈페이지

<보은의 성곽> 보은문화원(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