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남한강 상류의 성곽 1-영월 정양산성(2011.6.28)

필그림2 2011. 7. 19. 20:00

남한강(동강) 유역 천혜의 요새-영월 정양산성(2011.6.28)

 

장마가 잠시 소강상태에 있다. 고온다습한 날씨 때문에 쉬이 지쳐버린다.

작년 막 봄이 찾아오려고 하던 3월초 정양산성(正陽山城)을 답사했었다. 그때 폐성 어디즈음에서 바라보던 산과산을 헤쳐 굽이치는 남한강의 물줄기와  그 아련한 폐허의 미를 수풀우거진 여름 어느날 다시 한번 느껴보리라고 다짐했었다.

고성(古城)의 장중하고 처연한 멋스러움과 그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시원스런 주변 경관은 나목들에 의해 속살을 드러내는 겨울날에 느끼는 멋과 여름날 짙푸른 수풀사이로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고 허물어질듯 허물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성곽의 멋은 분명 다르다. 옛 성벽과 그 돌 틈새에서 이어오는 생명들의 극명한 대조에서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한여름을 향해 변화하는 오후 풍광들을 감상하며 영월로 향하였다.

 

<정양산성>

영월로 가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영동고속도로 여주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잠시 갈아타 감곡IC에서 국도 38호선을 이용하면 주변 풍광과 함께 시각의 즐거움을 더 할 수 있다. 영월읍내를 지나쳐  연하리 근처에서 31번 국도로 갈아타 영월역을 조금지나 덕포사거리에서 88번 국도를 이용해 남한강변을 따라 영월LNG발전소를 지나자마자 정양리(正陽里) 입구 계족산(鷄足山 ,890m) 등산로 주차장에 도착했다. 초행길이 아니라서 길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정양리르 향해 걷다가 밭사이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 바로 정양산성과 계족산으로 향하는 등산로이다. 남한강을 옆으로 끼고있는 호젓한 산길을 걷다보면 먼저 "정종대왕태실과 태실비(正宗大王胎室및胎室碑)"를 만난다.  이곳의 정종(正宗)은 조선 22대 개혁군주 정조(正祖)를 말한다.

정조(正祖)가 탄생한 이듬해인 영조(英祖) 29년(1753)에 이곳 영월읍 정양리 태봉(胎峰)에 처음 조성(造成)하였고 정조(正祖)가 사망하자 순조(純祖) 원년(元年,1800)에 가봉(加封)을 하고 태실비(胎室碑)를 세웠다. 일제시대인 1929년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에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태실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태항아리들를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경내로 옮겼다. 해방 후 태실이 있던 태봉에 석회광산이 생겨 태실이 훼손되고 급기야 매몰되었던 것을 1967년 영월화력발전소의 도움으로 영월읍내 금강공원(금강정)으로 이전하여 관리해오다가 1997년 원래 자리와 가장 근접한 이곳으로 이전,복원하기에 이르렀다.

영월이라하면 조선 단종의 애사(哀史)로만 잘 알려져 있는데 조선의 다른 임금의 유허가 남아있다는 것도 이채롭다.

정조대왕 태실을 지나 맑은 계곡도 지나고 녹음 짙은 산길로 접어든다. 이곳에 오면 느끼는 것인데 이곳의 산길은 다른 어느 곳보다 유난히도 검다. 이번에 알게된 것인데 과거 영월화력발전소의 석탄재가 날아와 생긴 현상이라고 했다. 

 지열과 높은 습도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정상을 향해 오르다보면 희미한 흔적의 외성(外城) 문지를 먼저 만나고 조금 더 올라가면 본성인 내성(內城) 서쪽 성벽와 넓은 건물터에 이른다. 정양산성은 한때 왕검이라는 장군이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쌓았다고 해서 왕검성(王儉城)으로 더 잘 알려져있었다.

지난 2000년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에 의하여 지표조사 용역을 통해 성벽과 현문식 문지,곡성과 치성,여장,후대에 지형적으로 취약한 북서쪽을 보완하기 위해 증축한 외성 등이 조사되어 5~6세기 삼국시대에 축성한 성곽으로 밝혀져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2호로 지정 관리되어오다가 2003년 국가사적 제446호로 격상되었다.

태백의 금대봉에서 발원한 남한강 상류지역은 굽이굽이마다 삼국시대의 군사적 요충지로써 정선 애산리성((愛山城),신월리산성(祈雨山城),송계리산성(長贊城),고성리산성(古城里山城) 등과 영월에 정양산성을 비롯한 완택산성(完澤山城),태화산성(泰華山城),대야리산성(大野里山城),단양 영춘의 온달산성(溫達山城) 등 고구려의 남하와 신라의 북진로에 많은 산성이 축조되고 뺏고 빼앗기는 목숨을 건 격전지가 되었다.

 

<정양산성 남서쪽 곡성부 성벽>

정양산성 내성은 동고서저(東高西低)의 마름모꼴 형태의 고로봉식(栲栳峯式) 산성으로 성벽은 지형에 다라 내외협축(內外夾築)과 내탁(內托)으로 점판암을 잘 다듬어 정교하게 쌓았다. 외성은 남벽과 서벽 남쪽 구간은 자연 암벽을 이용하였으며 축성이 정교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후대에 주민들이 피난을 위해 급조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성의 규모는 내성 둘레 약 1,060m, 외성 길이 약570여m로 성벽의 총연장은 1,630m이고, 성벽의 두께는 6~9m, 성벽의 높이는 낮은 곳은 6m에서 가장 높은 동벽은 15m에 이른다.

문헌 기록에는 1454년에 완성한 <世宗實錄地理志>에 "江原道 寧越郡 ‘正陽山石城 在郡東十里 周回七百九十八步 內有一泉 大旱則或渴 又有軍倉五間"이라 기록하여 둘레를 798보라 하고 샘이 하나 군창이 5간이 있다고 하였다. 1530년에 간행한 <新增東國輿地勝覽>영월군 고적조에 "正陽山城 石築 周二千三百十四尺 高十九尺" 라 하여 둘레를 2,314척, 성벽의 높이를 19척이라 하였다. 또한 순조 때 영월부사를 지낸 이효관의 <解由書:임기를 마치고 떠나면서 남긴 인수인계서>에서는 "東面正陽山城, 周回布尺三千四百七十七尺, 高十九, 東邊三十尺, 北邊十八尺, 南邊二十八尺, 西面八十三尺" 으로 기록하여 포백척(布帛尺)으로 둘레 3,477척이라하고, 동변 30척,북변 18척,남변 28척,서면 83척 등으로 기록하였다. 현존 정양산성의 내성 둘레인 1,060m의 수치와 포백척(布帛尺)으로 환산한 수치가 거의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

2010년 <강원고고문화연구원>에 의해 내성 건물지 주변과 성벽 일부구간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신라 유물로 보이는 기와류와 토기류가 발견되었으며 고려시대 유물도 발견되었다. 현재 건물지 앞 서쪽 성벽 내부를 발굴증인데 신라계 토기 파편과 문경 고모산성 배수구와 거의 흡사한 형태의 마름모꼴 배구수가 확인되고, 전형적인 신라 형식인 현문식 문지로 보았을 때 신라가 초축한 성곽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지만 동남쪽 남한강이 조망되는 곡성 하부형태가 완만하게 들여쌓기 수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 의한 초축 산성이라는 것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정양산성의 초축 주체가 어느 나라인가는 발굴이 더 진행되어 자료가 축적되고 더 연구되어야 알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삼국시대 어느 시기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산성이었음은 의싱의 여지가 없다.

 

<장중한 동쪽 성벽>

<남동쪽 곡성부 들여쌓기 방식의 고구려 축성양식 >

 

정양산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동남쪽 성벽에서 조망되는 남한강의 굽이쳐 흐르는 풍광과 태백산맥의 준령들은 산성답사의 감동을 더한다.

약15m의  동벽 석축은 벽돌로 쌓은 것처럼 정교하고 수직에 가까워 아찔하면서도 경이롭다. 1,500여년의 세월을 버텨 온 장중함을 절정을 보여준다.

보은 삼년산성,단양 온달산성,상주 견훤산성 등에서 느껴지던 멋스러움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성곽유적은 단순히 군사유물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민중들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희망이 담겨져 있는 유적다.

성곽으로 올라오는 길도 혼자고 내려가는 길도 혼자다. 혼자라는 것이 외롭지만은 않을 때도 있다.

어둑해지는 산성을 내려와 영월역 앞 다슬기해장국집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동남벽에서 바라본 전경>

 

<영월화력발전소 이야기>

영월화력발전소는 1935년 조선총독부와 일본전력연맹이 일본의 발전용 석탄 공급과 남한지역 전력공급을 위해 영월탄전을 개발하고 1935년 7월 조선전력(주)에 의해 착공되어 1937년 10월에 5만kW급 발전소가 준공된 후 해방과 6.25을 거쳐 1965년에는 우리나라 전력수요의 50%까지 담당하기도 했다. 현재 우리나라 전력공급 능력이

7,883만5000 kW 라는 것과 비교해보면 40여년 전 전력사정에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함백지구에서 생산된 국내탄(무연탄)을 사용하여 지역산업과 전력공급에 큰 기여를 하다가  2001년 설비노후로 완전 폐기되었다가 지역발전사업의 일환으로 옛 부지에 2010년 10월 90만kW급 친환경 천연가스 발전소를 준공하였다. 이렇듯 영월화력발전소는 우리나라 발전사(發電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