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세마대 전설이 있는 임진왜란 승전지-오산 독산성(2011.7.18)

필그림2 2011. 7. 21. 05:16

세마대(洗馬臺) 전설이 있는 임진왜란 전승지, 오산 독산성(禿山城)((2011.7.18)

 


사적 제140호(지정명칭은 독산성 및 세마대지).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산155번지 일대 독산(禿山)에 위치한다. 오산시에서 비교적 높은 지형인 서부지역으로 수원부의 읍치였던 융릉에서부터 독산으로 이어진 넓은 들판과 낮은 구릉부의 한가운데 있어 산성입지로는 좋은 환경을 차지하고 있다. 산성 서쪽으로는 광교산에서 발원한 황구지천이 흐르며, 주변으로 화성 마하리, 당하리 유적 등이 분포한다. 지리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편찬된『만기요람(萬機要覽)』「군정편(軍政篇), 관방(關防), 경기(京畿)」, 이정구(李廷龜)의 『독성산성기(禿城山城記)』에 “성이 넓은 들판 가운데 있어서 험준하게 막힌 곳이 없고 산이 우뚝하게 길 옆에 솟았는데, 숲이 없어서 바라보기에 밋밋하다고 독성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이 성이 중요한 자리에 있어 나라안의 요충이 된다.”라고 하였다. 독산성은 1594년 경기도 관찰사 유근(楡槿)이 산성을 수축하였고, 1595년 포루를 갖추었으며, 1597년에는 왜군의 조총을 방어하기 위하여 석차와 포차를 배치하고 성밖에 목책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종료되고 독산성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1610년(광해군 2년) 방어사 변응성이 다시 수축하였으며, 이후에도 수·보축을 계속하였다. 1796년에 수원성 축조와 함께 개축하였고, 1804년에는 산성의 남쪽에 암문을 설치하였다.
1957년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는 세마대지가 복원되었고, 1982년에는 성벽 일부가 정비·복원되었다. 임진왜란 때 주요 격전지로서 권율장군과 관련하여 세마산(洗馬山), 세마대(洗馬臺)라고 불린다.
2000년 독산성에 대한 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산성은 독산 정상부(해발 208m)와 7∼8부 능선을 이용하여 축조한 테뫼식 형태의 석축산성이다. 전체둘레 1,095m이다. 북쪽은 봉우리 바로 아래의 9부 능선부로 성벽을 축조하였으며, 남쪽은 봉우리 아래 6∼7부 능선부를 크게 돌아 성벽으로 연결하여 전체 지세는 북고남저형을 이룬다. 성벽의 바깥쪽은 석재를 이용하여 정연하게 쌓았으며, 안쪽은 막돌과 흙으로 채워 넣고 내벽을 축조하지 않아 편축식이다. 성돌은 자연석을 조금씩 다듬었으나 정연하지는 않고, 크기도 사람 머리만한 크기에서부터 가로길이가 약 2m에 이르는 바위까지 다양한 편이다. 성벽의 현재 높이는 대부분 2m 정도이지만 동쪽 수구 부근이라든가 남동쪽 치에서처럼 5∼9m에 이르는 곳도 있다. 성벽 위에는 여장시설이 설치되었는데 보수시 전돌이 수습되어 여장의 상부를 포방전으로 축조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출입시설로는 동서남북의 성문 4곳과 암문 1곳을 두었는데 남문과 서문에는 문루(門樓)가 있었으나 동문과 북문에는 문루가 없다. 배수를 위한 수문은 3곳이 있었으며, 우물은 6∼7기 있었으나 수량이 풍부하지 못한 것으로 전한다. 치는 북문과 동북문 사이에 2개, 서문과 남문 사이에 1개, 남문과 동문 사이에 2개 등 모두 7개소이다.
산성 내부 평면배치는 3단으로 공간이 분할된다. 제1단은 성벽이 연결된 체성부이며, 제2단은 산사면에 관청과 민가건물이 입지하였던 거주공간에 해당된다. 최상단 부인 제3단은 세마대지가 자리한 정상부이다.
유물은 청동기시대 무문토기부터 삼국시대 백제의 타날문 토기류, 조선시대 백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출토되었는데 조선시대의 도기류, 백자류, 기와류가 다수를 차지한다. 초축시기는 5세기 한성백제시기로 추정된다. 경기남서지역을 방어하는 데 있어 중요 관방유적으로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에 걸쳐 군사, 교통, 경제적 요충지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김병희)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성곽봉수편) - (성곽편)


독산성봉수(烏山禿山城烽燧)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의 해발 207.6m의 산정상에 사적 제140호인 독산성(禿山城)내에 위치한다. 현재 봉수와 관련된 유지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세마대(洗馬臺)터가 봉수로 추정되는 곳이다.
초축시기는 숙종 16년(1690) 호조참판(戶曹參判) 이의징(李義徵)의 건의에 의해 설치되었다. 남으로 괴태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 청주봉수에 대응하였다.
영조 4년(1728)에 총융청 장붕익(張鵬翼)의 건의로 2거 내지봉수의 간봉으로 독산성내에 봉수설치가 주장되었다. 또한 영조 30년(1754) 호남어사 홍재(洪梓)가 완영(完營)과 수원 독성산성에 봉수 설치를 건의하여 시행하였다. 그러나 정조 20년(1796) 화성봉돈이 축조되어 2거는 용인 석성산봉수에 응하고, 5거는 흥천산에서 서봉산→ 건달산봉수를 거쳐 화성봉수에 응하였으므로 독산성봉수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응봉수의 거리는 북쪽으로 수원 화성봉돈과는 11㎞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며, 서쪽으로 8.5㎞의 거리에 건달산봉수 및 7㎞의 거리에 서봉산봉수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김아관)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성곽봉수편) - (봉수편)



독산성(禿山城)은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1964년 8월 2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40호로 지정되었다.

독산성은 다른 이름으로 독성산성이라고도 한다.

선조 25년(1592)12월 임진왜란 중에 권율 장군이 전라도로부터 병사 2만여 명을 이끌고 이 곳에 주둔하여 왜병 수만 명을 무찌르고 성을 지킴으로써 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곳이다.

독산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원래 백제가 쌓은 성일 것으로 추측되며,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쓰였을 것으로 본다. 선조 27년(1594) 백성들이 산성을 쌓고,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1602)에 당시 부사 변응성이 다시 보수하고, 그후 정조 16년(1792)과 20년(1796)에도 다시 공사했다.

성 둘레는 3,240m이고 문도 4개이지만 성 안에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이런 결점때문에 이 곳에는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이 있는데, 권율 장군이 산위로 흰 말을 끌어다가 흰 쌀로 말을 씻기는 시늉을 해 보이므로 왜군이 성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서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위키백과>




<참고자료>

오산 독산성·세마대지 시굴조사보고서(기전문화재연구원, 2001)

경기지역의 봉수연구(김주홍, 상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오산 독산성에서 통일신라~조선시대 유적 확인-(한신대박물관.2017.12) : 세마대지 동남쪽 구릉지대 발굴조사(축대 4열, 건물지 2기, 석축유구 2기, 배수로 2기 확인)


 

 <독산성 동벽과 보적사>

 <독산성 동문>

 

<세마대 현판,2009.6 촬영>

<남동2치> 

 <옹성형태의 남문>

 <남문의 정교한 축성형태>

 <남문과 남쪽 성벽>

 <서문과 서쪽 성벽>

<북쪽 성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