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호남의 금강 월출산(月出山) 산성대 일대의 영암산성(월출산성)과 을미왜변의 승전지 영암읍성('21.03.31수)

필그림2 2021. 4. 25. 22:25

호남의 금강 월출산(月出山) 산성대 일대의 영암산성(월출산성)과 을미왜변의 승전지 영암읍성(霊岩邑城)

 

호남정맥의 거대한 암류가 남해바다와 부딪치면서 솟아 오른 화강암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지금과 같은 월출산이 만들어졌다. 월출산의 정상은 천황봉(809m)이며 신라 때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천황봉을 중심으로 북쪽과 동쪽은 큰 바위가 굵직한 능선줄기 위에서 웅장한 풍경을 만들어 내며, 남쪽과 서쪽지역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마치 탑을 이룬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월출산(月出山)의 면적은 56.22k㎡로 비교적 작지만 다양한 동·식물이 분포하며, 국보를 비롯한 수준 높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어서 1988 2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월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래 안전상의 이유로 폐쇄해오다가 2015 10월 개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산성대 능선에 봉화대(산성대)라고 전해지는 봉우리가 있다. 산성대는 천황봉과 영암읍이 잘 조망된다.

 

월출산 산행 준비 때부터 산성대라는 지명 유래가 궁금해졌다. 산성대일대가 봉화대였다고 하며, 봉화대를 출입하는 입구에 출입문을 만들어 월출제일관이라는 각자를 세겼다고 했다. 이곳의 암릉이 마치 산성의 성벽 같아서 산성대라고 이름 지어 졌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했다. 천황탐방지원센터에서 구름다리를 건너 사자봉을 지나 천황봉에 서서 영암과 강진 일대 아스라한 풍광을 즐기고 산성대 암릉길을 내려오면서 산성대 일대에서 혹시 이름으로 전하는 진짜 산성의 흔적을 찾을 수도 있을 꺼라 생각하고 발 아래와 주변을 잘 관찰하면서 산성대 능선을 내려왔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산성대라는 지명이 붙은 곳에 확실히 석축의 흔적이 있었다. 넓은 암반이 있고 평평한 정상부 주변으로 무수한 기와편이 널브러져 있었다. 산성대 일대는 영암읍내와 강진방향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천황봉이 올려다 보이는 곳으로 위치적으로 보아 산성의 망대 또는 봉수대, 또는 작은 보루로 추정되었다. 산성대 정상 주변을 관찰해 보니 봉수대로 사용된 불탄 흔적이나 연대 또는 연조의 흔적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산성대 아래에서부터 등산로는 유연해진다. 산성대 등산로를 따라 산성 석축 흔적으로 보이는 돌무지들을 밟고 내려온다. 분명 산성대(망대 또는 봉수대) 일대에 축성한 산성으로 보인다. 월출산 아래 영암읍내를 둘러쌓은 영암읍성과 연관된 산성으로 추정해본다. 영암읍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너럭바위 주변에 산벚나무 꽃이 흐트러지게 피어 몽환적이다. 너럭바위 주변엔 성혈 흔적도 관찰된다. 바로 아래 月出第一關이라 바위에 세로로 세긴 각자가 있다. ~관 이라는 명칭이 영남제일관처럼 보통 관문성 또는 차단성 입구 성문에 사용되는 명칭으로 보아 "월출제일관" 각자가 있는 바위는 산성(월출산성 또는 영암산성이라고 명명함)으로 들어가는 주 출입구 또는 출입문이 설치된 곳으로 추정되어진다. 영암읍내가 가까워진다. 일부 구간 정비된 영암읍성과 일부 구간 옛 영암읍성의 흔적이 관찰되어졌다.

 

언젠가 영암을 방문하게 되면 잘 알려지지 않은 영암읍성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었다. 광주로 올라가는 버스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영암읍성의 흔적을 찾아 읍내를 한바퀴 돌면서 영암향교, 활터였다는 열무정 등을 함께 찾아보면 더 의미있었을 것이다. 또한 1555(명종10) 을묘왜변 당시 왜구들이 달량진(해남군 북평면 남창)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고 영암까지 공격했을 때 관군을 지휘한 전주부윤 이윤경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무찌른 전설적인 인물 양달사(1519~1559) 장군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조금이라도 빨리 광주로 올라가기 위해서 영암읍내를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산성대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하여 읍내를 지나 버스터미널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다행히 이 길에서 영암경찰서 주변으로 영암읍성의 흔적으로 보이는 높다란 석축의 성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민가 담장으로 사용되었던 약 50m 정도 석축 구간으로 주변은 도로 확장공사와 철거로 어수선하고 일부 구간은 성벽이 파괴되고 있었다.

 

영암읍성의 초축 기록은 없으나, 문종실록(문종1, 1451)에 도체찰사 정분(鄭笨)이 하삼도의 읍성을 살피고 문종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영암군읍성은 둘레 4,369, 성의 높이는 평지에서 측정한 높이가 12, 높은 험지에서 측정한 높이가 9, 여장 높이 3, 적대 6, 문이 3개이나 옹성이 없으며 여장이 639, 성내 우물이 2, 해자는 파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성종12(1481) 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읍성이 석성이고 둘레가 4,369, 높이가 15, 성안에 4개의 우물이 있다라고 하였다. 영조대(1757~1765) 편찬된 여지도서에서도 석성이며, 둘레는 4,369, 높이 15, 치첩 1,025, 성내 연못 2, 우물이 4개 있다라고 하였다. 성벽의 길이가 4,369척인데 이를 포백척(45.73cm)에 적용하면 1,997m가 된다. 2009년 전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하여 국궁장인 열무정 일대 체성부 약 180m 에 대한 시굴조사에서 축성구조와 해자,치 등 읍성 남동쪽 부분의 읍성 실체를 확인하였다. 또한 유물로 고려시대 기와, 자기편이 확인되었고,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친 유물이 수습되었다. 따라서 영암읍성의 초축 시기가 늦어도 조선시대 초기임을 알 수 있다.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에서도 영암과 영암읍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영암군은 소읍이 아니요, 요해처이므로 성이 토성이 아니고 당당한 석축이다. 장흥부의 장녕성은 주(둘레)가 천척 안에 드는 작은 성이이니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좌정하고 있는 곳인 병영성이 삼천척이 못되고, 광나주목사라고 광주와 아울러 치는 목사 치하의 나주성이 삼천척에 얼마 넘지 못하는데, 영암성은 주가 사천삼백육십구척이고, 전라도내에서 대성으로 제일 제이를 치는 광주성과 전주성이 고(높이)가 모두 팔척에 지나지 못하는데 영암성은 고가 십오척이다라고 상세히 설명하였다.

 

영암읍성부지가 영암읍 소도읍 육성개발계획부지와 상당부분 맞물려 있기 때문에 영암군 입장이난처해졌다고 한다. 이 지역은 140억여원의 예산이 투입되어 환경정비사업이 본격 진행될 지역으로 주거환경개선은 물론 신설도로와 공원조성 등으로 주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이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영암읍성 잔존유적이 처해있는 상황을 보면 영암군은 영앙읍성 보존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읍내를 내려다보이는 기암괴석의 수석과도 같은 월출산을 바라보며, 얼마남지 않은 영암읍성의 흔적을 사진으로 몇 컷 남기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영암을 떠났다.

 

 

<참고자료>

국립공원공단 홈페이지

영암신문 영암읍성 시굴조사 학술적 가치 높아” 2009.08.17

영암군민신문 왜구 토벌할 적 임꺽정이 싸운 성, 영암읍성” 2015.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