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조선시대 태안 안흥량 일대 해안 방어와 조운선을 지키던 안흥진성(安興鎭城)('21.02.23화)

필그림2 2021. 2. 28. 23:16

조선시대 태안 안흥량 일대 해안 방어와 조운선을 지키던 안흥진성(安興鎭城)

- 안흥진성의 국가 사적 지정과 조선시대 안흥진 수군 군적부의 발견 -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 쌀쌀하지만 이미 겨울의 강한 기운을 잃은 채 계절의 마지막 끝자락을 붙잡고 힘겨운 실랑이를 한다. 따스한 오후 햇살에 얼어 녹아내린 땅에서는 봄의 기운이 새록새록 돋아나고 정월대보름도 며칠 남겨놓지 않은 2월 하순의 어느날. 2020년 11월 안흥진성의 국가 사적 지정(승격)과 2020년 6월 신진도(新津島) 폐고가(廢古家)에서 조선후기 안흥진 수군 군적부가 발견되어 큰 이슈가 되었다. 태안 안흥진성의 국가사적 지정을 기념하고, 신진도 폐고가에서 발견된 수군 군적부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서 2020년 11월 24일부터 2021년 2월 28일까지 특별전시 「안흥진과 수군 군적부-()의 깃발 나부끼고 조운선 들고나네」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접해 들었던 터이지만 이리저리 미루고 미루다 이제서야 태안 안흥 답사를 떠나게 되었다. 2010년 안흥진성 답사 후 10여년 만의 안흥답사인 셈이다.

 

충남 태안군 근흥면 최남단인 정죽리(안흥성길)와 신진도리(신진대교길) 일대 안흥항과 신진도 일대를 안흥(安興)이라고 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중국과의 사신 및 무역선의 왕래가 빈번하였고, 고려시대 수도인 개경과 조선시대 수도인 한양과 제2의 수도인 강화도로 가는 중요한 뱃길이었다. 또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군이 주둔하면서 국방을 담당하였고,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세금을 운반하는 조운선의 안전을 지키던 역할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흥량(安興梁)은 예로부터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려왔는데 바닷길이 험하여 조선(漕船)

이 이곳에서 여러 차례 패몰(敗沒)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싫어하여 지금의 안흥량으로 고쳤다" 라고 하여 해난사고가 많은 곳이었다. 안흥에 수군이 처음 배치된 것은 왜구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후기였다. 이후 1370(공민왕 20)에는 안흥량에 진수군(鎭戍軍)이 배치되고, 조선 건국 초기에는 안행량만호(安行梁萬戶)가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 후 세종 시기에는 소근진첨사가 수군을 나누어 지키는 안흥량수(安興梁戍)가 설치되었으며, 1595년 경에 제진(諸鎭) 중의 하나가 되었다가 1609년에는 거진(巨鎭)으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군사적 중요도와 국가의 안정적 세수 확보를 위하여 조선 효종6년(1655)에 안흥진성이 축성 되었다. 1993년 공주대박물관에서 실시한 안흥진성 정밀지표조사에서 발견된 "萬曆十一年癸未閏二月 結城縣(?)監(?)官 前內禁李彭祖 兵吏吳○ 下藍浦之上四十一○"명 각자성석을 통하여 선조16년(1583)에 초축되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그 이전부터 이 지역에 이미 성곽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어 진다. "石手 邊手 金愛從 淸州","以下恩津","以上恩津","石手 邊手 金加之 德山","瑞山 六十六尺" 등의 각자성석에서 청주와 덕산의 석수 우두머리인 편수(邊首,邊手) 김애종과 김가지라는 인물이 확인되었다. 이상과 같이 결성,남포,청주,은진,덕산,서산 등 충청도 지명이 확인 되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충청도 전역에서 축성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안흥진성은 전체 길이 약 1,714m의 포곡식 산성(包谷式 山城)으로 충청도 태안지역에 분포해 있는 수군진성(水軍鎭城) 중 가장 큰 규모다안흥진성은 조선 효종6년(1655) 이후 200여년간 서해안 조운로의 주요 거점을 담당하고, 한양과 강화도의 안정적인 방어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고종3년(1866)에는 안흥방어영(2품 방어사 군영)으로 승격되었고, 18세기 후반에는 충청수영 행영(行營)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는 등 성쇄를 이어오다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군과 관군의 충돌 과정에서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면서 폐성되었다. 안흥진성은 지난 1979 7 3일 충남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됐으며 이후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20 112일 국가 사적 제560호로 지정되었다.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서 바라본 안흥항과 안흥진성>

안흥진성 답사는 서문에서 시작하여 성안마을로 들어가서 우측 민가 앞을 지나 곧장 언덕으로 오르면 남문에 이른다. 2010년 9월 안흥진성 답사때 이곳 남문 일대에서 가을 햇살에 일렁이는 은빛 억새 군락과 안흥항과 신진도가 바라보이는 서해의 잔잔한 파도에 빛나는 물결은 감동이었다. 지금 일부 성벽 구간이 단정하게 정비되었고, 운동기구와 현대식 정자가 설치되어 있지만 여전히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이다. 신진도 동쪽 끝에 태안해양유물전시관이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고, 안흥내항과 신진도를 연결한 아치형 인도교 안흥나래교도 아름답다. 남문에서 동문을 지나 북문 일대까지는 군사보호구역이라서 2중의 철조망을 따라 이동해야 한다. 군사보호구역 내 출입이 불가능하지만 다행히 성벽 상태와 주출입구인 동문의 홍예가 잘 남아있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성문은 동,서,남,북 4면에 모두 개설하였으며, 동문은 홍예문이고, 나머지는 평거식 성문으로 모두 문루가 설치되어 있엇던 것으로 파악된다. 1927년 간행된 「서산군지(瑞山郡誌)」에 문루 명칭은 동문이 수성루(守城樓), 서문이 수홍루(垂虹樓), 남문이 복파루(伏波樓), 북문이 감성루(坎城樓)로 기록하였다. 북문에서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 죽림저수지 방향을 바라보면 가슴이 탁 트인다. 남문과 이곳 북문 성벽 위에는 총안이 잘 남아있다. 굴곡이 멋스러운 성벽을 따라 태국사를 지나 서문으로 다시 내려와 안흥진성 답사를 마치고, 안흥항 입구 육모정 공원에 모아 놓은 "영의정김좌근영세불망비"와 안흥진 첨사와 방어사들의 "선정비"를 보고 신진도 태안해양유물전시관을 관람 했다.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

태안해양유물전시관은 태안 대섬 및 마도를 포함한 인천, 경기, 충청 해역에서 발굴한 수중문화재 3만여 점을 보관 및 전시하기 위하여 총사업비 296억원을 들여 약 7년간의 공사 끝에 2018년 12월 14일 개관하였다. 전시관 앞 마당에 펼쳐져 보이는 안흥항과 뒷편 야산 정상부의 안흥진성 풍광이 시원스럽다. 전시관은 먼저 2층으로 올라가 관람하고 지하같은 1층으로 내려가서 관람하는 동선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2층은 서해/수중발굴, 서해/해양교류 코너가 있고, 1층은 서해/뱃사람, 영상실, 체험.포토존 등으로 구분되어져 있었다. "청자 두꺼비 모양 벼루(보물 제1782호)","청자 연꽃줄기 무늬 매병과 죽찰(보물 제1784호)" 등 보물급 도자기를 비롯한 다량의 도자기와 다수의 죽찰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1,2층을 연결한 서해/배 전시코너의 마도1호선 모습을 복원,재현한 전통 선박은 최고의 볼거리이자 이 전시관을 오랫동안 생각나게 하는 랜드마크로 자리할 것으로 보여진다. 마지막으로 2층 기획전시실에서 진행중인 태안해양유물전시관 2020년 특별전 안흥진과 수군 군적부-()의 깃발 나부끼고 조운선 들고나네」를 천천히 여유있게 관람을 했다. 전시는 1 안흥진과 수군, 2신진도 고가와 수군 군적부, 3안흥진을 노래하다, 4신진도와 도진취락 으로 구분되어져 있었다. 지난 4월 21일 산림청 신진도산림수련관 소속 시설관리 공무원 정동환씨에 의해 최초 발견 및 신고된 신진도 고가에서 수습된 수군 군적부, 입춘방, 한시, 공문서 등을 자세하게 관람하였다. 고가(古家)의 벽지로 사용된 수군 군적부는 19세기 초에 작성된 것으로, 안흥진 소속 60여명의 군역 의무자가 수군(水軍)과 보인(保人)으로 나뉘어 이름, 주소, 나이, 신장, 부친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었다. 수군의 출신지는 모두 당진현(唐津縣)으로 당시의 당진 현감 직인과 수결(手決)이 확인되었다. 군적부가 발견된 태안 신진도 고가(古家)의 상량문(上樑文)에는 ‘도광(道光) 23년’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어 건축연대가 1843년으로 확인 되었다. 현재까지 민간에서 발견된 문서로서 군포를 받기 위하여 작성된 수군·보인 체제의 수군 군적부는 대구지역에서 발견된 『大邱 水軍 軍籍簿』가 유일한 예였다. 그러나 이번 『新津島 水軍 軍籍簿』가 발견됨으로써 또 하나의 귀중한 수군 군적부를 얻게 되었다. 더구나 수군이 주둔했던 현지에서 이름, 나이, 주소, 출생연도 등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고 당시 국가가 확인한 문서는 이번 『新津島 水軍 軍籍簿』가 처음이다. 이외에도 알려진 바 있는 『固城 水軍 軍案』, 『平薪鎭 水軍 軍案』 등은 군포를 받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수군진 현장에서 포수, 사수, 격군 등 기능별로 배치된 군선(軍船) 인력을 운영하기 위한 수군도안(水軍都案)으로 볼 수 있는 문서들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민간에서 발견된 수군 군적부는 신진도와 대구지역에서 발견된 2건이 전부이다. 군적부 명단에 기록된 이름들은 한자로 표시되어 있지만, 이들의 이름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한자의 뜻으로 읽는 훈독(訓讀)이 아닌 음으로 읽는 음독(音讀)이 필요하다. ‘金牙只(김아기)’, ‘倭發(왜발)’, ‘旕孫(엇손)’ 등이 음으로 읽어야 가능한 이두식 이름인 것이다. ‘牙只(아기)’는 평민들의 이름에서 흔한 이름으로 기재되어 나온다. ‘牙只’는 15~17세의 어린 연령에게 붙이는 이름으로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거친 변방의 수군으로 징병된 소년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가슴이 찡해져온다. 이번 『新津島 水軍 軍籍簿』를 통하여 신진도 주둔 수군을 운영하기 위하여 당시 당진현에서 군포를 받아 급료를 제공하고 있으나, 둔전(屯田) 등이 부족하여 수군들도 어업으로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태안해양유물전시관 특별전 관람을 끝으로 『新津島 水軍 軍籍簿』가 발견된 역사적인 현장 신진도 폐고가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전시관 보안요원께 신진도 폐고가의 위치와 관람 가능여부를 물어보니 그 중 한분이 친절하게 안내해주셨다. 폐고가는 신진도 서쪽 안흥초등학교 신진도분교장을 지나 알로하펜션 입구 양옥의 빨간지붕 민가 바로 뒷변에 위치하였다. 보안요원께서 자세히 안내해주셔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잘 꾸며져 있는 고가가 아니고 거의 폐허 수준이었다. 최초 발견자인 산림청 소속 공무원이 이런 곳을 어떻게 찾아서 내부를 확인하고 고문서들을 찾을 수 있었는지 존경스러웠다. 군적부는 고가 대청마루 왼쪽 벽에 붙어 있는 채로 3장이 발견되었고, 나머지 1장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신진도 수군 군적부가 발견된 폐고가>

안흥진은 본래 소근진첨사(所斤鎭僉使) 휘하의 안흥량수(安興梁戍)가 있던 곳인데 안흥량수가 설치된 것은 세종16년(1434)경 이었다. 안흥량수의 위치는 현재의 안흥진성 내부이거나 신진도가 유력하게 거론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문헌에 나타나 있지 않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16책 효종4년 5월조> 기록에 수군진(水軍鎭)이 설치된 것은 조선 효종 4년(1653) 신진도에 신진(新鎭)을 설치하고 첨사 이저(李竚)가 취임한 일이다. 지금의 안흥진성이 구진(舊鎭)이라면 신진도에 새로운 신진(新鎭)을 설치하였다는 의미이다. 신진도 안흥초등학교 신진분교 인근에는 신진의 담장으로 추정되는 석열이 1960~7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있다. 이는 효종4년(1653) 화정도(花亭島,지금의 신진도를 가리킴)에 신진을 설치했고 시설을 쌓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볼 수 있다. 1669년 다시 안흥진성으로 안흥진 첨사가 이동한 후에도 신진도에는 안흥진성 소속 수군이 남아 있게 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新津島 水軍 軍籍簿』가 발견된 신진도 고가는 태안군 신진도리 149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약 260평의 대지에 안흥량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건축 당시인 1843년에는 'ㅁ'자형 건축물이었으나, 1960년대에 문간채가 철거되고 현재는 'ㄷ'자형  건축만 남아 있는 폐가 형태이다. 현존 구조물은 광 4칸, 방 3칸, 부엌 1칸, 굴뚝 등이다. 신진도 고가의 후손(최인복)에 의하면 고가는 원래 방 5칸, 광 6칸, 부엌 3칸, 소 외양간, 말 우리 등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가옥 구조로 보아 신진도 고가는 군포, 곡식 등 세금을 거두어 수군을 관리하는 부속 건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짧은 신진도 고가 답사를 마치고 안흥초등학교 신진도분교장 운동장과 마도가 바라보이는 해변을 거닐었다. 이곳 주변이 안흥진 신진이 설치되었던 곳임이 분명해보였지만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의 포말과 차갑지만 안흥량의 옛 이야기를 전해줄것만 같은 해풍을 맞으며 생각하면 할수록 찾아보면 볼수록 더 어렵고 깊이 빠져드는 안흥진의 역사를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다음 기회에 더 공부해보기로 한다. 약 180년 전 안흥진 수군으로 징집되어 이 자리를 지킨 15세의 "아기"라는 어린 소년 수군이 다시 떠올려진다. 애잔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으로 신진도를 떠났다.

 

 

<참고자료>

 

태안 신진도 고가(古家) 수군(水軍) 군적부(軍籍簿) 연구 해양문화재 13호(2020)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 안흥량(安興梁) 일대 역사유적의 현황과 활용방안 해양문화재 제12호(2019)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 안흥진의 역사와 안흥진성 태안 안흥진성 사적지정을 위한 학술세미나(2020) 충청남도역사문화원,태안군

태안 안흥진성의 문화재적 가치와 활용방안태안 안흥진성 사적지정을 위한 2차 학술세미나(2020) 충청남도역사문화원,태안군

태안 안흥진성 2차 발굴조사 보고서(2014) 충청남도역사문화원,태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