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강화 교동도 화개산성(華蓋山城)과 교동읍성(喬桐邑城)('20.03.12목)

필그림2 2020. 3. 21. 00:22

강화 교동도 화개산성(華蓋山城)과 교동읍성(喬桐邑城)

- 교동대교 개통 후 더 가까워진 교동도의 성곽 유적 -


강화 교동도는 2014년 7월 1일 강화 교동도(교동면 봉소리)와 강화 본섬(양사면 인화리)를 연결하는 교동대교 개통 전까지만 해도 하점면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건너다녀야 했던 불편한 섬이었다. 그러나 아직 교동도는 민간인통제구역이라 신분증 제시 및 군의 지시에 따르고 입출입이 가능한 곳이다. 본이 오는 3월, 코로나19에 조금은 지친 심신을 보강하기 위해 몇년만에 다시 가깝고도 먼 강화 교동도의 성곽유적을 찾았다.


화개산성은 교동도에서 제일 높은 고구리 산145번지 일원 화개산 정상을 중심으로 내·외성을 갖춘 산성이다. 총길이 2,168m에 이르는 포곡식 산성으로 남쪽은 산정상부의 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하고, 북쪽은 화개산의 북록에 걸쳐 전체적으로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다. 화개산성의 최초 축조시기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으며, 명종 10년(1555년) 최세운이 증축하고, 선조 24년(1591년)에 이여양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는데 사용하였으며, 영조 13년(1737년)에 개축하여 군창을 두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986년 4월 1일 강화군 향토유적 제30호 고구려 산성지로 지정되었다가, 2017년 12월 20일 화개산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화개산성 남쪽 성벽 아래로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어영의 영성으로 활용한 교동읍성이 내려다보인다. 삼도수군통어영은 조선1627년(인조5년) 설치되었고, 2년 후인 1629년(인조7년) 경기수영을 화성 화량진에서 교동으로 옮기고 삼도수군통어영으로 승격하였다. 조선시대 화개산성은 교동읍성의 보완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수군약사>

정3품 당상관의 지방관직으로, 줄여서 수사(水使)라고 했다. 고려말 왜구 침입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수군이 재건되어 해도원수(海道元帥)를 두었다가, 조선 건국초 해도 수군을 경기 수군으로 개편하고 삼남(三南 : 충청도·전라도·경상도)과 경기좌·우도에 수군도절제사를 두어 도별로 지휘하게 했다. 1420년(세종 2) 각 도 수군 사령관의 직함을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로 고치고 그 관하에 수군도만호(水軍都萬戶)와 만호를 두는 정돈된 조직을 갖춘 뒤, 1466년(세조 12) 다시 고친 것이 수군절도사이다. 조선 전기에는 각 도의 수사가 진관체제(鎭管體制)에 의해 몇 명의 수군절제사 또는 첨절제사가 관할하는 거진을 통하여 만호가 관할하는 제진(諸鎭)의 수군을 지휘했다.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을 겪는 도중인 1593년(선조 26) 삼남 수군의 지휘계통을 일원화할 필요에 의해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설치되었고, 1627년(인조 5) 경기지역 해안의 국방 강화를 위해 경기도·황해도·충청도 수군을 통할하도록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을 설치함으로써 수군 지휘체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경상우도수사를, 삼도수군통어사(三道水軍統禦使)는 경기수사를 겸직했으므로 수군절도사 총수에는 변함이 없었다.

17세기 초반 대외 정세의 변화로 북방의 위협이 가중되면서 강화도에 대한 방비가 강조되었다. 인조를 비롯한 반정세력들은 수군을 이용해 강화도를 방비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이 가운데서 논의되는 것 중에 하나가 기존 화량진(花梁鎭)에 있던 경기 수영을 교동으로 옮기고 통어영으로 승격하는 조치였다. 이 조치로 인해 경기·황해·충청지역도 삼도 수군을 통괄하는 사령부가 생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