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백두대간 김천.영동구간(괘방령~추풍령)에서 만난 산성과 봉수('20.1.4토)

필그림2 2020. 3. 20. 23:48

백두대간 김천.영동구간(괘방령~추풍령)에서 만난 산성과 봉수

- 조선시대 제2거로의 간봉 내지 봉수인 눌이항산 봉수와의 조우 -



지난해 1221우두령(牛頭嶺)~괘방령(掛榜嶺) 구간을 마치고 2주만에 다시 괘방령을 찾았다.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이자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인 이번 괘방령(掛榜嶺)~추풍령(秋風嶺)은 구간 거리가 짧고 고도가 높지 않고  유순하여 산행하기가 편했다. 겨울인지 모를 정도로 날씨가 따뜻했다.


이번 구간 최고봉인 눌의산(743m) 정상에서 평지 주변으로 돌을 쌓은 흔적을 볼 수 있었다. 헬기장을 만들면서 옛 돌들을 이용하였기에 교란이 심한 부분도 있었지만, 다행히 일부 구간은 옛 석축 흔적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과 서적등 자료를 찾아보니 이곳이 조선시대 눌이항산봉수 (永同訥伊項山烽燧) 터였다. 눌의산(訥誼山,743m)정상에 봉수대가 있던 자리라서 봉화산, 신선이 도포를 걸친 모습이라서 선계산부르기도 했다.


<눌의산 정상석>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성곽봉수편)에는 영동군 추풍령면 추풍령리 은편마을 뒤에 눌이산 정상(해발 744.5m)에 위치한다. 소백산맥을 넘어오는 추풍령로상의 요충지이며, 충청도로 들어온 첫 번째 봉수이다. 북서쪽으로는 약 4㎞ 거리의 소이산 봉수가 보이며, 남동쪽에는 멀리 경북 김천의 고성산봉수가 바라다 보인다.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황간현조에 봉수는 현의 동쪽 금화에 있는데, 동으로 경상동 김산〔김천〕고성봉수(高城烽燧)에서 신호를 받아 서쪽 본 현의 소이산봉수(所伊山烽燧)연락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조선후기의 각종 지지에도 같은 내용이 수록되었으며, 첨부된 고지도에도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봉수에 배속된 군인수는 『여지도서(輿地圖書)영동현 군병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별장(別將) 2, 감관(監官)10, 봉군(烽軍) 50, () 150명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같은 현내에 있는 소이산봉수에 소속된 군인수와 합한 숫자이다. 헬기장을 만들면서 모두 파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상부는-북이 긴 지대로 지형으로 보아 평면 타원형으로 추정된다. 북쪽 봉우리 정상부가 조금 높은 편이며, 남쪽의 약간 낮은 곳에 헬기장이 만들어져 있다. 서쪽과 동쪽 일부에 헬기장 표시를 위해 쌓은 축대가 남아있는데, 봉수에 사용된 석재로 보인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 기록된 황간현 소속의 봉수대로 노선과 성격상 남해 금산(錦山)에서 초기하는 제2간봉의 내지봉수 중 하나이다.


<원형이 훼손되었지만 흔적이 남아있는 북동쪽 봉수 연대>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이곳이 기록에도 잘 남아있는 유서깊은 봉수유적임을 알 지 못했다. 영동군이나 김천시에서 봉수대터 임을 확인할 수 있는 안내판이라도 설치하면 등산객들에 의한 훼손을 최소화하고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할 수 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백두대간을 따라 아름다운 한국의 산하를 직접 감상한다는 것은 큰 축복다. 많은 고갯길과 높고 낮은 봉우리를 마주하며 옛 사람들의 발자취를 만나면 또 어떤 사연과 이야기가 있는지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과 서적을 찾아보며 그 내력을 알아가다 보면 가슴 벅찬 희열을 느낀다. 까마득한 삼국시대에서 고려와 조선을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 백두대간이 아닌가 싶다. 이번 대간길에선 경부선 고속도로와 철도를 이용해 수없이 오가던 추풍령을 발로 걸어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감회가 깊었다. 다음 대간길에는 어떤 설화와 역사를 만나게될까 기다려진다.




<참고 자료>

충북의 봉수 지표조사 보고서(서원향토문화연구회, 1991)

문화유적분포지도-영동군-(중원문화재연구원, 2006)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성곽봉수편) - (봉수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