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백제-신라의 경계 남덕유산 육십령 남쪽 길목을 지키던 함양 방지산성(芳池山城)(2014.06.07)

필그림2 2014. 6. 8. 15:27

백제-신라의 경계 남덕유산 육십령(六十嶺) 남쪽 길목을 지키던 함양 방지산성(芳池山城)

- 육십령로 아래 함양 서상면 일대가 조망되는 삼국시대 산성 -

 

 

 

백두대간 남덕유산(해발1,507.4m)에서 뻗어내린 할미봉(해발1,026.4m)과 영취산 깃대봉(해발1,014.6m)을 잇는 육십령(六十嶺,해발734m)은 경남 함양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장계면을 경계로 하고 있다.

육십령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첫쨰, 이 고개가 안의에서 60리, 장수에서 60리 떨어져 있어 육십령으로 이름 지어졌다는 것이다. 둘쨰, 크고 작은 60개의 고개를 넘어가야 한다고 육십령으로 불리게 됐다는 것이고, 셋째,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여 도적떼가 많아 이 고개를 넘으려면 장정 60명이 모여서 넘었다고 해서 육십령이라 했다.

육십령은 삼국시대부터 이용되었던 고개로써 조선시대에는 영남지방의 주요 교통로로, 조령(643m),죽령(689m),팔량치(513m) 등과 함께 영남의 4대고개로 꼽아왔다. 특히 육십령은 서부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으며, 현재는 전주-대구를 잇는 국도가 지나고 있으며, 2001년 11월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깃대봉 아래로 육십령터널이 뚫리면서 고속도로에 길을 내준 다른 옛 고개처럼 한적한 옛길로 전락했다.

이 일대는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이자 격전지였으며, 육십령고성(六十嶺古城)-방지산성(芳池山城)-황석산성(黃石山城)-당목리산성(堂木里山城)-마안산성(馬鞍山城)-사근산성(沙斤山城) 등이 연결되어 있어 이 지역을 근거로 하는 세력간의 충돌 상황과 고대 교통로를 재구성 해볼 수 있다. 또한 조선 임진왜란시 한양으로 향하는 교통로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주요 공격로 였다고 하며, 특히 정류재란때에는 일본군이 진주성을 향하면서 식량확보를 위해 이곳을 공격해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방지산성 동쪽 잔존 성벽>

 

<방지산성내 추정 봉수대 또는 장대지>

 

방지산성은 서상면 소재지 서쪽 방지마을의 낮은 야산인 방지산(해발455m) 9부능선에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동쪽 사면 아래로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錦川, 남강의 지류)이 자연 해자를 이루고 있다.

이 성은 삼국시대에 백제가 신라를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자 이를 막기 위하여 성을 쌓고 군량미를 비축했다고 해서 "합미성(合米城)이라고 하며, 일명 "금당성(金唐城)"이라고도 한다. 또한 <함양군지(咸陽郡誌)> 지명편(地名編)에 의하면 마을 앞산 봉우리가 연못에 떠 있는 연꽃같다고 하여 꽃다운 못이라 하여 "방지(芳池)"라 이름하였다 한다.

방지마을은 깃대봉에서 뻗어내린 능선이 벙드미재에서 남북으로 갈라져 감싸돌아서 서로 마주보며 마을 입구를 만들고 있으며, 변방을 지키는 군사들과 그 가족들에 의해 마을이 개척되었다고 한다.

현재 성벽은 윗부분이 무너져 성의 윤곽을 확인하기 어려우나, 2006년 우리문화재연구원에서 시행한 지표조사에 의하면 성벽의 전체 길이는 약 521.45m이고, 가로 45㎝, 세로 30㎝ 크기의 자연석과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가공한 성돌 이용하여 높이 3∼4m 정도로 편축으로 쌓았다. 성내에는 할석을 정연히 다듬어 쌓은 직경 6.5~7m, 깊이 2.4m 정도의 원형 저수시설이 남아 있으며, 서쪽으로 배수로를 만든 흔적이 있다. 이 원형 저수시설은 인근 수동면에 있는 사근산성 저수시설과 형태가 거의 유사하다. 이 저수시설에서 동북쪽 7m 부근에 장대지 또는 봉수대로 추정되는 석재가 있다. 방지산성 입구 문화재안내문에서 산성 북쪽 최고 꼭대기 부분에 높이 2m, 너비 3m 정도의 원형으로 된 소형의 봉수대(烽燧臺) 같은 시설물이 있다고 하는데 이곳을 말하는 것 같다.

방지산성의 초축세력은 가야로 추정되며, 가야 멸망 이후 신라가 차지하여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후 육십령을 사이로 백제와 접경을 하면서 세력을 다투었을 것으로 추측해본다. 6월에 찾아간 방지산성은 숲이 무성하여 성벽을 제대로 찾기가 어려웠으나, 다행히 동쪽으로 50m 정도는 상부가 무너져내렸지만 축성 특징을 알 수 있는 체성 일부를 확인 할 수가 있었다. 산성의 출입구 또는 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방지산성 내 원형 저수시설>

 

방지산성 일대는 6.25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관계로 이를 기리기 위해 산성 북동쪽 금천변에 충혼탑이 세워져있다. 또한 함양 서상면 일대의 덕유산은 6.25 전쟁 중 남부군 빨치산 활동의 근거지이기도 하여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다. 서상면에서 가까운 서하면 소재지에는 당시 서하지서를 빨치산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석축 방호벽과 참호시설이 아직 남아있다. 이 방호유적은 현대판 성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곳을 여행하는 내내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면서도 문득 동족 상잔의 아픈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이 생각나서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는 못했다.

분단된 조국의 슬픈 현실은 저 멀리 군사분계선(DMZ)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적명 : 함양 방지산성(城) 또는 방지성(芳池城)

소재지 : 경남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방지마을) 산47,산51

문화재 지정 : 경남 기념물 제174호 (1997.12. 31 지정)

 

 

 

<참고자료>

 

『경남의 성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08

『함양 방지산성』  「두산백과」

『함양 문태서의병장 생가복원사업 부지내 문화재발굴(시굴)조사 보고서』  「동서문물연구원」 2008.7

『함양 사근산성-추정 서문지 발굴조사- <부록> 함양 방지산성』  「함양군·우리문화재연구원」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