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삼국시대 계립령(鷄立嶺)로 일대의 전략적 요충지 충주산성(忠州山城)(2014.05.01)

필그림2 2014. 5. 1. 23:04

삼국시대 계립령(鷄立嶺)로 일대의 전략적 요충지 충주산성(忠州山城)

-중원문화(中原文化)의 중심, 충주를 품고있는 삼국시대 산성유적의 백미-

 

 

 

충주산성(忠州山城)은 충북 충주시 직동, 안림동, 종민동, 목벌동에 걸쳐있는 남산(南山 또는 錦鳳山, 해발 636m) 정상에 삼국시대때 쌓은 테뫼식과 포곡식의 복합적 산성으로 남산 또는 금봉산이라는 산의 이름을 따서 남산성(南山城), 금봉산성(錦鳳山城)으로도 불리며, "오누이 성쌓기 전설"과 함께 마고선녀가 7일만에 축성했다는 전설과 관련하여 마고성(麻姑城)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북쪽으로 마주하는 계명산(해발 774m) 사이에는 마즈막재라는 교통로가 형성되어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대림산성(大林山城)과 마주하고 있다.

 

 <충주산성 서쪽성벽-서문지 주변>

 

조선전기 대표적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충주목 고적조에 나오는 동악성(桐岳城)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기록은 "州의 동쪽 13리에 있다. 석축으로 둘레가 2,280척이다. 성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라고 하였다.

전체 둘레는 1,145m, 성내 넓이 46,524㎡, 성벽 너비 6.5 m, 높이 5~8m 이며 대부분 내탁법으로 견고하게 축성하였다. 옛 성벽이 잘 남아있는 구간이 총 775m 정도되며, 1984년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1986년부터 2006년까지 7차례에 걸쳐 시·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조사를 통하여 충주산성의 축조방법과 성벽 및 수구의 구조를 밝힐 수 있었다. 1998년 동문지에 대한 전면 발굴조사에서 6세기 중엽 신라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동문 주변 성벽에는 평여장이 설치되었음을 확인했다. 2001년에서 2003년간 시·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석축 저수시설은 위쪽이 거의 원형(방형), 바닥 쪽은 사다리꼴 형태이며,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계단식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2006년 북문지와 북쪽 성벽을 조사하면서 보은 삼년산성 남문지, 문경 고모산성 서문지, 청주 부모산성 북문지, 양주 대모산성 동문지 등지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확쇠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동문과 북문의 경우 신라에서 많이 사용한 현문식(懸門式) 구조임이 밝혀졌고, 동문 성벽의 사다리꼴 출수구는 보은 삼년산성, 문경 고모산성에서 확인되었으며, 최근 영월 정양산성 서벽에서도 확인 되어졌다. 발굴조사 후 부분적으로 보수공사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동문과 북문 주변 성벽과 여장, 집수시설을 발굴 후 잘 정비하였다.

 

<동문지 부근 석축 저수시설>

 

< 동쪽 성벽 및 동문지>

 

<동쪽 성벽과 수구>

 

충주산성은 삼국시대 6~7세기 신라토기 유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현문식 성문 구조, 주변 관방유적과의 관계 등을 통하여 신라의 국원소경(國原小京) 조영과 관련된 군사적 거점산성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아직까지 고려나 조선시대의 유물은 확인되지 않고있어 기존에 알려진 고려후기 고종 연간 몽고군의 침입 때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인 김윤후(金允侯)가 의병을 거느리고 항전한 곳으로 추측하였으나 현재까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더 많은 조사가 진행된 후에 판단해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충주산성이라는 명칭이 애매모호하여 현 지명에 따라 남산성이나 금봉산성으로 하는 것으로 바람직하다는 지적이 있기도 하다.

 

<충주산성 북문지>

 

충주시는 동쪽과 남쪽의 산지와 어우러져 남한강과 함께 달천, 요도천 등의 하천등이 흘러 비옥한 충적대지가 형성되어 구석기시대 이래로 사람이 살기시작하였다.

백제 근초고왕(346~375), 고구려 장수왕(413~491), 신라 진흥왕(540~576)의 371년에서 551년 사이에 충주를 중심으로 한 남한강 일대 중원지역은 삼국의 각축장이 된다. 칠금동 탄금대 백제토성 내 백제 철생산유적, 주덕읍의 철광산, 목벌동 골석광산, 중앙탑면 창동 쇠꼬지마을, 장미산성 등 여러 유적에서 백제,고구려,신라의 삼국문화가 중첩,복합적으로 만들어져 소위 중원문화(中原文化)를 형성하게 된다.

백제가 삼국 중 제일 먼저 충주로 진출하여 뛰어난 제철 기술을 지니고 있었으며,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확보한 후 이곳에 국원성(國原城)을 설치하고, 이어 신라 진흥왕18년(557년)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두었고, 문무왕 13년(673년)에는 국원소경의 치소로 추정되는 국원성(國原城)을 쌓았다. 또한 경덕왕 1년(742년)에 중원경(中原京)으로 삼아 통일신라의 중앙이라 표방했다.

 

고려에 들어와서 태조23년(940년)에 중원경을 충주로 개칭하고, 성종2년(983년)에는 전국에 12 목(牧)을 설치할 때 충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성종14년(995년)에 10도(道),12 절도사(節度使) 체제로 개편될 때 절도사가 파견되어 창화군(昌化軍)이라 했으며, 중원도(中原道)에 소속되었다. 고려 현종3년(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를 두었으며, 현종9년(1018년)에는 전국에 8 목을 둘 때 충주목이 되었다.

고려 중기에는 5도(五道) 양계(兩界)의 지방제도가 확립되면서 충주는 양광도(楊廣道)에 편입되었으며, 괴주(槐州),장연현(長延縣),음성현(陰城縣),청풍현(淸風縣) 등을 속현(屬縣)으로 거느렸다.

고종41년(1254년) 몽고군이 처들어 왔을 때 김윤후(金允侯) 등의 의병이 야고(也古)가 이끄는 몽고군을 무찔렀기 때문에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관내 다인철소(多仁鐵所,현 충주시 이류면 일대)의 천민들이 몽고군을 물리친 공으로 고종42년(1255년)에 익안현(翼安縣)으로 되었으며, 충렬왕7년(1281년)에 국원성을 개축하면서 초석에 연화문을 조각했기 때문에 "예성(蘂城)"이라는 별칭이 생겼으며, 태원(太原)이라고도 불렸다.

 

조선에 들어와서 중종35년(1540년) 충주목의 유석(劉石)이 아버지를 죽인 사건으로 예성부(芮城府)로, 명종5년(1550년) 이홍윤(李洪胤)과 배광의(裵光義)의 옥사사건으로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되었다가 선조원년(1568년)에 충주목으로 회복되고,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신립(申砬)이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면서까지 항전하였으나 패하였고, 광해군5년(1613년)에 이곳 출신 유인발(柳仁發)이 역모를 꾀하다가 주살되어 충원군(忠原郡)으로 강등되었다가 인조 1년(1633년)에 충주목으로 복구되는 등 강등과 복원을 여러차례 반북하였으며, 고종32년(1895년)에 행정구역 개편시 도청소재지가 되면서 관찰사가 배치되어 충청북도의 중심이 되었지만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1908년에 도청이 청주로 이전되고 충주는 군청소재지로 남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해방이후 1956년 7월 8일 충주읍은 충주시로 승격되었고, 살미(乷味),이류(利柳),주덕(周德),신니(薪尼),노은(老隱),앙성(仰城),가금(可金),금가(金加),동량(東良),산척(山尺),엄정(嚴政),소태(蘇台) 등 12개면은 중원군(中原郡)이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중원군이 충주시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2014년 2월1일 가금면이 중앙탑면으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했다.

 

충주산성이 있는 남산은 안림동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사계절 충주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잘 활용되고 있었다. 다만 직동 창룡사(蒼龍寺)에서 오르는 길은 안내도 부정확하고 등산로도 제대로 정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충주산성을 한바퀴 돌면서 충주시내와 넉넉한 주변 산야 그리고 충주호를 두루 감상할 수 있으며, 산의 능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쌓은 성벽은 한국 성곽의 백미로 성곽위를 걷는 탐방길은 우거진 수풀과 어울려 잘 정비된 최고의 산책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적명 : 충주산성(忠州山城)

소재지 : 충북 충주시 직동 산24-1

문화재 지정 : 충북 기념물 제31호 (1980.01.09 지정)

 

 

 

<참고자료>

 

『충주산성 동문지 발굴조사 보고서』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중원문화연구총서 제10책」 1999

『충주산성 북문지 발굴조사 보고서』  「중원문화재연구원 조사보고총서 제54책」 2008. 5

『한반도 중부 내륙지역 산성Ⅲ - 충주산성』  「한국성곽학회 · 충청북도」 2008. 10

『중원의 산성』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08. 11

『고려 대몽항쟁기의 축성과 입보』  「충북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김호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