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한강하류와 서해 방어의 요충지이자 관문인 계양산성(2011.10.02)

필그림2 2011. 10. 2. 21:46

한강하류와 서해 방어의 요충지이자 관문인 부평 계양산성(桂陽山城)(2011.10.02)

- 삼국시대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부평지역을 관방하다 -

 

 

 

계양산성(桂陽山城)은 옛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의 진산(鎭山)인 계양산(桂陽山, 해발395m) 정상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능선(해발 230m 지점) 주변에 내탁으로 축성한 둘레 1,184m의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초축은 삼국시대 백제 또는 고구려에 의해 이루어져 신라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도 적극 활용한 것으로 추측한다.

 

2003년 10월 선문대 고고연구소에 의한 육각정 주변을 중심으로 한 1차 발굴에서 백제와 신라 토기류와 기와류가 발굴되었으며, 2005년 5월 2차 발굴 조사지인 동문지(옛 주민체육시설) 주변에서 한성백제시대(BC18~AD475) 집수정(集水井)을 찾아내 그 하층부에서 4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하는 논어(論語) 제5장 공야장(公冶長)을 기록한 목간(木簡)이 발굴되어 당시 중국으로 부터의 한자도입과 유교수용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2006년 6월 3차 발굴에서 2차 발굴시 전체구조를 확인하지 못했던 집수정(集水井)을 재조사하여 성의 동벽을 따라  방형으로 자리하고 남북길이 5.6m, 동서길이 6.5m 임을 밝혀냈다. 내부 구조는 호안석축이 방형과 원형을 혼용한 독특한 형태의 구조였다.

백제시대 대표적인 토기인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와 반구형(盤口形) 구연부 자기류가 상당수 출토됨으로써 계양산성이 4세기경 한성백제시대에 축성되었을 가능성을 더욱 크게 하여 계양산성 복원사업에 속도를 내는 계기가 되었다.

2009년 5월에서 8월 겨레문화재연구원에 의한 4차 발굴을 북문지 추정 지역을 대상으로 벌인 결과 삼국시대 인천을 포함한 이 지역을 지칭하던  "주부토(主夫吐)" 라는 명문(銘文) 기와가 다량 발견되었다. 이 명문 기와는 2005년 2차 발굴조사때에도 일부 출토되기는 하였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의하면 장제군(長提郡)은 본래 고구려 주부토군(主夫吐郡)으로 신라 경덕왕이 고친 이름이며, 삼국사기 편찬 당시인 고려 중기에는 수주(樹州)라고 한다고 했다.(연합뉴스 2009. 8.30)

이 명문기와의 제작년대는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당시까지 고구려의 옛 지명이 그대로 사용되었음을 짐작하게한다.

또한 길이 48cm에 이르는 통일신라시대 대형 기와도 출토되었는데 이는 2007년 11월 남한산성내 행궁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초대형기와(길이64cm 내외, 두께4~5cm, 무게19kg)와 2010년 영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한 경주시 건천읍 화천리 양성자가속기 개발사업부지 내 가마터에서 발견된 7세기 초 통일신라시대 대형기와(무게 15㎏, 길이 55㎝, 두께 4㎝)와 함께 손에 꼽을 대형급 기와유물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현재 계양산은 주말 산행 인파가 많이 몰려드는 곳으로서 계양산성 동벽과 남벽은 주요 등산로로 활용되고 있지만 정작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옛 성곽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곽의 길이는 앞서 언급한바 대로 1,180m이고, 성벽의 높이는 대략 7m, 폭은 4m 정도이다.

일명 고산성(古山城)이라 불렸으며, 1908년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관방성곽조(關防城郭條)에는 "이 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둘레가 1937보(步)이나 지금은 퇴락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육각정 아래 남쪽 성벽 일부와 북쪽 성벽 일부에는 원형에 가까운 성벽도 남아있다.

대부분이 허물어졌지만 향후 발굴조사를 통하여 흙과 수목으로 덮혀진 북쪽과 남쪽에는 완벽한 성곽의 흔적을 더 확인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북쪽으로는 김포와 강화도가 훤히 보이고 동쪽으로는 부천과 멀리 한강과 서울 강서지역 그리고 고양(일산)이 눈에 선명하다. 또한 북한산의 암봉들도 잘 조망된다.

남쪽으로는 옛 부평도호부 청사가 자리잡았던 부평구 계산동 일대가 발아래이고, 멀리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沸流)가 건국한 옛 미추홀(彌鄒忽)의 치성(治城)이라고 전해오는 문학산성(文鶴山城)이 손에 잡힌다. 서쪽은 계양산 정상이 가로막고 있지만 정상에 올라서면 서해를 포함한 주변이 시원스럽게 잘 조망되어 된다. 늦은 오후 석양에 일렁이는 서해의 금빛바다는 이곳에서 느낄 수 있는 풍광이다.

 

계양산은 최근까지 롯데건설의 골프장 건설사업계획으로 부분 훼손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시민단체와 환경단체 그리고 뜻있는 시민들의 6년간의 끈질긴 저지운동으로 마침내 올해 6월 백지화되면서 도시의 시민자연공원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계양산성 복원을 위한 계획도 진행되고 있다. 복원에 앞서 정확한 고증음 물론이려니와 시민들에게 계양산성의 존재와 그 역사성을 널리 알려 등산로에서 발길에 차이는 작은 기와편과 토기편에도 애착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계양산 정상부(해발395m)에서 본 계양산성>

 

<남쪽 잔존 성벽>

 

<북쪽 일부 잘 남은 성벽 구간>

 

<북쪽 일부 잘 남은 구간의 정교한 성벽쌓기>

 

<북쪽 성벽에서 바라본 말썽많던 경인운하와 한강>

 

<산성 내부 공동묘지 >

 

<육각정 아래 남쪽 잔존 성벽,2009.2 촬영>

 

<육각정 아래 완벽한 남쪽 성벽 구간2,2009.2 촬영>

 

<산성 내부 출토 기와편,2009.2 촬영>

 

<무너진 동쪽 성벽,2009.2 촬영>

 

<동문지,2009.2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