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관련자료

남한산성 특별전(경기도박물관,2011.10.5~2012.1.29)

필그림2 2011. 9. 10. 16:11

남한산성에 관한 세가지 이야기

 

이영애(학예연구사)

 

 

 

<”고지도첩속의 남한산성도(영남대박물관 소장)>

 

경기도 광주시와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자리하고 있는 남한산성(사적 제57). 남한산성하면 우리는 먼저병자호란을 떠올리게 된다. 45일간 청군에 맞서 저항했으나 결국엔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치욕스런 맹세(城下之盟)를 하게 된 결과로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공간적 상징이자 역사적 의미가 되었다. 조선으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의 전쟁이었던 병자호란은 지금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한다. 당시 목숨을 걸고 끝까지 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청이란 대국의 실체를 인정하고 화의하자는 측의 현실적인 판단이 옳은 것일까.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는 북벌론이 대두하여 조선후기 사회에 커다란 담론의 하나로 이어졌으며, 이는 여전히 현재적 의미로 남아 있다.

 

   <남한산성 실황도(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경기도박물관은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과 공동으로남한산성 특별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전체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남한산성을 거닐다로 남한산성 전체의 지형과 산성 내 구조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하였다. 2부는천혜의 요새로 나라를 지키다로 통일신라시대부터 근대까지 천혜의 요새로서 국토의 심장부를 지켜온 남한산성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3역사의 사나운 바람을 맞다는 병자호란의 경과와 이후의 전개, 그리고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하였다. 병자호란에 관한 기록과 삼학사 관련 유물, 북벌론의 대두와 역대 국왕의 남한산성 행차에 초점을 맞추었다. 4부는시대의 삶과 문화를 품다로 행정·군사 산악도시로서의 남한산성, 그리고 문화가 살아 있는 남한산성의 특수성을 강조하였다.
체험행사로는 성곽 쌓기와 수어장대·연무관 만들기, 퍼즐 맞추기, 활동지 만들기, 남한산성 답사 등이 진행된다.

전시기간은 2011. 10. 5 ~ 2012. 1. 29까지이다.

 

<일제강점기 광주 읍내 및 행궁부(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이 전시에서는 남한산성에 관한 종합적 정리를 목표로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남한산성의 세 가지 이야기를 전달하려 한다.
첫 번째는 남한산성 성곽의 오랜 역사이다. 10여 년에 걸친 남한산성 유적지 조사(남한행궁지 발굴과 일부 성벽 발굴)로 청동기 유물부터 근대 유물까지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고 유구가 드러났다. 백제토기와 유적지, 통일신라시대 유적과 유물, 조선시대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근대 유물과 흔적이 나타났다. 또한 남한산성 성곽의 기원은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삼국사기』에는 문무왕대 당과의 전투에 대비하여 쌓은 주장성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주장성이 조선 인조대에 쌓은 남한산성의 토대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은 한반도 중심부를 지키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이자 하삼도를 가기 위해 거쳐야 할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중요시한 지역이었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남한산성 성곽의 특수성과 가치이다. 남한산성 성곽은 오랜 기간 개축과 보강이 이루어져 성곽 축조의 변천사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으며, 주요 사용 무기의 변천에 따라 성곽의 외형구조 또한 변화되었다. 전돌로 쌓은 여장이나 치의 기능이 결합된 포루시설을 갖춘 옹성은 남한산성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요소이다. 병자호란 이후 외적의 침입에 대히여 구축한 옹성과 외성, 신남성, 포루시설은 역사와 함께 변화된 조선의 성곽기술과 방어체계를 보여주고 있다.
세 번째는 산성도시로서의 남한산성이다. 조선 인조 2년부터 성곽의 수축과 함께 주민들로 하여금 산성내에 거주하게 하고 여기에 남한행궁과 장대, 사찰 등이 세워지면서 남한산성은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 광주부의 읍치가 산성 안으로 옮겨지면서 남한산성은 행정과 군사기능을 수행하는 산악도시가 되었다. 남한행궁은 비상시 왕실의 위패를 모실 좌전과 사직제사를 위한 우실을 갖춘 유일한 행궁이며, 수어영이 있던 곳이다. 또한 조선시대 기록에 따르면 천여 호가 거주하였다고 하고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매우 컸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람이 대규모로 거주하면서 남한산성 안에는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꽃을 피웠다. 승군 동원을 목적으로 조성된 사찰과 삼학사(뒤에 오학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현절사, 백제 시조 온조와 이서를 모신 숭렬전, 전설적인 인물인 이회와 벽암대사, 이회의 부인을 위해 세운 청량당이 남한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다. 다양한 유형문화 외에 도당굿과 같은 무형문화유산이 산성에 남아 있다.

 

<남한산성 행궁지에서 나온 대형기와(토지주택박물관 소장)>

 

남한산성 전시는 이와 같이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역사와 가치를 전달하고자 한다. 병자호란의 참혹한 기억 역시 침략과 항복이라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 전체 역사의 한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경기도박물관 뉴스레터 58호(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