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관련자료

한성백제와 철기유물(경기도박물관)

필그림2 2011. 7. 12. 22:30

한성백제와 철기유물

한준영(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

 

 

 

 

최근 한 방송사에서는 ‘근초고왕’을 소재로 한 사극을 방영하고 있다. 비록 신드롬을 일으킨 ‘선덕여왕’만큼은 아니지만 잊혀진 한성시대(漢城. 기원전18~기원후475년) 백제(이하 한성백제)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백제’를 생각하면 수학여행 때 공주와 부여를 다녀온 기억을 더듬어 무령왕릉이나 삼천궁녀가 백마강으로 뛰어내렸다는 낙화암이 떠오른다. 이렇듯 기억 속의 백제는 공주(옛 웅진)나 부여(옛 사비)가 생각나지만 실제로는 경기도 일대를 경계로 하여 한성(서울 잠실 일대)에 도읍을 정했던 4~5세기경이 백제의 최전성기였다. 또한 그 시대를 대표하는 왕이 근초고왕이다. 근초고왕 재위 무렵 한성백제는 중국이나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하여 고구려와 신라보다 번성한 물질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그런데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광개토왕, 신라의 선덕여왕에 비해 낯선 이유는 뭘까? 허탈하게도 답은 한성백제의 역사기록이 상대적으로 적기도 하지만, 발굴 조사된 유물의 연구가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최근 10년간 경기도 일대에서 확인된 한성백제의 고고학적 성과는 눈부실 정도이다. 서울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포천 자작리유적, 파주 육계토성 등 굵직한 유적이 발굴되어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 소개할 유물은 한성백제의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파주 육계토성 출토 철기유물이다. 육계토성은 임진강변에 위치한 한성백제의 지역 거점성으로 고구려와의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으로 성 내부에서 100여 점의 철기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그림1)은 한성백제의 전성기인 근초고왕 때 사용된 것으로, 당시 평양까지 북진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하게 할 정도로 강성했던 한성백제의 모습을 간직한 것이다. 이들 철기는 대부분 농기구, 공구, 무기 등 일상생활과 전투 등에 관련된 것이다. 강력한 성능의 철기를 소지한다는 것은 농업생산력을 높힐 수 있어 물산이 풍부해지고 고구려, 신라와의 전투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철기유물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주조 괭이이다. 주로 밭에서 땅을 파는데 사용하였는데 유사시에는 무기로도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유물을 분석해본 결과 제조 방법이 놀라웠다. 재료는 선철(銑鐵 : 철광석을 장기간 가열하여 탄소가 침투되어 녹는 온도가 내려가는 원리로 생성된 철)을 사용하여 주조(鑄造 : 원하는 모양의 틀에 쇳물을 붓고 식히는 방법)로 제작하였는데 이러한 기술은 동시대의 신라와 가야보다 앞선 최첨단의 하이테크 기술이었다. 주조 철기는 단조품에 비해 파손이 잦아 이를 모아 고철을 재활용하기도 하였다. 용인 수지의 백제마을 유적에서는 토기 안에 파손되거나 변형된 고철을 보관했던 흔적이 발견된 예가 있다.(그림2)

 

 

백제의 철기제작 기술은 화성 기안리 유적의 발굴결과로 보아 3세기 무렵 한사군을 거쳐 이주한 집단에 의해 백제로 유입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유적에서는 제련시설이 확인되었으며 낙랑계 토기와 송풍관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선철 생산기술 외에 초강(炒鋼 : 선철에 함유된 탄소함량을 낮추고 강도를 높힌 제련방법)기술을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첨단의 철기 생산기술을 가진 장인은 중앙에서 관리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과학적 분석 결과 주조 괭이는 한 곳에서 제작되어 주변의 여러 곳에 유통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파악되었다. 예를 들어 풍납토성에서 제작된 철기는 파주 육계토성, 고양 멱절산유적(그림3) 등 지방으로 유통되었으며, 이러한 유통망을 활용하면서 중앙집권 국가로의 기틀을 다지게 된 것이다.

 

 

<경기도박물관 뉴스레터 56호/2011.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