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백두대간 문경,괴산,충주구간(이화령-조령-하늘재)에서 만난 산성과 봉수-조령산성(鳥嶺山城)과 탄항봉수(炭項烽燧)('20.06.16목,07.06월)

필그림2 2020. 7. 23. 17:52

백두대간 문경,괴산,충주구간(이화령-조령-하늘재)에서 만난 산성과 봉수-조령산성(鳥嶺山城)과 탄항봉수(炭項烽燧)

- 백두대간 옛 고개의 애환과 흥망성쇄의 역사를 함께한 조령산성과 탄항봉수 -

 

 

일반적으로 백두대간 일시종주코스로 이화령에서 하늘재까지 한 구간으로 설정하는데 충분히 휴식하고 월악산과 문경새재 일대는 수려한 풍경여유있게 감상하고 싶어 이화령에서 조령, 조령에서 하늘재로 두번 나누어 진행하기로 했다. 6월과 7월은 때때로 화창한 날씨를 보여주었지만 습하고 무더운 여름날이 많다.

 

6월16일 오전9시. 차량으로 이화령휴게소에 도착하여 백두대간 생태탐방로를 올라 조령산으로 향한다. 몇개의 핼기장과 능선을 넘어 100대 명산으로 지정된 조령산을 오른다. 이화령-조령-하늘재 구간은 6.25전쟁 초기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혈전을 벌이던 장소이다. 6.25전쟁 이후에도 이곳이 군사작전구역이었던지 등산로 주변으로 군사용 교통로와 참호가 많이 설치되어 있다. 해발 1,017m 조령산 정상에는 우리나라 여성 산악인으로 많은 기록을 남긴 지현옥씨의 삼각기둥의 목제 추모비가 정상 한쪽 켠에 만들어져 있었다. 조용히 묵념을 올렸다. 정상에는 넓은 공간이 있지만 주변 경치를 감상할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조령산에서 150m 정도 내려오니 주의 안내표지판이 있는 곳이 있었는데 오늘 걸어가야 할 암릉들이 훤하게 펼쳐져보이는 멋진 조망처이다. 신선암봉,928,주흘산,부봉 그리고 월악산 영봉을 위시한 여러 산봉들이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은 왜 이 구간이 백두대간에서 힘들고 위험하지만 멋진 풍광으로 소문난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오르내림이 심한 안부와 거친 암릉을 약 4km 지나 출발한지 약 9시간만에 조령3관문이 남쪽 시작점이 있는 깃대봉에 도착했다. 깃대봉 아래부터 조령3관문 조곡관 문루 넘어 마패(마역)봉까지 조령산성이 오랜세월을 이기고 남아있다. 깃대봉 구간 성벽은 지표조사 중인지 성벽을 따라 벌목을 해놓아 성벽 관찰이 용이하였다. 암문으로 추정되는 자연성벽이 특이하였다. 마치 동해 두타산성 성문처럼 비밀스럽고 자연스럽다. 조령3관문을 둘러보고 조령산자연휴양림까지 잘 정비된 길을 따라 내려와 미리 약속한 연풍개인택시를 타고 이화령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가 가까워서 인지 낮이 제법 길어 20시가 다되어가는 데도 어둡지가 않았다.

 

7월6일. 조령-하늘재 구간을 잇기 위하여 이번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전날 충주로 내려와서 충주읍성의 흔적과 관아유적을 찾고 하루를 묶었다. 이튿날 조령행 버스를 타고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고사리(古沙里) 마을 아래 연풍레포츠공원 종점에 도착하였다. 적요한 포장도로를 따라 이화여대수련원을 지나 고사리마을 초입 수령 350년의 당산소나무 3기와 신혜원마을유래비, 누구의 불망비인지 상부가 없어졌지만 비석받침의 귀면 조각이 예사롭지 않은 조선시대 고사리면에서 세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일제강점기에 세운 이장심창섭시혜불망비(里長沈晶燮施惠不忘碑) 등이 마을의 역사를 대변해준다. 조선시대 조령 일대의 옛 원터 마을인 신혜원(新惠院)은 이화여대수련원팬션, 음식점으로 변했다. 신혜원 마방터를 지나 한창 보수공사로 시끄러운 조령산자연휴양림을 우측으로 끼고 조령3관문에 도착하였다. 예부터 괴산 사람들은 조령관을 넘어 한양으로 향하는 소조령까지 8㎞연풍새재로 불렀다. 문경쪽 조령(문경새재)이 유명해지고, 도로가 개설되면서 잊혀졌지만 괴산군이 조령산자연휴양림 입구부터 조령관까지 1.5㎞연풍새재 옛길로 복원하면서 되살아났다. 조령3관문 괴산방향 누현판에는 조령관(鳥嶺關). 문경방향 누현판에는 영남제3관문(嶺南第三關門)이라 명명하였다. 조령(鳥嶺)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와 경북 문경군 문경읍 상초리를 연결하는 조선시대 영남대로상의 고개이다.

 

조령관문은 문경관문(聞慶關門)이라 하여 수도 한양과 영남지방을 연결하는 영남대로 상 백두대간을 넘는 주요 교통로인 조령로에 3중으로 쌓은 관문성이다. 소백산맥 상의 중요한 교통로인 영남대로 상에 위치하는 성들 중 요해처(要害處)에 자리하고 있다. 조령관문은 조령 북쪽 정상부에 조령3관문(영남제3관), 즉 조령관(鳥嶺關)이 있고, 조령관에서 동남쪽으로 조령2관문(영남제2관)인 조곡관(鳥谷關),조령1관문(영남제1관)인 주흘관(主屹關)과 동북쪽에 북암문(北暗門),동쪽에 동암문(東暗門),조령원 뒷산 망치봉의 포루(砲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선조 27(1594) 신충원에 의해 조곡관(鳥谷關,영남제2)을 가장 먼저 축성하였고, 숙종 35(1709) 남쪽을 방어하기 우한 주흘관(영남제1)과 북쪽을 방어하기 위한 조령관(영남제3)을 축조하였다. 조령3관문 일대 산성을 조령성 또는 조령산성이라고 한다. 조령3관문·영성·영남제3관·상성문(上城門) 등으로도 불리고 있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좌우 협문 2개가 있는 팔작지붕이다. 조령(문경새재) 일대는 산악지대 협곡으로 북쪽의 마패봉(920m), 동쪽의 부봉(917m)〮주흘산(1,075m), 서쪽의 깃대봉(812m), 남쪽의 조령산(1026m) 백두대간의 고산 암릉지대로 둘러쌓여 있다.

 

조령3관문(조령관) 문루

지난날 처럼 조령3관문 성벽과 문루를 살펴보고 마패(마역)봉으로 오른다. 지나온 깃대봉 아래처럼 성벽이 잘 남아있다. 미석과 여장이 부분적으로 잘 남아있는 구간도 있다. 남쪽 깃대봉과 북쪽 마패(마역)봉 아래 620m 구간을 막아 성벽을 축조하고 조령 정상부에 문루을 쌓았으며, 마패(마역)봉을 지나 북암문(北暗門) 일대 출입구 폭 50cm의 암문을 중심으로 동쪽에 175m, 서쪽에 158m의 성벽이 축조되어 있다. 북암문을 지나 약 1.9km 지점부터 다시 축성이 시작되어 동암문(東暗門)을 지나 부봉삼거리(부봉1봉아래)까지 남북으로 약 750m 구간에 성벽을 축조하였다. 동암문에는 암문이 2개가 확인 된다. 1개는 덮개가 있고 한 개는 덮개가 없다. 암문 사이 성벽의 높이는 1m 정도이다.

 

마패(마역)봉-북암문 구간 성벽

부봉삼거리까지 축조되어 있는 조령산성을 조사하고, 오솔길에 탐스럽게 피어있는 하늘말나리, 중나리 등 여름 야생화, 몇백년은 거뜬히 지내온 이 터의 진정한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듬직한 금강송 군락의 풍광을 보는 즐거움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부봉삼거리에서 부봉1봉에 올라 멀리 북서쪽의 월악산 영봉과 월악공룡능선이라 하는 만수암릉지대를 감상하고 다시 부봉삼거리로 돌아와서 하늘재로 길을 이어갔다. 부봉삼거리에서 1시간 남짓 걸어 주흘산 영봉 갈림길을 지나 계곡 아래로 깊숙히 내려가는 계단을 지나 문경시 문경읍 평천리와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를 잇는 옛 고개 평천재(월항재)에 도착하였다. 조령과 하늘에 비교하면 잘 알려지지 않은 고개이다. 하늘재가 3km 남았다. 덥고 습해서 체력이 떨어지고 있다. 다행히 하늘재까지는 많이 힘든 구간이 없다. 평천재에서 30분 후 탄항산에 도착하였다.

 

탄항산(炭項山)은 문경읍 평천리의 월항마을(달목이마을)에 있는 산으로, 일명 월항삼봉(月項三峰)이라 한다. 뾰족한 봉우리 세개가 나란히 서있어 삼봉(三峰)이라 하는데, 산삼이 많이 난다고 삼봉(蔘峰)으로 부르기도 하며, 월악산국립공원(月岳山國立公園) 구역에 포함되어 있고, 포암산(布岩山)과 하늘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탄항산의 지명유래에 대해서는​ 마을에서 보면 산 위로 달이 걸린다 하여 월항이라 불렀고, 그것이 옛 문헌이나 지도에 표기되면서 탄항이 되었다고 한다.​ 평천리 마을사람들은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고 하여 봉화산(烽火山)이라고도 한다. 탄항산 정상석이 있는 곳에서 북쪽 세번째 봉우리인 일명 모래산 정상(648.8m)에는 조선시대 탄항봉수(炭項烽火)가 남아 있다. 탄항봉수는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평천리,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위치하여 제2간봉 노선의 내지봉수로 남쪽의 문경 호계 선암산(禪巖山)봉수와 연결되어 서쪽의 충주시 수안보면 사문리와 미륵리 경계의 지릅재 남쪽 해발 640m에 위치한 마골치봉수(麻骨岾烽燧)로 신호를 보내고 마골치봉수는 수안보면 온천리의 주정산봉수(周井山烽燧)로 전달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 “현의 북쪽에 있으며, 남쪽으로 호계 선암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연풍 마골점에 응한다”라 기록된 이래 조선시대 편찬된 각종 지지에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규모는 동서 35m, 남북 방향 약 10m로 전체 둘레는 약 84m이다. 현재 방호벽 주변으로 활용이 없어 보이는 군사 교통호가 설치되어 있어 훼손이 있지만 연대와 방호벽 등의 석축이 일부 남아 있고, 봉군이 상주했었을 추정 건물지 주변으로 도자기편과 기와편이 흩어져 있다. 출입시설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국립공원공단에서 설치한 모래산 이정목에서 왼쪽으로 들어가 처음 마주하는 군참호시설이 있는 곳이 출입문이 아니었나 추정해본다. 2002년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에 의하여 지표조사가 이루어졌다.

 

탄항봉수 연조

탄항봉수 주변의 버려진 군 교통호와 참호시설은 이곳이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하로 이자 격전지 였음을 상기시켜 준다. 19506.25전쟁 개전 26일차인 720일에 김일성이 북한군 전선사령부가 있던 수안보면 사문리 석문동(추정) 까지 직접 내려와 “8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해 통일전쟁을 끝내라”고 지시했다. 당시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수안보에, 1군단과 제2군단은 김천과 안동에 각각 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북한군의 남하 이동경로 중 한 축이 사문리를 지나 미륵리를 통해 이곳 하늘재를 넘어 문경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우거진 수풀 속에 남아있는 탄항봉수의 흔적을 확인하고 오늘 마지막 구간인 하늘재에 도착한다.

하늘재(계립령鷄立嶺)는 충북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잇는 고개로서 삼국사기에 ‘아달라 이사금 3(서기 156)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기록돼 있다. 신라 제8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해 길을 개척했고 이 길을 통해 충주에 이르고 그곳에서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한강하류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죽령길이 이보다 2년 뒤에 개척됐으니 기록상으로 볼 때 하늘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다. 조선 태종 14(1414) 조령로가 개척되고 임진왜란,정유재란,병자호란을 거치며 험준한 조령로가 군사적으로 더 중요시되자 하늘재(계립령)로는 점차적으로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늘재,계립령이외에도 한훤령,대원령,지릅재,겨릅산,마골점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현재 명승 제4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걷기 좋은 하늘재 옛길을 따라 미륵리원터,복원중인 미륵대원지터를 구경하고 충주 수안보면 미륵리로 내려와서 이번 백두대간 산성과 봉수 유적 조사를 마무리한다. 미륵리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송계발 버스를 타고 다시 수안보를 거쳐 충주공용버스터미널에 도착한 후 서울행 버스로 무사히 돌아왔다.

 

 

<참고자료>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성곽봉수편)_국립문화재연구소

안태현, 「문경새재 어류산성에 대하여」, 『학예지』13_육군박물관_2006

차용걸, 「조령관방시설에 대한 연구(1)」, 『사학연구』32_한국사학회_1981

문경탄항봉수지표조사보고서_문경문화원,충북 대중원문화연구소_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