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보배로운 섬, 진도(珍島)의 조선시대 수군진성과 읍성(2017.03.04 토)

필그림2 2017. 3. 12. 18:16

보배로운 섬, 진도(珍島)의 조선시대 수군진성(水軍鎭城)과 읍성(邑城)

- 남도진성(南桃鎭城), 금갑도진성(金甲島鎭城), 진도읍성((珍島邑城) -



늦은 밤 진도읍내에 도착하였다.

진도읍내에 들어가기 전 조명으로 빛나는 진도대교를 지나며 차창으로 느껴진 봄 기운은 저 위쪽 지방과는 사뭇 달랐다.

잠에서 깬 새벽, 아직 깜깜한 진도읍내는 낯설어서 그럴까 그리 아늑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조금 을씨년스럽고, 여전히 아침 저녁으로는 공기가 차다.

진도에서도 남쪽 끝 서망항으로 향했다.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은 조그만 항구, 근처에는 2014년 4월16일 인천항에서 승무원 포함 승객 476명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하던중 진도 앞바다 병풍도 인근에서 침몰하여 304명이 사망,실종된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후 추모의 현장이 된 팽목항이 있다.(9명은 아직 미수습 상태이다) 여명이 밝아오는 서망항에는 이 참사의 한 원인을 제공한 진도연안해상관제센터(VTS)가 숨죽이듯 위치해 있었다.

일행과 이곳 서명항에서 헤어졌다. 곧장 조선 전라우수영 소속의 남해안 연안 수군진성과 읍성을 찾아나섰다.

먼저 이곳 서망항에서 약 5km 떨어진 임회면 남동리에 위치한 남도진성으로 향했다. 남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동서 관통로와 북쪽 진도읍내로 연결되어 있는 북고남저의 꽤 넓은 평지에 위치에 위치해 있었다.


남도진성은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어 조선 수군진성 연구에 아주 중요한 유적이다. 조선 초기에 왜구가 해안을 자주 침범하여 해안과 섬 지방에 성을 쌓고 수군을 파견하였다. 당시 이곳의 지명이 "남도포"였으며 종4품의 수군 만호가 지휘하였다.

남쪽으로 바다와 접하고 주변은 남서쪽의 망대산과 서망산이 감싸고 있어 멀리있는 적을 감시하기에 좋은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교통이 발달해 이동이 원할하다. 길이는 610m, 높이는 5.1m이다. 석성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성안의 관아와 객사 및 내아가 복원됐다. 동·서·남문 등 3개 문이 있고 남문에는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과거 성안에는 2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이주하고 집도 1가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철거한 상태였다. 내부 부속건물들이 복원되어 있으나, 복원을 위한 환경개선사업이 한창이라 휑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순천 낙안읍성과 같이 성내 주민이 공존하지 않아서 어떤 모습으로 단장될 지 궁금하지만 과거와 같은 사람사는 생동감은 사라질 것 같다. 남문 앞으로는 바다와 접해있는데 활을





남도진성

진도 남도진성 자리는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향하기 직전까지 마지막 항전을 벌였던 유적지로서 진도 남도진성은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의 진도 남도진성은 조선시대에 재축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1964년 6월 10일에 사적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바다를 앞에 두고 있는 남동리를 남도포(南桃浦)라 불렀다. 남도포에는 삼국시대부터 해안경비에 이용된 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정부는 이곳 남도포에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수군과 그 지휘관인 종4품인 만호를 배치하고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진도 남도진성을 축성했다.
당시 남도포의 만호는 조도의 해역과 신안 하의 해역을 관할했다. 기록에 따르면 남도포에 만호부가 처음 생긴 것은 1438년(세종 20) 정월(음력 1월)의 일이라고 전하고 있어 현존하는 진도 남도진성은 세종 20년 이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진도 남도진성은 평탄한 대지 위에 축조한 평지성으로서 현재 남동마을의 대부분을 감싸고 있다. 남동리는 서방 및 남방으로 돌출한 서망산 및 망대산 사이의 내해에 자리 잡고 있다.
진도 남도진성은 망대산 하록의 북단에 위치해 외부에서 보면 S자형으로 구부러져 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는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으면서 진도 남도진성 남서쪽의 망대산과 서망산에서는 적을 감시하기에 좋은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진도 남도진성의 길이는 610m, 높이는 5.1m이다. 석성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성안의 관아와 객사 및 내아가 복원됐다. 동·서·남문 등 3개 문이 있고 남문에는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성곽의 형태는 동벽의 길이가 서벽에 비해 약간 짧은 사다리꼴이다. 성벽은 1m 내외의 장대석으로 성의 기초를 구축한 다음 상부로 올라 갈수록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내탁법에 의해 쌓아 올렸다. 성돌은 방형 및 장방형의 판석형의 돌로써 대개 대형석재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쌓았다.

동·서·남문 등 3개 문이 남아 있는데 그 규모는 각각 폭 2m, 3m, 3.7m이다. 또한 서문과 동문에는 각각 2개 및 1개의 문지 초석이 남아 있다. 이들 문에는 각각 옹성을 두었다.
진도 남도진성의 남문 앞으로는 동에서 서쪽으로 천이 흐르고 있는데, 주민들은 이 천을 ‘가는골(세운천)’이라 한다. 이 개천에는 두 개의 홍교가 있는데 남문 바로 앞에 단홍교가, 이로부터 9m 거리에 쌍홍교가 위치하고 있다

동·서·남문이 있던 자리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해안지방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위치임을 보여주는 유적으로서 가치가 크다. 

<디지털진도문화대전>


남도진성은 현재 남동마을을 감싸고 있는 평탄한 대지 위에 돌로 축조된 성이다.

조선 초기에 왜구가 해안을 자주 침범하여 해안과 섬 지방에 성을 쌓고 수군을 파견하였다. 당시 이 곳의 지명이 '남도포'였으며 만호가 책임자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남도포수군만호진성'이라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남도포에 만호가 처음 생긴 것은 조선 세종 20년(1438년) 정월의 일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현재 남아있는 성은 세종 20년 이후에 쌓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의 둘레는 610m, 높이 2.8m ~ 4.1m 에 이르며, 성문과 옹성 등도 형태가 뚜렸하다. 남도석성은 수군만호진성으로는 그 유적이 잘 남아있어 보존 가치가 매우 크다.  

진도 남도석성 내 관아터 발굴조사는 남도석성 내 관아터 일부를 대상으로 유구의 존재 유무와 성격 및 잔존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2010년 6월 22일부터 2011년 2월 14일까지 동신대학교문화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남도포진은 1438년(세종 20년)에 만호진으로 설치되었으며 성은 1491년(성종 22년) ~ 1498년 (연산군 5년) 사이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759년(여지도서 출간) 이전 어느 시점엔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된 것으로 보인다.

본 조사는 관아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 내 6개 필지를 대상으로 실시한 것으로 조사결과 확인된 유구는 배수로와 우물, 석열, 그리고 근대 가옥터 등이다.

조사중 기와편(차륜문, 청해 파문, 횡선문, 집선문 등), 백자편, 옹기편, 동전(상평통보) 등이 출토되었다.


금갑도진성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수군진(陣).

금갑진성은 조선시대 남해와 서해를 잇는 주요 해상교통로에 위치하였으며, 왜구를 막는 전략상의 요충지로 조선 수군만호가 지휘하는 수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성벽은 돌로 쌓은 석성이며, 축조된 시기는 1485년에서 1499년 사이로 추정된다. 현재 잔존하고 있는 성곽은 성의 서측부와 북측부이다.

금갑진이 위치한 진도는 남해와 서해를 잇는 해상교통로에 위치하여 한반도의 연안항로와 중국 및 일본을 연결하는 군사 및 교역로의 주요한 길목이었다. 고려 후기에 들어와 여러 차례 왜구의 침략을 받으면서 진도에 수군진이 설치되었고, 세종 28년 무렵에는 금갑도진에 수군만호가 상주하였던 것으로 문헌 조사에서 밝혀졌다. 세조 때에는 금갑도진의 방어 거점으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군비를 강화하는 조처가 취해져 금갑진의 선군은 130명에서 291명으로 증원되었다. 금갑진성이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485년(성종 16)에서 1499(연산군 5) 사이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갑진은 다른 수군진에 비하면 크지 않았지만 보유 병선의 수는 12척으로 다른 수군진보다 많았다(경국대전).
『세종실록지리지』에 보이는 수군 편제는 여러 차례 변동이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수군 편제가 통일된 것은 1457년(세조 3) 진관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완성되어 『건국대전』에 등재되어 법제화되었다. 이에 의하면 전라도 수군은 전라 좌수영과 우수영의 2개의 주진으로 편재되어 있었는데, 좌도의 거진(巨鎭)은 사도에, 우도의 거진은 임치진에 두었다. 금갑진은 우수영에 속하였으며 거진인 임치진의 속진으로 수군만호가 지휘하였다. 전라도의 수군 편제는 1522년(중종 17)에 왜구가 추자도에 침입한 것을 전후하여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완도에 가리포진을 설치하고 첨사를 배치하면서 변화를 겪었다. 이때에 금갑진은 임치진의 속진에서 가리포진의 속진이 되었다. 이후 금갑진은 1894년 갑오개혁 당시 군사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각 군영의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다른 수군진들과 함께 폐진되었다.

전라남도 진도의 남동쪽 끝에 있는 의신면 금갑리 해안에 위치하며 접도와의 사이에 수로가 발달하여 있다. 진도군 진도읍에서 남쪽으로 의신면 면소재지가 있는 돈지리까지 와서 18번 일반국도를 따라 계속 남쪽으로 가면 금갑리 해안도로의 입구에 다다른다.

중종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진도 금갑진성에 대하여 “석축으로 둘레 1,153자, 높이 8자, 샘 1이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문화유적총람』에 금갑진은 성 주위 315m, 높이 3.3m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성의 규모는 1,050자, 높이 11자 정도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석루(石壘)가 약 5칸이 되는 곳에 깊이 4자 내지 10자, 폭 약 3칸의 해자로 생각되는 것이 있다.”고 보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해자가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금갑진지도』에는 동·서 2개의 성문이 표시되어 있고 성 내부에 객사, 아사(衙舍), 내아(內衙), 한문루(閑門樓), 운고(運庫), 장청(將廳), 사령청(使令廳), 군기화약고(軍器火藥庫), 진무청(鎭務廳) 등의 건물이 있었으며 성 밖에 인접하여 선창(船倉)이 있었다. 관원으로는 만호 1명과 군관 13명, 이(吏) 11명, 지인 3명, 사령 8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접도금갑리 해안 사이에 형성된 수로를 마주하는 낮은 산지에 금갑진이 있으며 진도 금갑진성은 성의 존재를 은폐하기 유리한 지형을 활용하여 입지하면서 자연지형의 험준함을 살려 성곽을 축조함으로써 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금갑진성의 바로 앞에 위치한 접도금갑리와 연결되어 있고, 주변이 청정수역인 데다 천연수림과 쪽빛 바다가 어우러져 수려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다.
현재는 금갑진성의 대부분이 훼철된 상태이며 흔적만 확인되는 성의 북측 성벽과 서측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현재 가장 양호하게 보전된 부분은 북측 성벽으로, 길이 약 25m, 높이 3.5m 정도로 마을 주민의 집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금갑진지도』에 나타나는 건물 중 현존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4기의 만호비가 남아 있다.

<디지털진도문화대전>


진도 금갑진성(珍島 金甲鎭城)은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이다. 2005년 7월 13일 전라남도의 기념물 제234호로 지정되었다.

진도 금갑진은 남도포수군진과 함께 전략상의 교통 국방의 요충지에 자리한다. 금갑진성은 항로를 감시하고 통제하기에 좋은 지리적 전략적 위치에 입지하고 있다. 산지 지형과 해안 지형을 절묘하게 잘 배합하여 입지하였고 성곽도 그런 지형 조건을 활용하여 축조한 것이다. 이것은 방어에 유리하면서 해안 일대를 감시하기에 좋은 최적의 자연 지형을 선택 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금갑도진에 대한 기록은 세종 28년(1446)에 처음 나타난다. 여귀산 목장의 관리를 논의 하는 기록에서 그 관리의 주체로서 진도군사, 남도포 만호와 함께 금갑도만호가 기록되고 있다.(<세종실록> 권111, 세종 28년 1월 신묘조) 늦어도 이 무렵에 금갑도진에 만호가 상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금갑도진은 조선시대 초기에 설진된 수군만호진으로 진성은 성종 16년(1485)부터 연산군 5년(1498) 사이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왜구 방어의 요새로서 기능하고 임진왜란시에는 전라우수영과 밀접히 연결되면서 큰 구실을 하게 된다.

현재 성벽은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조선시대 초기에 설진, 축성되어 왜구 방어의 선봉이 되었던 역사성, 그리고 인근한 남도포 수군진성(사적 127호 남도석성)등 서남해안의 수군진성과의 연구 비교 등의 측면에서 보면 학술적 가치도 있다.

이 성에는 만호를 비롯한 여러 관원들이 배치되었으며, 왜적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각종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진도 성곽조(城郭條)에 따르면 금갑진성은 성 둘레 1,153자[尺], 높이 8자[尺]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증보문헌비고> 성곽조에 따르면 둘레 1,051자, 높이 11자, 치첩(雉堞) 45, 우물 3개소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지적도를 통해 추정한 성벽의 총연장길이는 약 800미터정도 된다. 금갑진성에는 만호를 비롯한 여러 관원이 배치되었으며, 수군을 지휘 통솔하여 왜적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각종 건물과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관원으로는 만호(萬戶) 휘하에 군관 13명, 아전 11명, 지인 3명, 사령 8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성내시설로는 성곽과 성을 출입하는 동서 2개의 문이 있었고 그 내부에 객사, 아사, 내아, 폐문루, 환고, 장청, 사령청, 군기화약고, 진무청 등의 건물이 있었다. 성곽밖에는 해자 시설이 있었으며 성 밖에 인접한 바다에는 선창이 있어 군선을 정박해두고 있었다. 현재는 서측과 북측의 성벽 일부만 남아 있고 내부에는 민가들이 들어서 있지만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

<위키백과>



진도읍성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69외

1437년 해진군(海珍郡)에서 분리되어 독립한 진도군은 3년간 고읍성을 치소로 삼고 있었다. 진도읍성은 1440년(세종 22) 진도고읍성에서 현재의 진도읍으로 진도군의 터전을 옮기면서 축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치소(읍성)의 입지 조건으로는 바다와 가까운 요해지로서 백성들의 생업을 편안히 하고 방어하기에 편리하고 쉬운 곳이었다. 이 점에서 보면 진도고읍성은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과 가까이 있는 편리함을 제외하면 진도 전 지역을 관할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진도의 중앙부인 현재의 진도읍으로 치소를 옮김으로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진도군수의 파견은 이로부터 5개월 20여일 후인 1440년 8월 27일에 이루어졌다. 진도읍성은 1440년경에는 축성을 시작하여 1446년에는 완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도읍성진도읍 성내리 해발 15~18m의 평탄 대지와 군강공원(57.5m)의 야산을 연결하여 쌓은 평산성으로 읍성의 평면 형태는 동서 장축의 사다리꼴에 가까운 장방형이다. 지적도에 의한 성벽의 총 복원 길이는 외벽을 기준하면 약 1,589m로서 북벽 465m, 남벽 432m, 동벽 387m, 서벽 305m이다.
체성은 대체로 동벽과 서벽은 직선에 가깝고, 남벽과 북벽은 지형에 따라 약간 곡선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문은 동·서·남문지 등 3개소를 두었고, 이들 성문에는 성곽의 출입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을 설치하였다.
측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방어 시설의 일종인 치는 지적도상에서 모두 16개가 확인되나 현존하는 것은 5개소뿐이다. 치는 성벽의 길이가 긴 남벽과 북벽에 각각 5개, 성벽이 짧은 동벽에 3개, 서벽에 2개를 설치하였다.
성내의 지형은 동북쪽인 군강공원 정상부가 57.5m로 가장 높고, 성 북쪽 지역은 15~18.3m 정도이며, 성 남쪽 지역이 가장 낮다. 이에 따라 성내의 물이 남쪽 성벽 쪽으로 흐르게 되어 있는데, 남벽 중간 부분에는 1개소의 수구를 설치하였다.
성벽의 바깥 면에는 해자를 만들었다. 동벽의 1호 치와 북벽의 2호 치 사이에서 인공 해자가 확인된다. 남벽 2리 지점에 위치한 남천과 읍성의 서북쪽에 위치한 북산으로부터 발원하여 서벽을 경유, 남천으로 흘러드는 순천내골에서 자연 해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장대는 동문 밖 5리 지점에 위치한 동산에 두었다. 따라서 진도읍성은 체성·옹성·치·여장·해자·장대 등을 모두 갖춘 조선 초기의 읍성으로 14~15세기 우리나라 읍성 축조 방법에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성터가 헐려 길이 되었다. 1987년 1월 15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군강공원 일부와 진도군청 뒤뜰 성벽 일부가 남아 있고, 문화재 지정 후 150m 가량 복원했다.    <디지털진도문화대전>


진도읍 성내리 철마산 아래에 있는 읍성으로, 세종 19년(1437) 진도군으로 독립되어 지금의 자리에 성의 둘레 3,400척, 높이 11척의 읍성을 쌓고 3문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여지도서』에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 14개, 성벽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쌓은 성벽으로 그 위에 쌓은 낮은 담인 치첩이 58개가 있으며, 성안의 연못은 둘레 4,500척, 깊이 5척이고, 성안에 우물 5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 성곽형태는 4각형으로 서벽을 동벽보다 짧게 쌓아 올렸다. 성벽은 동북 모퉁이에 있는 군강공원 쪽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데, 높이 2∼3.5m. 길이 50m 정도이다. 북쪽의 성벽은 진도중·고등학교와 군청, 진도초등학교 북쪽 부지의 외곽을 감싸고 있는데, 군청 뒷쪽에는 높이 1.8∼2m의 성벽이 약 50m 정도 남아있고, 진도중·고등학교 뒷쪽에는 높이 1∼1.2m 정도의 성벽 하단부만 남아있다. 서쪽의 성벽은 학교부지 서쪽에 약 50m가 남아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진도읍성은 세종 19년(1437)

해진군에서 진도군으로 복군될 대 지금의 고군면 고성리에 터를 잡았으나 진도의 중심이 될 수 없어지금의 철마산 아래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 규모는 둘레 3,400척, 높이 11처그 샘 9개소, 연못 1개소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읍성은 사각형으로 서쪽의 성벽이 동쪽보다 짧게 축성되었다.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된 평산성으로 평지에서는 내외 양벽 쌓기 방법으로, 구릉에서는 외벽 쌓기를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군강공원 동쪽의 60m, 동벽 군강공원으로 군청 북쪽에 이르는 150m의 북벽, 군청 서북쪽의 50m, 서벽 및 현 목천극장 앞 민가에 약 20m의 남벽이 남아있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