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신미양요의 치열한 격전장, 강화(江華) 광성보(廣城堡)(2015.12.05 토)

필그림2 2016. 1. 10. 21:21

신미양요의 치열한 격전장, 강화(江華) 광성보(廣城堡)

- 한해가 저무는 12월, 처절한 역사 현장에서 도도히 흐르는 강화해협 염하(鹽河)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기다 -


광성보(광성돈대,용두돈대,손돌목돈대,광성포대)

 

<강화의 국방유적 개요>

 

고려 고종19년(1232)에 몽골의 침략을 피하여 강화도로 천도한 후 내성,중성,외성을 수축 및 축성하였다. 이후 무인정권의 붕괴로 강화도 천도 39년만인 원종11년(1270)에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이 시기 대몽항쟁의 주력부대이던 삼별초군이 동년 6월 진도로 이동하기 전까지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조선에 들어와 수군 강화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어오자 인조2년(1624)에 경기 수영을 남양(화성)에서 강화로 옮겼고, 인조5년(1627)에는 정묘호란으로 몽진하였으며, 도성방비를 위한 지역적 수비체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강화도호부를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켰다. 인조7년(1629)에는 경기 수영을 교동으로 이전하고 교동현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또한 인조11년(1633)에 경기수영을 경기, 황해, 충청 3도의 수군을 총괄하는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으로 확대 개편하는 등 군사적 역할이 증대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경상우도수사를, 삼도수군통어사(三道水軍統禦使)는 경기수사를 겸직했다. 인조14년(1636)에는 병자호란으로 왕실의 대군,세손,비빈 등이 강화로 피난했다. 현종1년(1660)에는 강화산성을 수축하고 행궁을 보수했다. 숙종4년(1678) 강화부에 진무영(鎭撫營)을 설치하고, 숙종5년(1679)에는 강화 연안에 12진보 53돈대 8포대 등 강화 해양방어의 체계가 완성되었다. 고종3년(1866)에는 병인양요를 계기로 갑곶진,강화내성,김포문수산성,정족산성 등지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고종8년(1871)에는 신미양요를 계기로 미군과 초지진,광성보 등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고종 12년(1875)에는 일본 군함에 의해 운요호[雲揚號] 사건이 발생하고 이듬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현재에도 남북의 대치상황에서 국경역할을 하고 있으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