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경주 관문성(關門城)-양남 신대리성(新垈里城) 구역(2015.02.18)

필그림2 2015. 2. 19. 00:59

경주 관문성(關門城) - 양남 신대리성(新垈里城) 구역

-신라 수도 동남부 1차 방어성, 신대리성은 관문성의 일부인가, 아닌가-

 

 

 

관문성(關門城)은 경상북도 경주시(외동읍,양남면)와 울산광역시 북구(옛 울주군 농소면), 울주군(두서면)을 연결한 장성과 동대산(해발 660m)을 둘러싼 포곡식산성의 혼합식 성곽으로 총 연장 12km의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성곽이다.

삼국사기

신라 성덕왕 21년(722년) 10월에 축조될 당시, 수도의 남쪽 관문 역할을 감당하는 성으로 축조되었다.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모벌관문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래는 현재의 울산광역시경상북도 경주시 경계를 따라서 12km 가량 길게 이어진 장성(長城)이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퇴락하여 남아있는 것은 일부뿐이다. 성의 흔적은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에서 출발하여, 울산광역시 북구 중산동을 거쳐,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두산리까지 이어져있다. <위키백과>

임관군(臨關郡)은 신라시대에 수도였던 과거 서라벌로 불린 경주 남부와 울산시 북구 강동동 지역으로 구성되었던 신라의 과거 행정구역이다. 모벌군(毛伐郡) 혹은 모화군(毛火郡)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삼국사기 권 제34 잡지 제3 지리1 신라 양주 임관군>

신라는 변한의 후예이다. -중략- 장인들은 키가 3장(丈)인데 이빨은 톱니모양이고 손톱은 갈고리 모양에 몸에 검은 털이 났다. 음식은 안 익혀 먹고 짐승을 잡아 날로 뜯어먹고 심지어 사람까지 잡아먹는다. 그나라에 산이 수십리 이어져 있는 협곡이 있는데 쇠로 문을 만들어 굳게 지켰다. 그 이름을 관문(關門)이라 했다. 항시 쇠뇌를 쏘는 군사 수천명을 두어 지키게 했다. <신당서 권220 열전 145, 동이 신라전>

중심지는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가 중심지인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한 범위가 불분명하다. 경주시 남부 외동읍과 울산시 북구 지역이 옛 임관군 지역으로 추측된다.더구나 서라벌의 남쪽 관문이자 국방상의 요지이고 울산지방의 현(縣)들을 관할한 무척 큰 고을이었음에도 상세한 역사를 알 수 없다.

 

사적 제48호. 722년(성덕왕 21) 10월 일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각간 원진의 감독 아래 3만 9,262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축성했는데 둘레가 6,792보(12㎞)였다. 이 성은 산과 산을 연결하여 길게 뻗어 있으며 우박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 높은 산에 동해를 향해서 쌓았는데, 이것은 동해쪽에서 침입해오는 일본군을 감시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울산만에 상륙하는 일본군들을 이곳 관문성에서 저지하면 월성까지 쳐들어오지 못하므로 경주평야의 동북쪽, 즉 영일만 방면에서 상륙하는 일본군에 대비한 북형산성과 함께 일본군 방어에 전초적인 구실을 담당했던 것이다.

성벽은 가로 40~50㎝, 세로 20~30㎝의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해 정연하게 쌓아 매우 발달된 축성술을 보여준다. 반월성의 둘레가 1,023보인 데 비해 관문성은 그 규모가 매우 커서 〈동경잡기 東京雜記〉에 따르면 후세 사람들이 만리성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지금은 성문터로 보이는 석축과 창고터, 병사지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브리테니커사전>

 

경주로 들어 올 수 있는 가장 좋은 지역인 경주평야의 남동쪽에 자리한 산성이다. 곧 673년(문무왕 13) 9월에 축조된 북형산성(北兄山城)과 함께 영일만과 울산만으로 상륙한 왜적이 경주로 들어 올 수 없도록 방어하는 구실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722년 10월에 모화군(毛火郡)에 성을 축조하여 왜적의 길목을 막았다”고 하였는데, 모화군은 지금 관문성이 자리한 곳이었으므로, 이때 처음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삼국유사』에는 “각간 원진(元眞)이 3만9262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쌓았는데 길이가 6,792보5척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벽은 가로 40∼50㎝, 세로 20∼30㎝ 크기의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동해를 향해 쌓았다. 곧 동해 쪽에서 침입하는 왜적을 막기 위해서 우박천(牛朴川)을 사이에 두고 양쪽 높은 산에 축조하였다. 반월성(半月城)의 둘레가 1,023보인 반면 관문성의 길이는 6,792보5척이어서, 후세 사람들은 ‘신라의 만리장성’이라고 불렀다.

현재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졌고, 문터로 추정되는 흔적이나 창고터, 병사(兵舍)터 등만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다만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경주 남산성(南山城)의 성벽과 비슷하여, 축성술은 남산성보다 훨씬 발전한 모습을 보이며, 경주 주변의 여느 성곽과 달리 산과 산을 연결하여 길게 성벽을 쌓은 특수한 모습의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대리성은 막연하게 관문성(關門城)의 일부분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런데 근래 조사결과로 인해 관문성은 하나의 성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즉, 치술령(鵄述嶺)에서 경상남북도의 도계(道界)를 따라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 모화리 동편에 있는 산 아래에 이르는 약 12km에 달하는 장성(長城)과, 해발 590m의 신대리의 산 정상에 있는 둘레 약 1.8km의 신대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성은 『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는 모벌군성(毛伐郡城) 혹은 문화관문(蚊火關門: 혹은 毛火關門), 문벌관문(蚊伐關門)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후대에는 이를 딴 관문성(關門城)으로 불렀다. 722년(성덕왕 21)에 일본군의 침입로를 막기 위해 원진(元眞) 각간(角干)의 지휘 아래 3만 9,262명의 역도(役徒)를 동원해 축조하였다. 현재는 많은 부분이 훼손된 채 일부만이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신대리성은 이보다 이른 7세기 후반에 축조된 타원형의 산성으로 4곳의 문지(門址)와 성 안에서 건물지 등이 확인된다. 장성과는 달리 동해안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개축되어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정확한 성의 명칭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산의 이름으로 확인된 대점(大岾)을 따서 대점성(大岾城)으로 부르거나 현재의 지명인 신대리를 따서 신대리성으로 부른다.

관문성석각은 바로 신대리성의 초축(初築)과 관련된 기록으로, 대점성(大岾城)의 남쪽 성벽 바깥 하단부 성돌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까지 명문이 새겨진 성돌은 10개가 확인되는데, 모두 현재의 남문지(南門址)에서 동북쪽으로 약 350m 떨어진 수구(水口)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명문은 다듬어지지 않은 성돌의 외면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대부분 하나의 명문을 하나의 성돌에 새겼지만, 돌의 상황에 따라 하나의 명문을 연접한 두 개의 성돌에 새긴 경우도 있어 전체 명문은 8개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글자의 크기는 대략 4∼6cm이며, 글씨체는 예서풍이 남아 있는 해서체 혹은 단정한 해서체이다.

명문에는 성벽 축조에 동원된 군현의 남쪽 경계와 북쪽 경계, 작업 담당 거리를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신대리성을 축조하는데 골고(骨估)·거칠산(居七山)·웅(熊)·압탁(押啄)·금경(金京)·절화(切火)·퇴화(退火)·서량군(西良郡) 등의 군현이 동원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중 골고는 골포현(骨浦縣: 지금의 마산(馬山), 웅은 웅신현(熊神縣: 지금의 진해 웅천으로 추정), 거칠산은 거칠산군(居柒山郡: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래), 압탁은 압량군(押梁郡: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절화는 절화야군(切火也郡: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 퇴화는 퇴화군(退火郡: 지금의 경상북도 흥해), 서량군은 생서량군(生西良郡: 지금의 경상남도 울주) 등으로 비정되고 있고, 금경은 왕경인 경주로 추측된다.

이중 거칠산군·압량군·절화야군·퇴화군·생서량군은 왕경에서 가까운 삽량주(揷良州)에 소속된 군으로 금경도 왕경이 아니라 금관경(金官京: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로써 6세기 말 이래로 축성시에 군(郡)이 역역동원의 책임 행정단위 구실을 하는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골고(骨估)와 웅(熊)이다. 이 둘을 현으로 본다면 다른 곳은 군 단위로 하나의 역역집단을 구성하고 고유한 책임 공사구간을 할당 받은데 비해 이곳은 현을 단위로 역역집단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곳을 현으로 보지 않고 귀족들의 식읍(食邑)이나 왕실 직할지의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명문에는 각 군현이 맡은 담당 구역의 길이가 북쪽 경계 및 남쪽 경계와 함께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 척도(尺度)의 정확한 길이를 알 수 있다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당시의 1보(步)는 6척(尺)이고, 1척은 10촌(寸)이었으며 길이는 당척(唐尺)과 같은 약 29.4cm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동원된 군현이 담당한 작업 거리는 불균등하지만, 평균 약 6보 3척(약 11.7m)으로 추산된다. 그러므로 성벽의 둘레가 1.8km인 점을 고려하면 원래의 작업 구역은 약 150개 정도로 나뉘었을 것이고, 명문도 대략 그 정도 새겨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마멸과 후대의 보수 등에 의해 현재 8개의 명문만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작업 거리가 보·척·촌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어, 명문은 축성 완료 이후 새겨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에서 왕경 지역의 산성을 축조하거나 개축하는 데 지방민을 동원해 작업 거리를 할당하고 작업 책임을 부여했던 것은 6세기 대의 금석문 자료인「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와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에서 잘 나타난다. 그런데 이들보다는 시기가 떨어지는 이 명문에 의해 통일신라기에도 왕경 지역 산성의 축조가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사적 제48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