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면천(沔川) 옛 고을의 아련한 기억과 흔적 - 당진 면천읍성(唐津 沔川邑城)(2013.10.01)

필그림2 2013. 10. 2. 12:06

면천(沔川) 옛 고을의  아련한 기억과 흔적 - 당진(唐津) 면천읍성(沔川邑城)

 

 

 

면천군은 조선시대 내포지방 서북부의 행정,군사,경제의 중심지였으며, 구한말 의병들의 면천성 전투와 같은 항일의병운동과 항일독립운동의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옛 명성은 사라지고 무너진 면천읍성터와 함께 작고 초라한 면소재지로 전락하였다.

 

면천읍성(沔川邑城, 충남 기념물제91호)은 조선 세종 21(1439)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부터 내포(內浦)의 곡창지대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길이 1,558 m, 높이 4.5m, 3, 적대(敵臺) 7개, 옹성((甕城) 1, 치(稚) 7개, 여장(女墻) 56, 우물 3개가 있었고, 조선 초에 축성한 서해안 일대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2012년부터 면천읍성의 정문격인 남문을 정비하기 위해 주변 민가 23채를 매입하였고, 시·발굴조사와 함께 원형에 충실하게 성을 정비하고자 기존 성돌의 재질과 형태를 분석하다.  특히 축성을 위한 터파기 과정에서 설계면보다 1.5m 밑으로 초축(세종21, 1439)의 형태가 발견되면서 면천읍성의 축성 변천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남문 옹성부도 초축부가 후축면보다 4~5m 내부로 깊숙하게 쌓았고, 문루부는 방어를 최적화하기 위해 성곽 평행면보다 뒤물림해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면천읍성은 방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다른 평지읍성과는 달리 동서 끝단부가 남문보다 3~6m 낮아 포곡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양난을 거치면서 읍성이 붕괴되자 재축성 과정에서 기초면의 높이가 1.5m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 고종2년(1872)에 제작된 면천군 지도에 따르면 성안에는 동헌,내아,객사,내책실,외책실,급창방,내삼문,외문루,사령청,군기고,내창고,작청,장청,성황사 등이 있었다. 1950년대 말까지 600년 가까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해오던 읍성은 인근의 원동저수지 공사 때 제방 돌로 쓰이면서 허물어졌으며, 관아 건물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소실됐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객사는 해방 후 초등학교 교실 및 교무실로 사용돼 모습을 유지하다 현대식 건물로 지으면서 헐려 자취를 감췄다.

관아의 정문이였던 풍락루(風樂樓)는 처음 세운 기록은 알 수 없으나 1851년 당시 군수 이관영이 누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노후로 인하여 1943년에 철거되었다가 2007년 11월 옛 관아 자리인  면사무소 앞에 원형그대로 복원되었다.

성벽의 일부 성돌에는 옥천(沃川), 진잠(鎭岑), 석성(石城)등 충청도 관내 군,현의 명칭이 새겨진 명문석이 확인 되는데  이는 그 지역 백성들이 축성에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다.

 

면천의 역사 인물로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복지겸(卜智謙, 면천복씨 시조)이 있다.

왕건의 부하장수이던 복지겸이 전쟁터에서 큰 부상을 당한 뒤, 고향으로 내려와서 치료를 했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었는데, 그때 복지겸의 딸 영랑(影浪)은 날마다 아미산에 올라가서 아버지의 병을 낫게 달라며 100일 동안 정성스럽게 기도했다고 한다.
100일째 되던 날 밤 꿈속에서 신선이 나타나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려면 아미산에 피어 있는 진달래와 찹쌀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花井)의 물을 써야 하며, 이 술을 100일 동안 마시게 한 다음에는 마당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고, 치성을 올리면 병이 낫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영랑이 즉시 신선의 말대로 하자 아버지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하는데, 이후 아미산의 진달래와 안샘 물로 빚은 술이 면천지역의 전통주인 두견주(중요무형문화재 제86호)의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영랑이 아미산의 진달래로 두견주를 담그던 안샘은 면천초등학교 뒤편 논 가운데에 있고, 100년 역사의 면천초등학교에는 영랑이 심었다고 하는 1100여년 된 은행나무 2그루와 인근 순성면 양유리에는 복지겸의 묘가 있다.

 

또한  조선후기 이용후생, 법고창신의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정조 21년(1797) 7월 61세의 나이로 면천군수에 임명되어 1800년까지 37개월간 있었으며, 이곳에서 과농소초(課農小抄)14권과 그 부록격인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등 농업과 개혁정책에 관한 책들을 저술하였다. 

박지원의 흔적으로는 정조 24년(1800)에 면천읍성 동문 밖(면천향교 앞)에 버려진 골정지(骨井池 또는 언월지偃月池)를 정비하여 그 주위에 수양버들, 복숭아나무, 살구나무를 심고 그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어 6각 초가 정자를 짓고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란 현판을 걸었다. 인근의 향교 유생들이 즐겨 찾던 곳이라 한다.  이 건곤일초정은 2006년 복원되었다.

 

은행나무 곱게 물든 골정지 둑방에서 만난 문덕중(82세) 어른신은 면천에서 나고 자랐다고 하시면서 면천 은행나무, 읍성의 흔적, 박희란 박희관 형제의 효자문 등 면천의 옛 이야기와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해주셨다. 면천의 옛 흔적들과 함께 노란 은행나무 가로수와 무르익어가는 오곡의 들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길에서 가을로 깊어가는 면천의 정취에 흠뻑빠져 돌아오는 길 내내 아쉬움과 행복함이 겹쳐진 답사였다.

 

당진시는 면천지역의 고도성과 지역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2007년부터 2020년까지 '면천읍성 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향후 면천 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 시립박물관 건립과 함께 지역의 역사문화 관광자원의 한 축을 형성할 것이라고 하니 기대가 크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