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인천 고대사의 상징적 문화유산, 문학산성(文鶴山城) (2013.06.20)

필그림2 2013. 6. 20. 22:14

인천 고대사의 상징적 문화유산, 문학산성(文鶴山城)

- 문학산성은 비류의 미추홀 왕성인가? 군사기지와 졸속복원의 아쉬움을 남기며... -

 

 

 

문학산은 인천광역시 남구 문학동,관교동,학익동과 연수구 선학동,연수동,청학동에 걸쳐있는 갈마산,수리봉,문학산,연경산,노적산 등 5개 산봉우리를 총칭하며 문학산성은 주봉인 문학산(文鶴山, 213m 또는 224m)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활용한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원인천(原仁川, 현재 중구,동구,남구,남동구,연수구 일대)의 진산인 문학산은 조선시대에 인천도호부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하여 남산이라 불렸으며, 학의 모습과 같다하여 학산, 산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봉화뚝산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산정상부에 남아있는 문학산성에 의해 성산, 봉수대의 모양이 멀리서 바라보면 배꼽같다하여 배꼽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렇듯 많은 별칭이 있는 문학산은 인천이 역사에 등장할 무렵부터 인천과 함께한 산이기도 하다.

 

김부식의『삼국사기』「백제본기」에 의하면 졸본부여(卒本扶餘) 주몽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형제가 남하하여 형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나라를 세우고 동생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십제(十濟)"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생활하기 어려워진 반면 위례성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고, 비류는 병을 얻어 죽고 그 백성들은 온조에 귀속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비류가 남하하여 도읍한 미추홀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인주(仁州, 현 인천으로 비정)로 표기된 이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미추홀국(彌鄒忽國), 『여지도서』에 미추국(彌鄒國), 『증보문헌비고』에 비류국(沸流國) 등으로 기록하고 그 위치가 현재의 인천임을 명시하고 있다.

  

<문학산 정상 전경 ⓒ 2013.6>

 

미추홀의 위치와 문학산성에 대한 기록은 먼저 『세종실록지리지』에 "인천에 성이 있어 이곳을 미추홀 고성(彌鄒忽 古城) 혹은 남산고성(南山石城)이라고 하는데 둘레가 160보(步)이고, 성안에 봉수대와 작은 샘이 있다"라고 기록했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남산고성(南山古城)의 둘레가 430척(尺)이다"라고 기록하였다.『여지도서』 <인천도호부 고적조>에는 "문학산 정상은 미추왕(비류)의 고도"라 하였고,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문학산에는 비류의 성터가 있고 성내에는 비류가 파놓은 비류정(沸流井)이란 우물이 남아있다"라고 하여 조선시대부터 현재의 문학산성이 미추홀의 왕성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있다. 그러나 문학산성은 일국의 도읍으로 보기에는 너무 협소하고, 또한 인천지역을 도읍지로 판단 할 수 있는 삼국시대 대규모 성곽 또는 고분과 같은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옛 지명과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충남 아산설(牙山說)과 경기도 양주설(楊州說) 등 다른 지역을 미추홀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성벽의 총 길이는 577m이고, 동쪽과 남동쪽에 잔존하는 부분은 339m이나 육안으로 성벽을 알 수 있는 부분은 220m이며 성벽의 높이는 약 1.5m∼4m로 남았다.

성벽은 장방형의 면을 가지도록 수평고임쌓기로 정연하게 축조하였다. 성벽의 외측 기단 아래에서는 2∼3단을 안쪽 방향으로 10∼15cm씩 들여쌓거나, 경사가 완만한 기초부에 보축을 하였다.

인천시립박물관 초대관장이던 이경성(李慶成)이 1949년에 쓴 『인천의 명승고적』에서 "문학산에는 외성으로 석축의 성벽이 둘레 430尺이고, 내성으로 약 600間 토축이 있다"라고 했으며, 1953년에 쓴 『인천의 고적』에서는 "문학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었고, 외성은 석축의 성벽으로 주위 약 200m, 내성은 토축의 성벽으로 주위 약 100m로 되었다"라고 더 자세히 문학산성의 외성과 내성을 기술했다.

또한 1949년 이경성을 필두로 한 인천시립박물관 조사단은 문학산성을 비롯한 문학산 일대의 유적 전반을 종합적으로 조사해『문학산 방면 고적전설 조사보고서』를 남김으로써 문학산 방면에 대한 유적들의 개략적인 면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후대 학술조사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하였다.

1997년 인하대박물관에 의한 지표조사에서 본래 토성이었던 것을 삼국시대 말이나 통일신라시대에 석성으로 개축되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라 보고했다. 또한 문학산성 내에는 안관당(安官堂),내성(內城),우물지,봉수 등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여지도서』에는 임진왜란 당시 인천부사이던 김민선(金敏善)이 사민(士民)을 이끌고 산성을 보수하여 수차례 일본군과 싸웠는데 선조26년(1593) 7월에 병사하자 김찬선(金纘先)이 성을 사수하였다고 한다. 안관당이 바로 김민선 부사를 모신 사당이다.

 

문학산성 내의 봉수는『세종실록지리지』와 함께 후대 지지와 읍지에 그 기록을 볼 수 있는데 대체로 성산봉수(城山烽燧)라 표기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인천도호부 봉수조>에는 "성산봉수는 남으로 안산군 오질이봉수(吾叱耳烽燧, 현재 正往山)에 응하고, 북으로 부평부 축곶봉수(丑串烽燧)에 응한다"고 하였다.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지름 360㎝의 만두형 봉수대가 남아 있고 이를 미추왕릉(彌鄒王陵)으로 보는 전승이 있다"라고 하였으며,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의『문학산 방면 고적전설 조사보고서』에서는 "그것이 토축의 원루였다"라고 하였다.

 

<새로운 성돌로 복원된 문학산성  동남쪽 성벽 ⓒ 2013.6>

 

<문학산성 남쪽성벽 주변에서 수습한 토기편과 기와편 ⓒ 2009.7>

 

문학산성은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다가 개항기 인천 연안의 방비가 중요시되자 일부가 다시 수축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일제강점기에는 별다른 보호조치가 없었으며, 6.25전쟁을 거치면서 땔감으로 산림이 황폐화되는 등 더욱 퇴락하였다. 1958년 인방석이 주저앉고 성벽도 허물어진 동문지를 복원하고, 인방석에 '文鶴山城東門' 이라 표석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9년 미군기지 건설이 발의되고 1960년 이를 위한 공사가 진행되면서 문학산 정상부를 대대적으로 삭토하고 산성의 서문지를 비롯한 성벽이 헐려버렸고, 1962년 미군이 상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봉수대와 건물지, 그리고 동,서문지 등이 멸실된 것으로 보고있다. 1979년 미군이 철수한 후 그 자리에 한국군 방공포부대가 들어서면서 산성의 동쪽 저지대를 복토하고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때 산성 내 우물이 매몰되었고, 암반이 폭파되기도 하였다. 1986년에는 산사태로 성벽이 유실되기도 하였다.

최근 2009년에서 2010년 9월까지 10억여원을 들여 현재 흔적이 남아있는 339m 중 180m를 부분적으로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옛 성벽의 재질과 형태에 대한 충분한 고증이 없이 완전히 새롭고 반듯하게 가공한 성돌로 복구하고 성벽에 매우 근접하여 통행용 나무데크를 설치해 놓아 예스러운 멋과 고즈넉한 느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더구나 높이 5m 정도로 복원된 성벽 일부가 인공벽돌로 쌓았거나 돌로 메웠을 뿐 아니라 성벽도 대부분의 구간이 끊어져 있어 졸속복구라는 지적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유적의 복원에 있어서 손대는 것이 안하느니 보다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유적을 복원할 때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역사적 고증과 충분한 복원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

 

문학산 정상 주변의 옛 관방유적에는 여전히 현대적 군사시설이 유지되고 있다.

이는 세월의 변화에도 이 지역이 여전히 군사적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문학산 페트리어트 미사일 배치계획 철회운동과 군부대 철수운동과 같은 시민운동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있는 것도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문학산을 진정한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역사문화공원으로 만드는 것이야 말로 진정 후손들을 위한 희망이자 의미있는 도전이라고 말하고 싶다.

문학산성의 완전하고도 제대로 된 복원을 위해서라도 산정상의 군사시설이 이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자료>

 

『문학산성지표조사보고서(文鶴山城地表調査報告書)』 「인천광역시,인하대박물관」 1997.

『문학산일대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 「인하대박물관,인천광역시」 1999.12

『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인천광역시 남구청,인하대박물관」 2002.12

『文鶴山-문학산 속으로 걸어가기(학산문화총서2)』「인천광역시 남구학산문화원」 20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문학산성』「한국학중앙연구원」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