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신라 축성기술의 절정, 양주 대모산성(楊州 大母山城) (2013.05.06)

필그림2 2013. 5. 9. 03:31

6~7세기 신라 축성기술의 절정, 양주 대모산성(楊州 大母山城)

- 임진강과 한강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나당전쟁의 매초성으로 비정되는 산성-

 

 

5월의 아련한 신록은 강산의 생명력을 돋보이게 한다.

이런 풍경과 함께 듬성듬성 산벚꽃,산복사꽃 등 연분홍빛 산목들의 개화는 이 계절에만 느낄 수 있는 호사스런 풍광이 아닐 수 없다. 형형색색의 야생화와 봄바람 그리고 지저귀는 산새소리는 호젓한 산길을 따라 선인들의 엄숙한 흔적을 찾아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평온하고 가볍게 해준다.

이렇듯 5월의 산성답사는 자연의 위대함에 겸손해지고 자연이 주는 활력 속에서 고즈넉한 역사의 현장을 오감으로 느끼는 치유의 시간이다.

서울외곽순환도로를 이용해 의정부로 빠져나와 양주 대모산성(大母山城)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의정부에서 연천으로 이어지는 국도 3호선 대체우회도로 건설공사가 한창이라 어수선한 도로를 따라 양주시 덕계동에 도착하여 양주시청과 양주관아지를 지나 대모산성 아래에 위치한 오산삼거리에 도착했다. 오산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길게 늘어진 바위산이 양주의 진산이자 9개의 고구려 보루가 있는 불곡산(佛谷山,470.7m)이고, 좌측으로 보이는 밋밋하고 낮은 산이 대모산성이 있는 대모산(大母山,212.9m)이다.

 

대모산성을 찾아가려면 백석면 방성리의 대성사에서 오르는 길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사방 다양한 길이 있다. 나는 오산삼거리에서 곧장 밭길을 따라 산으로 이어지는 길로 접어 들었다. 먼저 대모산성이 있는 정상 북쪽 아래 평탄지에서 삼국시대 토기편과 기와편이 널려있는 용도미상의 건물지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외성으로 추정되는 토성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군이 교통호를 만들어 놓아 많이 파괴되고 있었다. 이 지점을 지나 급경사의 오솔길을 오르니 대모산성 북문지에 이르렀다.

 

<대모산성 북문지 및 주변 잔존 성벽>

 

대모산성은 양주시 어둔동과 유양동 그리고 백석읍 방성리에 걸쳐있는 대모산 정상부를 감싸고 있으며, 남서쪽이 낮고 북동쪽이 높은 지형의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약 1.4km이며 성벽은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나 북문지,서문지,동문지 3개소 좌우측에 70~80m 정도 성벽이 잘 남아있다.

성벽의 높이는 4~5m이고 잘 다듬은 할석으로 견교하게 들여쌓기를 하고 보축(補築)을 하였다. 기저부 폭은 지형에 따라 6~8m 정도로 육중하고 견고한 축성술을 볼 수 있었다.

대모산성은 신라 문무왕15년(675년) 당나라 장수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크게 무찌른 나당전쟁의 주요 항쟁지인 매초성(買肖城 : 또는 매소성)으로 비정되는 곳 중에 하나이다. 신라가 삼국통일 과정에서 당나라 세력을 대동강과 원산만 이북으로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매초성의 위치를 확인하는 조사의 일환으로써 1980년부터 1984년까지 5차례에 걸쳐 문화재연구소와 국사편찬위원회에 의해 북문지,성벽 등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1995년과 1998년 한림대박물관에 의하여 동문지 및 서문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대모산성이 있는 곳은 북한산(北漢山,836m) 북쪽에서 호명산(虎鳴山,423m)을 지나 불곡산(佛谷山,470.7m), 도락산(道樂山,441m)이 남동에서 북동으로 이어지는 지맥에 위치하고, 북서쪽으로 가깝게는 백석면과 멀리 광적면 일대가, 남동쪽으로 가깝게는 주내면과 멀리 의정부시가 바라보인다. 따라서 대모산성은 남북으로는 해발400m 전후의 산으로 이어져 막혀있으나, 남쪽에는 한강이 북쪽에는 임진강이 위치하고 있으며, 북서쪽과 남동쪽은 비교적 넓은 평지로 문산 또는 적성방면에서 서울지역으로 남하하거나 연천에서 동두천을 거쳐 서울로 남하하려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교통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대모산성 서문지 및 주변 잔존 성벽>

<대모산성 동문지 및 보축성벽 흔적>

 

대모산성에 관한 문헌기록은 『新增東國輿地勝覽』楊州牧 古跡條에 "大母山城은 州 서쪽 5里 지점에 있으며, 石築城으로 둘레 906尺, 높이 5尺 이다"라고 기록하였다. 대모산성의 초축 기록은 알 수 없지만, 발굴유물로 보아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걸쳐 활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시대 유물로는 벡제,신라계 유물이 주류를 차지하지만 고구려 유물도 확인되었다. 따라서 5세기 중엽까지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인한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 후 6세기 중엽부터는 신라의 영토로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3개의 성문지에서 보이는 보축(補築)시설과 현문식(懸門式) 구조의 성문은 전형적인 신라성에서 주로 발견되는 형식으로 6세기말에서 7세기초에 현재 형태의 성곽이 완성되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유물은 대부분 건물지 내부와 추정 저장공, 문지 주변에서 출토되었는데, 무기류,농기류,마구류,건물부재,일반생활용구 등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중에는 덕부사(德部舍), 국(國), 부(富), 대부운사(大浮雲寺) 등의 명문기와도 출토되어 향후 체계적인 발굴과 정비과정에서 추가적인 명문자료의 발굴이 기대되며 대모산성과 관련된 지명연구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것으로 본다.

 

 <대모산성 출토 명문기와 - 양주시청 자료>

<대모산성 출토 통일신라시대 각종 토기편 - 양주시청 자료>

 

견고하고 정연한 성곽 축성 흔적과 지금까지의 발굴조사을 통하여 얻은 상당한 양과 질적으로 우수한 유물들을 볼 때 대모산성은 군사적,행정적 역할 뿐만 아니라 물류의 거점 역할을 수행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대모산성의 위상에 맞게 현재 양주시청과 문화재청은 국가사적지정을 위한 준비에 한창이다.

양주시는 지난 2012년 시비 6,000만원을 들여 국사사적지정 학술용역과 시,도비 8,000만원을 들여 한림대학교에 정밀실측조사 용역을 의뢰했으며, 문화재청은 지난 1월30일과 3월20일 두 차례에 걸쳐 현지 조사를 하는 등 사적지정을 위한 막바지 절차를 마치고 4월19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 예고하기에 이르렀다. 양주시는 대모산성이 곧 국가사적으로 지정되면 산성의 9필지 5만7742㎡를 매입하는 절차를 밟고 본격적인 복원작업에 들어간다고 한다.

향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후 체계적이고 정확한 조사와 발굴을 통하여 대모산성의 원형을 잃지 않으면서도 대모산성의 실체를 밝힐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자료>

 

『楊州大母山城 發堀報告書(한림대학교 박물관 연구총서4)』「문화재연구소·한림대학교박물관」 1990.

『城郭 길라잡이 제2권』「전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 2005.

『京畿道의 城郭』「경기문화재단」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