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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월간 사외보 <문화재사랑> 3월호 - 관습을 넘고 시대를 앞선 두 명의 여성 -

필그림2 2013. 3. 21. 19:45

문화재청 월간 사외보 <문화재사랑> 2013년 3월호(통권100호)

(특집)여성, 공존과 소통의 시대를 열다 - 관습을 넘고 시대를 앞선 두 명의 여성

 

 

 



성리학의 나라에 이름 떨친 천재 여류화가 - 신사임당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은 진사 신명화와 용인 이씨 사이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사임당’이란 태임을 본받으라는 뜻이다. 태임은 왕계의 부인이자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로 남편을 잘 보좌하고 아들을 잘 길렀는데, 특히 문왕을 임신했을 때 나쁜 것을 보지 않고 나쁜 말을 듣지 않으며 나쁜 말을 하지 않는 태아교육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임당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부모가 그에 대해 건 기대가 남달랐음을 말해준다.
부모의 기대와 같이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경전과 시문에 능통했고, 특히 글씨와 묵화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게다가 ‘바느질도 잘하고 자수까지 잘 놓아 절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라고 할 정도였다.

열아홉의 사임당은 세 살 위의 이원수와 혼인하였는데, 혼인 장소가 강원도 강릉이다. 아버지 신명화의 집도 남편 이원수의 집도 서울이었으나 혼인한 곳은 강릉이었다. 신사임당은 외가에서 자랐고 그곳에서 혼인을 하였다. 실제 사임당은 혼인 후에도 외가에 머무르게 되는데, 외가가 사실상 친정이었던 것이다. 그때의 사회풍습이 친정살이가 흉이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기록에 의하면 사임당은 혼인 19년만에야 시댁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사임당은 어머니와 울면서 헤어지고 대관령 중턱에서 친정을 바라보며 시를 짓는다.

학의 머리 되신 어머니를 강릉에 두고
이 몸 혼자 서울로 떠나는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 지는 곳에 저녁 산만 푸르네



율곡 이이에 따르면 ‘어머님은 평소 항상 강릉을 그리워해서 밤중에 사람의 기척이 조용해지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우셨고 어떤 때는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면서 항상 친정을 그리워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이가 어머니 사임당을 회상하면서 쓴 「나의 어머니 일대기」는 이렇게 끝맺고 있다. ‘어머니는 평소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일곱 살에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하다. 또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시늉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어머니의 그림을 모사한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이이가 마지막으로 기록하는 사임당의 모습은 화가였다. 이이의 스승인 어숙권은 ‘안견安堅 다음가는 화가’라고 신사임당을 찬하기도 했다. 사임당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지금껏 전해지는 많은 그림을 그렸다. 또한 사임당은 자식교육에도 진면목을 보였다. 사임당은 이선, 이번, 이이, 이우의 4남과 이매창 등 3녀를 두었다. 사임당의 재능은 크게 학문과 예술로 나눌 수 있는데 학문적 재능은 ‘구도장원공九度將元公’으로 불린 이이가, 예술적 재능은 넷째 이우와 맏딸 이매창이 물려받았다. 매창은 한시에 능했고, 이우는 시, 글씨, 그림에 능했으며 거문고도 잘 탔다고 했다.
경전·시문과 글씨·그림에 두루 뛰어난 재주, 게다가 자녀들까지 훌륭한 인물로 키워냈던 신사임당은 향년 4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현모양처라는 이름 뒤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화가 신사임당의 재능과 업적이 재조명되기를 기대해 본다.



신분을 뛰어넘은 여성 사회사업가 - 김만덕

뭍으로 장사를 다니던 아버지 김응열이 풍랑에 휩쓸려 세상을 떠났을 때 김만덕의 나이는 불과 10여 세였다. 그 해 전염병이 돌아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천애 고아가 된 김만덕에게는 험한 인생길이 펼쳐졌다.
남이나 마찬가지인 먼 친척집에서 여종이나 다름없이 허드렛일을 도와주며 살았다. 그 친척집마저 가세가 기울자 어린 김만덕은 어느 기생집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살림을 거들다 노래, 춤 등 기예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 늙은 기생 때문에 김만덕은 기생이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기생이 천한 직업임을 알게 된 김만덕은 양가 출신인 자신이 이 지경까지 온 것이 원통했다. 기생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깨달은 김만덕은 신분을 환원해 달라고 관가에 호소했다. 당시 기생은 관청 소유물이었으므로 그녀의 호소는 묵살되고 말았다. 그러나 제주목사를 찾아가 눈물로 호소하여 우여곡절 끝에 기녀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양인 신분이 될 수 있었다.

여성의 정절을 중시하는 조선 시대에 한때 기생이던 자신의 과거는 평생을 두고 장애요소가 될 것으로 판단한 김만덕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제주 포구에 모여드는 장사꾼들과 물자를 눈여겨 본 김만덕은 이곳에 객주를 차렸다. 객주는 여관 구실도 하였지만 외지 상인들이 위탁한 물건을 팔고 사는 중간상 역할도 했다. 김만덕은 기녀 시절의 경험을 살려 제주의 양반층 부녀자들에게 육지의 옷감이나 장신구, 화장품을 팔았다. 제주 특산품인 녹용이나 귤도 육지에 팔아 많은 시세 차익을 남겼다. 그 뒤 관가에까지 물품을 조달하면서 제주 포구에서 많은 장삿배도 소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그녀의 생활은 검소했다. ‘풍년에는 흉년을 생각해 절약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은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해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면서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절제된 생활을 하였다.
정조 17년(1793)부터 제주도에는 흉년이 계속되었다. 세 고을에서만 굶어 죽은 사람이 6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듬해 제주목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급박한 상황을 보고했다. 정조는 그의 요청에 따라 곡식 2만 섬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곡식을 싣고 떠난 선박 가운데 다섯 척이 침몰하면서 곡물 1만여 섬이 바다에 가라앉아 버렸다. 보릿고개가 다가오는 제주에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접한 김만덕은 힘겹게 모은 자신의 전 재산을 풀어 육지에서 쌀 5백여 석을 사다가 백성들에게 진휼미로 내놓았다. 장사 수완이 좋아 악착같이 부를 축적할 줄도 알았지만, 어렵게 번 돈을 기꺼이 사회에 환원할 줄도 알았던 김만덕이야 말로 나눔과 베풂의 삶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정조 20년(1796) 양반도 아닌 일개 평민 여성이 양반보다 더 많이 기부한 것을 알게 된 정조 임금은 여성이라 벼슬을 줄 수도 없어 제주목사를 통해 김만덕의 소원을 물어보라 명했다.
“다른 소원은 없사옵고 오직 이곳 제주를 벗어나 임금님 계신 궁궐과 천하명산이라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소박한 소원이었다. 당시 제주도는 여인들이 육지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던 터라 제주목사는 조정에 김만덕의 소원을 보고했다. 평민들은 사사로이 왕을 알현할 수 없었으므로 정조는 내의원 행수行首의 벼슬을 내려 상경한 김만덕이 자신과 왕비를 알현할 수 있게 했다. 이때 정조는 ‘너는 한낱 여인의 몸으로 의롭게도 굶주린 백성 1천 백여 명을 구했으니 기특한 일이다’라면서 상을 내렸다.
이듬해 봄 금강산을 유람한 후 김만덕은 벼슬을 내놓고 귀향했다. 귀향한 지 15년 뒤인 순조 12년(1812) 김만덕은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20여 년 후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 온 추사 김정희가 김만덕의 진휼 공로에 크게 감동해 양손자인 김종수에게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넘친다’라는 편액을 써주었다.
김만덕은 여성의 권리란 찾으려야 찾아볼 수 없던 시대에 자신의 처지에 좌절하지 않고 끝내 명예를 찾은 여인, 험한 인생길에서 인간 승리로 자신을 개척한 여인, 어렵게 벌어들인 자신의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아 사람들의 생명을 살린 여인, 신분을 뛰어넘은 최초의 여성 사회사업가로 우리에게 오래 기억될 것이다.

글. 김병기 (사)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사진. 문화재청, 연합뉴스, 제주 모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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