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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둘러싼 투쟁(백선엽 관련자료)

필그림2 2011. 8. 4. 21:02

기억을 둘러싼 투쟁(백선엽 관련자료)

-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 -


   
▲ 역사학계는 2009년 11월 30일 흥사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친일진상규명작업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한상권 한국사연구회 회장(덕성여대 교수, 왼쪽에서 세 번째)이 발표를 하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한국방송(KBS)이 지난 6월 24일과 25일 이틀간 백선엽(1920∼)을 6·25 전쟁의 영웅으로 미화한 다큐멘터리 ‘전쟁과 군인’을 내보냈다. 이에 앞서 사월혁명회,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83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친일·독재 찬양방송 저지 비상대책위’는 친일파 백선엽을 구국의 영웅으로 대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 방송계획을 즉각 철회하라고 요구하였다.

광복회도 백선엽 다큐 방송이 나가기 하루 전인 지난달 23일 한국방송에 공문을 보내 ‘백선엽-이승만 다큐’ 중단을 요구했다. 광복회는 공문에서 “백선엽은 항일세력을 무력 탄압하는 조선인 특수부대 ‘간도특설대’의 장교로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라며, “친일파 백선엽에 대한 찬양 방송은 물론, 오는 8월 15일 광복절에 내보내겠다는 이승만 찬양 다큐의 제작도 당장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잇따른 반발에 직면한 한국방송은, “백선엽 다큐는 광복회 정신과도 그 뜻을 같이 한다.”라는 답변서를 광복회에 보내는 것과 함께, 골든타임인 밤 10시부터 1시간씩 KBS 1TV를 통해 이틀간 백선엽 다큐 방영을 강행하였다. 한국방송의 백선엽 다큐 방송을 계기로 ‘기억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1.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한국방송이 백선엽을 역사의 이편으로 되살리려는 노력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대다수 국민들 망각의 저편에 있는 인물이었다. 한국전쟁기 백선엽의 공(功)에 관해서는 KBS가 이틀에 걸쳐 충분히 다루었으므로, 이제 남은 문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광복회 등 독립운동 단체들이 거론하는 그의 과(過)라 할 수 있는 일제강점기 친일행적에 대한 진실 드러내기다. 먼저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내용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백선엽은 만주국이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펑톈(봉천)에 세운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에 1940년 3월 입학해서 1942년 12월에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자무쓰(佳木斯) 부대를 거쳐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1943년 12월 러허성(熱河省)에서 간도특설대 기박련(機迫連: 기관총?박격포 중대)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국군 중위였다.

백선엽이 조선인 항일유격대 활동을 제압할 목적으로 1939년 편성된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하였다는 사실이 눈에 띤다. 그러면 그는 무슨 생각으로 항일독립군을 토벌하는 간도특설대에 입대하였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간도특설대의 비밀』 중 백선엽의 회고 부분에 잘 나와 있다.

이와 같이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는 부대였기에 (1)게릴라(항일무장독립군: 필자)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2)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 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중략) 주의주장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3)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특설대에서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기분을 가지고 토벌에 임하였다.(경향신문 2011.6.29 ‘[온라인 편집장 칼럼] ‘백선엽 만세! KBS 만세!’에서 재인용, 밑줄과 번호 표시는 필자)

그의 회고 내용 중 (1)은 사실을 (2)(3)은 주장을 말한 것이다. 각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1)에서 백선엽은 자신이 조선인 항일무장독립군을 토벌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토벌작전이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라고 하였다. 또한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라고 실토하였다. 그는 교전상대가 항일독립군임을 인지한 상태에서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백선엽이 입대한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에 만주국 젠다오성(間島省) 성장 이범익(李範益)의 건의를 받아들여, 옌지현(延吉縣) 특무기관장 겸 젠다오 지구 고문인 오고에(小越信雄) 중좌가 주도해서, 조선인 특설부대라는 이름으로 결성한 특수부대였다. 관동군과 만주국군에 의해 만들어진 소수 민족부대로는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 이외에도 아사노(淺野)부대(백계러시아인 부대), 이소노(磯野)부대(뒤에 53부대로 개칭, 몽골인 부대), 회교(回敎)부대 등이 있었다.

각 소수민족부대는 비록 일제와 만주국에 의해 민족협화(民族協和)의 상징으로 선전되며 정책 성패의 가늠자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었지만, 사실 이 부대들은 관동군에 의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 차원에서 이용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성공한 부대는 간도특설대였다. 일제 스스로도 “정예의 평판이 높고 토벌공적이 컸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조선독립군은 조선인이 토벌해야 한다”는 일제의 이이제이 전략에 따라 결성된 간도특설대가 주 공격목표로 삼았던 무장 세력은 1936년 중반에 성립한 중국 동북지역 항일연합부대인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었다. 동북항일연군 가운데 한인이 많았던 1군과 2군, 특히 2군은 한(韓)·중(中) 양 민족의 연합을 실현한 ‘독립군’이라고 볼 수 있는 성격이 강했다.
   
▲ 이홍광 흉상. 용인신문 자료 사진. [사진제공-한상권]

동북항일연군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과 더불어 조선인 3대 무장 세력이었다. 동북항일연군은 만주국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전투 및 선전활동에 주력하였으며,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평안북도 일대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전개하였다. 예컨대 동북항일연군의 모체인 동북인민혁명군의 참모장 이홍광(李紅光:1910∼1935)이 1935년 2월 13일 새벽 2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일제의 만주침략에서 군사적 요충지의 하나였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기습하여 커다란 전과를 올린 것이 유명하다.

이 전투는 1930년대 만주 항일무장투쟁 세력 최초의 대규모 국내진입작전이라 할 수 있다. 만주국과 관동군이 간도특설대 본부를 백두산자락 바로 밑에 있었던 안도현(安圖縣) 명월구(明月溝)에 둔 까닭은 그곳이 동북항일연군 유격활동의 근거지였기 때문이었다.

간도특설대는 관동군이 필요로 하는 각지의 최전선을 이동하며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거나 항일무장단체를 탄압하는 활동을 하였다. 중국 측 조사에 따르면, 간도특설대는 1939년 4월 안도현(安圖縣) 십기가촌(十騎街村)에서 동북항일연군을 공격하는 전투에 참가한 이래 동북만주에서는 이들에 대한 공격에만 전념했는데, 특히 안도현 일대의 유격대, 주로 조선인 대원들이 많았던 제1, 2군을 상대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 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 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 고문을 당했다.

(2)에서 백선엽은 “독립군을 토벌하였기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니고, 일본을 배반하고 독립운동을 한다고 해서 독립이 빨라지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우리 민족의 힘으로는 독립이 힘들다는 이른바 ‘독립불능론’이다. 이 주장은 친일은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는 변명의 뿌리가 된다. 친일이야말로 민족역량의 한계를 일찍이 깨닫고 순응과 적응을 통해 지혜롭게 살아간 삶이요, 자주와 독립을 위한 저항과 투쟁은 시대착오적인 낡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많은 친일파들이 백선엽처럼 ‘정의가 힘’이 아니라 ‘힘이 정의’라고 생각하였기에, 국권침탈기(1905-1910)에는 매국행위에 가담하여 작위 등을 받았으며, 식민통치기(1910-1945)에는 식민통치기구에 참여하여 식민지배의 효율화·안정화에 기여하고, 독립운동가와 그의 가족을 학대·밀고·체포·살상·처형하였으며, 침략전쟁기(1937-1945)에는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을 선전하고,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에 동조하여 침략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는데 지원·협조하였다.

그러나 친일행위는 민족적 억압과 차별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반민족적이며, 폭력적인 파시즘적 지배를 옹호하였다는 점에서 반민주적이며, 일제의 전시총동원체제 하에서 전쟁에 협력하였다는 점에서 반 평화적인 범죄행위다. 백선엽의 주장은 자신의 반민족적·반민주적·반평화적 범죄행위에 면죄부를 주려는 데서 나온 변명이며, 민족의 독립과 정의로운 사회건설을 꿈꾸었던 독립운동가의 저항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사실적으로도 무력화시키는 궤변일 뿐이다.

특히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사실은 백선엽이 같은 민족인 항일독립군을 토벌한 반인륜적인 학살행위에 대해, 민족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사과나 반성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학병(學兵)으로 끌려갔다가 수 천리 떨어진 한국광복군을 찾아 목숨을 건 결단을 내렸던 장준하, 김준엽, 김문택 등의 행동은 따르지 못할지라도, 만주국군(滿洲國軍) 출신자들의 회고록 등에는 군사간부학교에 들어간 이유를 독립운동과 연관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공통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일권은 입교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또 어떤 이는 일제하 만주군과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만주군 대위까지 진급했으니 친일파가 아니더냐 하고 심하게 평하기도 한다. 이 역시 아니라고 우겨댈 수 없는 일이다. 일본군의 군복을 입고 일본말로 훈련받은 것이 사실이니, 보는 이에 따라서는 친일파로 몰아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일한다거나 일본 천황을 위해 충성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나뿐 아니라 나와 함께 같은 코스를 거쳐 온 수많은 전우들 역시 나와 같았으리라고 믿는다. 앞서 말했듯이, 나의 만군 지원의 동기는 순수했다. 만주국이나 일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장차 고국을 위해 군 지휘관의 소질을 터득하라 하는 장내원 선생의 간곡한 권고를 따랐던 것이다.

그러면서 정일권은 자신이 1943년부터 중경의 임시정부와 연계되어있는 신경(新京)의 교민회(僑民會) 간부들과 은밀히 교분을 맺고 때를 기다리면서 은인자중하고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 주장의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만군 지원의 동기가 만주국이나 일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장차 독립될 조국을 위해서라고 주장하여, 최소한의 민족적 양심은 남아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자신의 입교동기와 만주국군(滿洲國軍) 장교로서의 행동을 독립운동과 민족을 위한 선택으로 치장하려는 태도는 만주국군 출신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이었다. 반면 백선엽의 경우, 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는 부대”라 하여 ‘천황의 뜻을 따르는 특설부대’로서의 자부심만 드러냈을 뿐, 천황을 위해 동족에게 100여 차례나 반복적으로 총부리를 겨눈 반인도적인 범죄행위에 대해 어떠한 사과나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

백선엽이 일제 천황의 군대인 황군(皇軍)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빌며 항일독립군의 역량을 형편없이 깎아내린 것과는 달리, 한국독립운동은 지속성과 광범성, 근대성과 다양성, 그리고 강력한 투쟁성이라는 특성이 있다. 국내는 물론 국외 각지 한민족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독립운동의 무대가 되는 광범성을 가졌고, 대한제국시대의 전제군주국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국민국가 즉 민주공화국으로 새롭게 독립하려는 근대성을 가졌다.

또한 운동 노선과 이념의 다양성 또한 한국독립운동의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게다가 한국독립운동은 매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시작부터가 무장투쟁인 의병전쟁으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런 전통은 한말 국민적 의병전쟁을 거쳐 1920년대 만주·노령의 독립군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1930·40년대 항일빨치산투쟁이나 조선의용대(군),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졌다.

한국독립운동의 중심에는 투쟁성의 상징으로 무장 독립투쟁의 자부심이 자리하고 있었고, 무장 독립투쟁은 여러 독립운동 노선과 방략의 원천이자 동력이기도 하였다. 간토특설대가 활동하였던 만주지역에서의 항일운동은 1910년대 의병항쟁, 1920년대 독립군 투쟁, 1930년대 항일연군투쟁으로 변화·발전하였다. 중국내 조선인 항일투쟁이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특징으로, 첫째는 1910년부터 시작되었으니 시기적으로 빨랐고, 둘째는 관내는 물론 동북 전체에 분포되어 항일했으며, 셋째는 남녀노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참가했다는 세 가지 점을 들 수 있다.

(3)에서 백선엽은 민중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사명감으로 독립군 토벌에 임했다고 하였다. 간도특설대가 평화 유지군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는 달리, 간도특설대는 항일단체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마을 전체를 소각하거나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잔인한 탄압’의 대명사였다. 간도특설대는 전시 상태의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민간인에 대한 살상을 금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민과 병을 가리지 않았다.

최근 중국에서 정리한 미 발간 당안(?案) 자료에 의하면, 1944년 8월 1일 간도특설대는 석갑진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동장화(東庄禾)를 토벌할 때 피난 가는 백성들을 향하여 사격을 하였으며, 임산부의 배를 칼로 찔러 살해하거나, 마을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집단 구타를 하기도 하였다. 그해 8월 5일에는 석갑진의 동남쪽에 위치한 동전각장(東田各庄)에서 군중들을 유항요(劉恒堯) 집에 모아놓고 팔로군의 행적 등에 대하여 탐문한 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마을 주민 유몽재를 총으로 살해하였다.

1944년 9월에는 석갑진 서북에 위치한 마을에서 팔로군 한 명을 체포하여 고춧물로 고문을 한 후 다시 가죽띠로 구타하여 살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녀자에 대한 강간도 서슴지 않았다. 1941년 안도현 대황구(大荒溝)에서 여성유격대원을 사로잡아 강간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하였으며, 1944년 11월 간도특설대원 3명이 부녀자를 윤간하고 그 남편을 살해하였다.

간도특설대가 7년여 동안 관동군 최전선에서 잔혹한 토벌진압을 하면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연변 작가 류연산이 쓴 『일송정에는 선구자가 없다』라는 책에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야간토벌 작전 중 산나물을 뜯는 이들을 잡아다가 불태워 죽임
○간도특설대의 충혼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전사한 항일부대원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냄
○포로로 잡힌 항일부대원을 일본도로 머리를 자르고 잘린 머리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음
○항일부대원을 숨겨준 마을 원로를 살해해 그의 머리를 삶은 후 두개골을 장식품으로 만듦

조선인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의 항일무장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토벌과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악랄한 만행 등 반인도적· 반인간적 범죄행태는 한인에 대한 야만적 이미지를 심어 주기에 충분하였다. 간토특설대의 만행으로 인해 중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악감정이 한인에게 돌아오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2. 미래를 위한 비판적 성찰


   
▲ 간도특설대의 훈련 모습. 간도특설대는 간도지역을 중심으로 항일유격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이 창설한 조선인 특수부대로 1938년 1기부터 45년 7기까지 배출했다. 발대 당시 명칭은 조선인 특설부대였고, 후에 간도특설대로 바뀌었다. 경향신문 자료 사진. [사진제공-한상권]

해방 후 오늘에 이르는 동안 친일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 해결이 지체되면서 친일문제는 한국사회의 구조와 구성원의 자기 인식은 물론 타자 인식에까지 깊숙이 자리한 심층의 문제로 바뀌었다. 이제 친일문제는 일제하 친일 행위에 관한 진상규명만이 아니라 친일 미 청산이 가져온 한국 사회의 상흔까지도 되돌아보아야 할 숙제가 되었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계기로 한국역사연구회를 비롯하여 진보적인 6개(한국사연구회,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역사연구단체는 우리 사회 심층에 자리한 식민지 피지배의 아픈 경험과 친일의 상흔(傷痕)을 한국사회의 자기 성찰과 미래 지향을 위한 역사적 경험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다음 세 가지를 제언한 바 있다.

첫째, 식민지 역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자기반성을 하자.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망각에 분노하는 것을 넘어 우리 스스로도 과거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고 제대로 반성할 때, 한반도와 동북아의 미래와 평화를 여는 힘이 더욱 커진다. 나치 지배의 잔재를 확실하게 청산하면서 독일에게 당당하게 과거사 정리를 요구한 프랑스가 있었기 때문에 독일 역시 과거사정리에 철저하게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한국 스스로가 제대로 과거사 정리를 해야 비로소 일본에게 과거사 정리를 요구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세운 조선총독부가 한국을 지배하던 시기에 한국인들은 자발적 혹은 타율적으로, 출세하기 위해 혹은 살기 위해 식민통치에 협력하였다. 최근 한국사회에는 일제 지배 하에서 습득한 지식과 기술을 과대하게 강조하면서 식민 지배를 긍정하는 역사인식까지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주장이 무절제하게 남발되는 현실에 심각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이 ‘친일문제’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아픔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묻어둔다면,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과거를 왜곡하거나 망각하지 말라고 요구할 수 없다. 또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민간인에게 가해졌던 국가의 폭력도 비판할 수 없다. 물론 엄혹한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상황에서 친일에 대한 도덕적 기준이 지나치게 엄중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명백한 친일 행적을 두고 어쩔 수 없었다거나 아니라는 부정으로만 일관하는 것은 옳지 않거니와,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생명과 재산을 내던진 선열들을 모욕하는 일이기도 하다. 더구나 어느 특정 개인이 친일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명, 인권, 재산에 위협을 가하였다면, 이를 엄중하게 자성해야 한다.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리가 되고 일본의 전쟁 행위에 협력하는 것은 결국 일본제국주의의 폭력에 가담한 행위가 된다. 일본군국주의의 폭력은 대한민국 정통성과 그 기반인 자유민주주의에 정면으로 대립되기도 한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가해에 직접 간접적으로 책임을 지니고 있는 이들에게 과거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기 위해, 한국 사회에서 국가에 의한 불법적 폭력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한국인이 다른 나라 사람을 가해하지 않기 위해, 우리 스스로의 내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가 ‘친일문제’를 성찰하는 것은 다시는 그러한 폭력과 반인륜적 행위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다짐인 것이며, 인권과 자유, 평화라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는 과정인 것이다.

둘째, 자기성찰을 통해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성숙한 시민사회를 만들자.

우리가 ‘친일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은 그 고통을 함께 안으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관련 후손들에게 ‘친일파’ 후손이라는 불명예를 씌우거나 불이익을 가하려는 연좌제의 의도가 있다면, 우리는 이를 단호히 배격한다. ‘친일행위자’들이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이룩한 공로는 공대로 친일의 과오는 과대로 평가하면 된다.

우리 역사학자들은 한국 사회의 일부 지도층이 자신들의 선조와 관련된 친일의 멍에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가 더욱 성숙하고 내실 있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실제로 ‘친일파’ 후손이 스스로 재산을 반납하거나 친일행위 진상 규명을 지원하고 선조의 과오를 담담하게 수용하는 태도를 접하고 많은 이들이 존경의 뜻을 표한다. 이는 바로 한국 사회가 식민지 피지배의 경험이 낳은 상흔을 스스로 치유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이다.

우리 모두 견디기 어렵더라도 그 아픔을 감내하면서 오늘과 내일을 위해 식민지 지배와 피지배의 과거사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의연하고 아름다운 자세이다. 미래는 국가의 부당한 억압과 폭력이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며, 평화가 정착된 그리고 인권이 보장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셋째, 일본은 침략과 전쟁의 과거사를 반성하고 사죄해야 한다.

우리가 일본에게 일제강점기 동안 저지른 학살의 만행, 강제 징용·징병, 여자정신근로대 문제, 군위안부 문제, 재일한국인 문제 등 과거사에 대해 반성과 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민족 감정 때문이 아니라 동북아 나아가서 인류평화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통과의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사회의 대다수는 여전히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전도된 역사인식으로 과거를 대할 뿐, 아시아의 다른 나라와 그 구성원들에게 끼친 만행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 이는 일본제국이 자행했던 침략과 전쟁을 총체적으로 반성하기보다, 오늘의 일본을 낳은 일본인의 희생을 강조하는데 초점을 둔 일본 국왕 아키히토의 즉위 20년 기념 기자회견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과거에 대한 ‘망각’에 대해 분노한다. 우리의 주변에는 일본제국주의가 자행한 만행으로 몸과 마음에 상처받은 분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 또 우리의 이웃과 그 가족들 중에는 일본제국주의의 폭력으로 인해 감옥과 투쟁지에서 또는 강제 동원된 노동현장과 전쟁터에서 죽어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일본제국주의가 다양한 형태로 한국인에게 가한 폭력의 상흔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학자들은 진실로 21세기의 일본이 더 이상 과거사에 얽매이지 않고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나아가서 일본이 평화적인 동북아 공동체의 한 주체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일본 스스로가 결행하는 명확한 과거사 정리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에필로그


   
▲ 2009년 11월8일 서울 효창공원 백범 김구 선생 묘역 앞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열렸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 김병상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왼쪽부터). [통일뉴스 자료사진]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일본제국주의의 불법적 국권침탈과 강압적 식민통치, 반인륜적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인물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정리함으로써 우리 역사에 상식과 정의의 숨결을 불어 넣겠다는 목적으로, 『친일인명사전』(전 3권)을 발간했다.

뒤이어 11월 27일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진상규명위)에서도 민족정통성 확립과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을 위한 공동체 윤리를 확립할 목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종합. 전25권)를 발간하였다.

이 두 작업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와해된 지 꼭 60년 만에 뒤늦게 이루어졌지만, 식민 지배를 경험한 민족으로서 일제의 잔재와 협력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정리의 시도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또한 일체의 폭력이나 처벌, 재판이나 고소·고발 행위를 배제하고 최소한의 진실 드러내기와 사실복원을 시도하였던 점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식민 잔재 정리의 핵심인 친일 진상규명 작업의 물꼬를 튼 이는 임종국이다. 그의 유지는 1999년 8월 ‘친일인명사전 편찬지지 전국 교수 일만 인 선언’으로 계승되었다. 친일파의 행적을 자료로 남겨 역사에 그 책임을 준엄하게 묻고 우리사회에 올바른 가치관을 세우기 위해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기로 지식인들이 뜻을 모은 것이다.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의 폭넓은 지지와 동의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의 역사적 당위성을 입증하는 것이며, 이를 범민족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2004년에는 네티즌을 중심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국민성금운동이 전개되어 3만 여 명의 시민들이 동참하였다.

세계사적으로도, 역사적 과제를 지식인·시민사회가 자발적·헌신적으로 나서서 해결한 사례는 흔치않다.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예술 등 각 분야의 교수 학자 등 전문연구자가 참여하여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은 지식인·시민사회가 앞장서서 역사 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음을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징표였다.

반면 친일파를 구국의 영웅으로 미화한 한국방송의 백선엽 다큐는 인류보편의 과제인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남긴 범죄와 그 잔재를 극복하려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선엽을 아무리 6.25 한국전쟁에서 전과를 세운 장군이라고 해도, 그를 찬양할 수 없는 이유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같은 민족을 토벌한 특수부대의 장교였기 때문이다. 김남주는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독립국가에서도 여전히 친일파가 득세하는 가치관이 전도된 현실을 <어머님께>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절창(絶唱)하였다.

일제 30여 년 동안
낫 놓고 ㄱ자도 모르셨던 어머니
미제 40여 년 동안
호미쥐고 ?표도 모르시는 어머니
일자무식 한평생으로
자식사랑밖에는 모르시는 어머니

지금 나처럼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속자라 부르지 마세요
양심수라 부르지도 마세요

정치범이다 뭐다 시국사범이다 뭐다 그런 이름으로도 부르지 마세요
그냥 애국자라 하세요

일제 30여 년 동안
나라로부터 받아본 것이라고는 징용통지서밖에 없으셨던 어머니
미제 40여 년 동안
나라로부터 받아본 것이라고는 세금통지서밖에 없으신 어머니

일자무식 한평생으로
글 한 줄 쓰신 적 없고 편지 한 줄 읽으신 적 없어도
자식사랑은 한으로 쌓여 가슴이 막히신 어머니

지금 나 같은 사람을
감옥에 처넣고 있는 사람들을
대통령이라 부르지 마세요
독재자라 부르지도 마세요
보수다 뭐다 반동이다 뭐다 그런 이름으로도 부르지 마세요
그냥 매국노라 하세요

달리 부르는 놈이 있으면 그 놈 주둥이를 호미로 찍어 주세요
달리 쓰는 놈이 있으면 그 놈 손모가지를 낫으로 잘라 주세요

지금 이 나라에는
보수와 진보가 있는 게 아니어요
우익과 좌익이 있는 게 아니어요
매국노와 애국자가 있을 뿐이어요
그 중간은 없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어머니.


비판적 성찰은 진실한 고백을 전제로 한다. 과거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불편해 하는 이들은 옛 서독 대통령 바이체커(Richard von Weizsacker, 1920~)가 1985년에 종전 40주년을 맞아 서독 연방의회 본회의장에서 한 연설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지나간 일이 수정되거나 백지화될 수는 없습니다. 과거에 대해서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에 대해서도 장님이 됩니다. …참회와 속죄 없이는 구제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과거를 기억함은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증언입니다. 그것은 속죄의 원천입니다. …이 증거를 망각하거나 거부하는 자는 내일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게 마련입니다.

과거에 그릇된 세력의 편에 서서 누군가에게 고통을 준 사람은 진실한 반성과 참회를 할 때 비로소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은 과거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이지,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도록 망각하고 미화하는 일이 아니다. (통일뉴스,11.07.21)